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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선위안] “베이징 역사, 내 손안에 있다”

등록 2004-01-08 00:00 수정 2020-05-02 04:23

베이징 첸먼(前門) 거리 뒷골목은 일명 바다후퉁(八大胡同)으로 유명한 곳이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이 골목 일대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홍등가였다. 청조 말기 모든 중요한 국사가 바다후퉁에서 결정되었을 정도니, 이곳은 근대 초기 중국의 역사를 묻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랑선위안(朗深源·76) 할아버지는 이곳 바다후퉁에서만 50년 넘게 살아온 토박이 베이징 사람이다. 바다후퉁이 중국의 쇠락사를 증언하는 뒷골목 박물관이라고 한다면, 랑 할아버지는 1949년 이후 새로운 바다후퉁의 역사를 목격한 산 증인이다. 그는 또 바다후퉁뿐 아니라 베이징의 과거와 현재를 전해줄 기록자이기도 하다. 랑 할아버지는 현재 베이징의 역사를 책으로 쓰는 중이다.

랑 할아버지를 이 골목에서 만났을 당시, 그는 한두평 정도 되는 사각형의 작은 집 안에서 책상 가득 각종 신문들을 모아놓고 이것저것 필요한 자료들을 가위로 오려내고 있었다. 가구라고는 달랑 낡은 침대와 책장, 책상 겸 밥상이 전부인 그의 집 안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렇게 직접 가위질을 해서 모아둔 베이징 관련 자료와 책들이다.

누가 베이징의 역사에 대해 질문을 하면, 랑 할아버지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책장에서 관련 자료를 꺼내 ‘증거’부터 제시한다. 산더미 같은 자료들 속에서 ‘딱’ 원하는 자료를 찾아내는 것도 신기하지만,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를 훤히 꿰고 있는 할아버지의 녹슬지 않는 기억력도 참 놀랍다.

랑 할아버지가 베이징 역사를 연구하면서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개발지상주의에 매몰돼 ‘기억되고 보존되어야 할 베이징의 이야기’들마저 쓸어버리는 몰가치한 발전지상주의다. 그래서 그는 그 이야기들이 다 잊혀지고 사라지기 전에, 그리고 병들어 죽기 전에 서둘러 자신이 목격하고 수집한 베이징 이야기들을 책으로 기록해두려는 것이다.

백내장으로 눈마저 침침해져서 작업이 더뎌지고 있지만 2~3년 안에는 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랑 할아버지의 작은 방 안에서는 지금 베이징의 ‘생생한 역사’가 만들어지는 중이다.

베이징= 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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