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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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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지옥을 이긴다

권력과 시스템은 ‘어떤’ 삶/죽음을 포기해버리지만… 먼저 겪은 생존자가 나중 겪는 자의 손을 맞잡다
등록 2025-01-08 08:24 수정 2025-01-08 08:26
2024년 12월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막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 행렬에 시민들이 함께하고 있다. 12월21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던 전농 회원과 트랙터 30여 대와 화물차 50여 대가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가로막혀 시민들과 함께 밤새워 대치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4년 12월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막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 행렬에 시민들이 함께하고 있다. 12월21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던 전농 회원과 트랙터 30여 대와 화물차 50여 대가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가로막혀 시민들과 함께 밤새워 대치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먼저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간절하게 빕니다. 그리고 남겨진 분들의 애통한 마음에 공동체 모두의 위로가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국가 애도 기간 선포가 말하는 것처럼 이 가슴 아픈 참사가 나라라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모두가 말과 행동을 어떻게 삼가고 절제해야 하는지를 실천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 공동체란 불화가 발생하는 과정 속에서도 아픔을 공유하며 알 수 없는 상대의 고통에 물러나 삼가는 윤리가 작동해야지만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사를 경험한 당사자에게 현실은 아포칼립스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던 시대의 참모습이 참사를 통해 드러난다. 현실은 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작동한다. ‘선지자’인 누군가가 아무리 외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라도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며 대다수 사람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렇기에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불행은 고립된 사건이 된다. 이태원의 참사도, 채 상병 사건도, 오송 지하차도의 재난도.

 

시스템은 누구라도 ‘비시민’으로 배제한다

 

그러나 재난의 당사자에게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현실의 참모습이 보인다. 현실을 감추고 있던 비밀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현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봉인이 풀리면 사람으로 보이던 자가 좀비이고, 광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선각자로 다시 인식된다. 필연이던 것이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연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사실은 필연을 넘어 운명이었음을 알게 된다.

근대국가의 ‘시민’이라면 그들 모두의 생명은 국가에 의해 보호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푸코가 말한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은 시민이라고 해서 모두를 살도록 돌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존재들은 죽게 내버려둔다. 시민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었다며 죽음을 정당화해버리기도 한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권력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측정되고 평가되어 가치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가치 없는 삶/죽음으로 평가되는 순간 그 삶/죽음은 전혀 돌볼 필요가 없으며 책임 또한 그 자신에게 전가된다. 시민이지만 동시에 ‘비국민’이 되는 것이다.

많은 참사의 생존자와 남겨진 사람들은 국민(사실은 시민)에서 비국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험한다. 세월호 희생자들은 안타깝지만 여행을 가다 당한 불행한 사고이며, 이태원은 참담하게도 사적인 쾌락을 위해 ‘무분별’하게 행동하다 일어난 사고다. 이른바 ‘공공성’의 관점에서 죽음이 평가되고 규정된다. 규정과 동시에 권력은 ‘어떤’ 삶/죽음에서 손을 뗀다. 생존자와 남겨진 자들은 참사와 더불어 시민인 자신과는 무관한 줄 알았던 이 ‘어떤’의 나락에 누구나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아포칼립스다. 시스템이 붕괴하여 아포칼립스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 사람을 발가벗겨 생명의 바깥으로 내던지는 아포칼립스를 만들어낸다. 요한묵시록을 쓴 요한이 ‘본’ 로마제국이 바로 그런 체제였다.(‘본’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계시’가 아니라 ‘묵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또한 나중에 이야기할 ‘비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모든 시민의 모든 재산과 권리를 법에 기초하여 통치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기만 하면 바로 처형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법의 안쪽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법의 바깥쪽이며, 그 누군가는 누구나 될 수 있었다. 그게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포칼립스, 즉 비밀이 들춰지고 그 안에 감춰져 있는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희망의 이야기다. 시스템이 붕괴한 아비규환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정교하게 초래되는 끔찍한 고통이 현실임을 들춰내는 이야기가 어떻게 희망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

2024년 10월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참사 2주기 추모식에서 세월호참사 유가족 등 참석자들이 희생자들의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24년 10월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참사 2주기 추모식에서 세월호참사 유가족 등 참석자들이 희생자들의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재난공동체’가 ‘위로의 공간’이 되는 순간

 

오래전 요한이 묵시록을 썼다고 알려진 파트모스섬에 간 적이 있다. 요한이 묵시록을 쓴 섬 중턱의 요한묵시록 동굴에서 에게해를 바라보았다. 대표적인 유배지였다고는 하지만 바다는 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곤궁했더라도 저 평화로운 바다를 바라보며 왜 그는 걸핏하면 ‘빨간 십자가’를 든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 공포로 위협하는 책, 아포칼립스를 썼을지 상상했었다.

