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 진보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콜라보네이션>, 스리체어스 펴냄)라고 스스로 표현했다. 그의 자기인식과 실제 모습은 괴리가 있었다. 2014년 충남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뒤 권력의 단맛에 도취된 그는 수행비서에게 ‘티는 안 나되 철저한 의전’을 요구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주변인은 없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을 대리하는 선출직 공무원이라는 자각은 희미해졌고, 감시와 견제가 덜한 지방정부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워나갔다. ‘민주주의자 안희정’은 그렇게 왕국의 ‘벌거벗은 임금님’이 됐다. 2018년 전 수행비서 김지은씨의 ‘미투’(성폭력 고발)로 안 전 지사가 저지른 권력형 성범죄가 세상에 드러났고, 유력 대선주자는 몰락했다.
최근 문상철(40)씨가 출간한 <몰락의 시간>(메디치미디어 펴냄)은 안 전 지사가 과잉 의전, 국내외 로비스트, 정·재계 엘리트, 정치 팬덤 등에 어떻게 포획돼 타락하는지를 담았다. 문씨는 김지은씨의 첫 조력자다. 2018년 평창올림픽 폐막식 날 문씨에게 전화한 김지은씨는 성폭행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경험한 내용을 검찰에 진술한 데 이어 법정 증언까지 했다. 김지은씨의 책 <김지은입니다>에서는 ‘문 선배’로 등장하고, 법정에서는 ‘김상훈’이라는 가명을 썼다.
증언의 대가는 가혹했다. 곳곳에서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이후 정세균 국회의장실과 의원실 근무만 임기를 마쳤을 뿐, 다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등 6개월 동안 약 스무 곳에 지원했지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정치를 떠나 3년간 한 중견기업에 재직했는데, 11월 말 문씨의 책 출간을 계기로 회사는 사직을 권고했다.
그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진 안 전 지사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핵심 참모였다. 2011년 충남도지사 비서실에서 메시지·여론조사 담당 업무를 시작으로,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 제19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준비팀, 경선 수행팀장을 맡았다. 그사이의 2012∼2016년에는 사회 각 분야 전문가를 불러 과거 정부 정책을 복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안희정의 공부’ 모임을 주도했다. 안 전 지사를 준비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몰락의 시간>은 가해자와 지근거리에 있었기에 쓸 수 있는 내부고발이다. 문씨는 “유사한 행동, 유사한 부조리가 있을 때 적어도 이 기록이 하나의 레퍼런스(참고 자료)가 돼서 ‘이런 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책 출간을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분노와 자극적인 폭로는 최대한 덜어내고 과거를 차분히 복기했다. 문씨는 어떻게 이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었는지, 피해자는 왜 2차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등을 조직 구조와 정치권 문화의 측면에서 살핀다.
문씨는 “벌거벗은 임금님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우리 곁의 수많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목도하고 있다. 그 한 사례로 안희정 전 지사 이야기가 있을 뿐”이라며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와 그 구조를 제대로 직면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제2, 제3의 안희정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외부에서 보는 ‘정치인 안희정’은 인권·젠더·민주주의·소통·통합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제 안희정 조직은 가부장적 문화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안 전 지사는 “우리 노무현 가문에서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고, 이에 영향받은 측근들도 안희정이라는 가장을 중심으로 뭉친 ‘안희정 가문’을 만들고자 했다. 문씨는 “그 ‘가문’이라는 단어는 결국 구성원의 잘못이나 허물을 덮어주고 우리는 언제든 함께 모여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줬다”고 말했다. 실제 조직은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철저히 감싸주고 외부에는 배타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과한 의전을 불편해하던 도정 초기와 달리, 안 전 지사는 점차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체계화한 의전을 받는 데 익숙해졌다. 재선에 성공한 뒤엔 수행비서인 문씨에게 “티 나는 의전이 싫다”며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의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를 정도의 물 흐르는 의전”을 요구했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의전’은 안 전 지사에 대한 보살핌을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다. 언론의 돌발 인터뷰 시도나 팬덤의 사진 촬영 요청엔 본인이 직접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대신, 악역을 맡은 수행비서가 이들을 제지하면 본인이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이길 원했다.
도시자의 일정이 끝나고 공관에 도착할 무렵 수행비서는 공관 경비 근무자에게 연락해야 했다. 문을 연 경비 근무자는 문 앞에서 대기하다 지사가 도착하면 정자세로 경례하며 맞았다.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는 반응에 도취된 안 전 지사는 몸에 붙는 정장 차림을 위해 담배는커녕 안경닦이조차 몸에 지니지 않으려 했다. 지사 대신 수행비서가 잡다한 개인 물품을 지니고 다녔다. 커피에 시럽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아메리카노 시럽 꾹 1회 반”), 지사가 좋아하는 우유(“서울우유 커피맛”) 등 기호를 파악해 알아서 제공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이발할 수 있도록 일정을 관리하고, 도지사가 운동하러 갈 때도 필요한 물품을 챙겨줘야 했다. 공적 업무를 보좌한다는 수행비서 역할과 사적 수발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다.