비밀은 요한이 ‘본’ 것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파국적 현실의 끔찍함만이 아니라 그 뒤에 전개되는 ‘새 하늘 새 땅’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본 것은 그가 믿던 신에 의해 전개될 파국 너머 새 하늘 새 땅의 ‘비전’이다. 배제되고 고통받고 처형된 자들이 귀환해 파국과 파국을 끊임없이 야기하는 시스템을 종식시키는 희망과 비전의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아포칼립스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신의 비전을 증언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권력에 의해 먼저 발가벗겨져 고통받던 그리스도교인들이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하며 고통받던 형제자매들을 위로하는 책이다. 비전을 보았기에 위로할 수 있었으며 위로를 통해 그들은 하느님의 비전을 미리 맛볼 수 있었다. ‘새 하늘 새 땅’이란 위로가 이긴(prevail) 곳이다. 단지 적수에게 승리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위로가 곧 비전이 됐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비전이 없다면 그곳은 아포칼립스가 아니며, 따라서 파국도 아니다. 그저 영속되는 지옥일 뿐이다. 지옥에 없는 것이 바로 위로다. 지옥에는 위로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위로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곳은 지옥일 수 없다. 지옥에 단 한 명이라도 위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실현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가 ‘지옥 위에 만들어지는 천국’(한국에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리베카 솔닛의 책 원제 ‘A Paradise Built in Hell’을 번역한 것)이다. 재난 가운데, 재난 너머 만들어지는 ‘재난 공동체’가 ‘위로’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지난 해 학생들과 ‘참사는 어떤 서사가 돼야 하는지’를 같이 공부하며 초대한 참사의 생존자들이 한곁같이 한 이야기가 바로 ‘위로’였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맨 먼저 달려와 두 손을 꼭 잡으며 “내 그 마음 다 안다”고 말한 분들은 광주항쟁의 유가족이었고, 이태원 참사에서 남겨진 이들에게 다가가 다시 손을 마주 잡고 위로의 말을 한 분들은 세월호의 생존자였다. ‘아무도 그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말해지고, ‘그 완전히 캄캄한 마음의 지옥을 우리는 안다’고 말하는 순간,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은 위로로 나누어졌다.

 

엄동설한 남태령에서 만들어진 ‘위로의 이야기’

 

시스템이 삶/죽음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규정하며 누구나 떨어질 수 있는 지옥을 끊임없이 마련한다면, 그 지옥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건져 올려 그 위에 천국을 세우는 것은 다름 아닌 위로다. 그렇기에 아포칼립스를 먼저 경험하고 “내 그 마음 다 안다”며 나중 온 자의 손을 맞잡는 참사의 생존자들이 ‘선지자’인 것이다. 이들에 의해 지옥의 영속성은 끝장난다. 위로에 의해 파국을 맞는 것은 다름 아닌 지옥이다.

이 엄동설한에 강추위를 딛고 경찰에 의해 트랙터가 막힌 남태령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로 ‘위로’의 이야기다. 전국농민회의 주장에 다 동의해서 간 것은 아닐 것이다. 트랙터를 몰고 온 농민들을 홀로 둘 수 없어 간 것이다. 고립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농민들을 위로했다. 또한 남태령으로 달려간 이들을 걱정하며 ‘난방 버스’를 보낸 시민들이 있다. 이들에 의해 언 발과 손을 녹이며 남태령에 있던 이들은 위로받았다. 위로하던 마음들이 위로받았으며 그 모습을 본 이들이 또 위로받았다.

이 역사적인 ‘위로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자리가 젊은 여성들이 주축을 이뤘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과 함께 공부하는 나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교실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냐는 질문에 학생들(대부분 젊은 여성 창작자들이다)이 한결같이 말한 것이 동시대 사람들을 위로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위로의 이야기인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자신이 겪은 끔찍한 폭력과 고통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지금도 어디선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자신들이 그 고통을 겪었을 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은 위로가 되고 맞서 살아갈 용기를 좀더 일찍 낼 수 있었을 거라며, 바로 그런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끔찍한 고통을 연쇄적으로 당한 이가 타인을 위로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폭력이 많다. 오히려 이들이 위로받지 못하고 내버려져 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곳이 지옥이라고 증거하는 그런 폭력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래서, 자신들이 위로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뒤에 오는 이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고통받는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 발가벗겨진 자기 경험을 이야기할 준비가 된 ‘용기 있는 존재들’이었다.

 

잔인한 2024년을 딛고 일어설 새해가 되길

 

참으로 잔인하고 힘겨운 2024년이었으며 12월이었다. 그러나 이 지옥 가운데에서도 이들이 만들겠다고 오는 위로의 이야기에, 묵시록의 위로에 심장이 귀 기울인다. 이들에 의해 아포칼립스는 발가벗겨진 우리 삶이 아니라 지옥이 파국을 맞이하는 묵시록이 된다. 결국 이들이 용기를 내기에 위로가 이기고 위로의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이 지옥을 이긴다. 이 잔인한 2024년의 12월을 딛고 2025년 새해는 이들이 써 내려가는 묵시록에 용기 있게 응답하는 한 해가 되기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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