이 수행비서 매뉴얼을 만든 사람은 문상철씨다. 2016년 수행비서 업무의 원활한 인수인계를 원한 안 전 지사의 지시로 만들었다. 굳이 책에 이 사실을 밝히고 부록으로 매뉴얼까지 실은 이유는 “안희정을 옹위했던 조직의 일원으로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문씨는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담담히 적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내가 그 매뉴얼을 만들었다는 내용도 명기했다”고 말했다. 문씨는 안 전 지사의 성범죄를 알게 된 뒤 “나 역시 이 범죄를 용인한 무수히 많은 공범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몰락의 시간>은 가해자와 가장 가까웠던 주변인으로서 쓴 반성문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이서 일어난 범죄를 알아차리지 못했을뿐더러 이를 가능하게 한 자책과 회한이 곳곳에 묻어 있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안 전 지사는 문씨에게 “내가 존경하고 따르던 최고의 정치지도자”였다. 그랬기에 문씨는 “안 전 지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이 사회에 필요하고, 진정성이 있다고 믿고 헌신적으로 보좌했다”. “2018년 이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내가 믿고 따른 모습은 상당 부분 허울과 연출한 이미지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됐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1월부터 당내 대선후보 경선이 본격화하면서 자신의 팬덤이 보내는 환호성에 중독됐다. 경선 상대의 팬덤이 안 전 지사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자 자신을 추종하는 팬덤에 더 의지하게 됐다. 팬덤에 기생하는 ‘꾼’도 나타났다. 안 전 지사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영향력을 키워가거나 정치 콘텐츠 제작자, 수익성 시민단체 운영자 등 자기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한 이들이었다. 그 밖에 사이비 언론인, 역술인, 검증되지 않은 국외 로비스트들이 제각각 목적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안희정 전 지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사적 목적’과 욕망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발생한 원인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아 2차 가해를 방조한 가해자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지만, 문씨는 ‘안희정’의 이름을 빌려 명성과 권력을 누린 측근의 이해관계 등 2차 가해가 일어나는 구조를 짚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안 전 지사의 몰락 과정이 “마치 도르래 같았다”고 말한다. “안 전 지사가 점점 더 구렁텅이에 들어갈수록 안 전 지사를 통해 이득을 얻은 사람들은 더 위로 올라갔다.”
피해자의 문제로 몰아가야 권력형 성폭력이 아닌 ‘개인 대 개인’ 다툼이 될 수 있었고, 그래야만 조직과 주변인이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다. 대중이 피해자를 의심하고 안 전 지사를 동정하면 이를 이용해 “새로운 정치활동을 재개하거나 다른 이득을 여전히 누리는 상황”이 유지될 수 있었다. 문씨는 2차 가해자들이 “‘가해자가 그럴 리 없어’라는 생각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가해자가 잘못하지 않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래서 지금까지 2차 가해를 야멸차게 하고 있다”고 봤다.
문씨는 정치인이든, 보좌진이든 ‘공적 책임감’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적 책임감을 갖고 있다면 정치인의 잘못된 행위에 분명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최소한 정치인이 저지른 문제 행위에 공사를 구분 못 해 보좌진이 ‘잘못에 잘못을 더하는 일’은 막을 수 있다. 문씨는 안 전 지사의 측근이 “공적 책임감을 갖고 이 사건을 판단해야 했지만, 공사 구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2차 가해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안 전 지사가 3년6개월 형을 모두 채우고 출소한 2022년 8월, 안 전 지사를 마중 나온 사람 중에는 더불어민주당 강준현(세종 을)·김종민(충남 논산·계룡·금산) 의원이 있었다. 안 전 지사와 개인적 인연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두 의원은 ‘안희정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문씨는 “현역 정치인이 안 전 지사의 출소를 반기는 모습이 주는 의미에 대해 왜 고민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징역형을 살긴 했지만, 안 전 지사는 김지은 씨에게 온전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지난 2020년 김지은씨가 충남도청과 안 전 지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는 배상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가 볼 수 있는 장소에서 환영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든다.”
문씨는 현재 한국 정치권력 집단이 타락하는 가장 큰 이유로 “정치인 한 명을 영웅화하는 세태나 문화”가 배경에 있다고 본다. 정치인 한 명이 현실을 바꾸고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몰락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시스템적으로 바꿔나가는 게 아니라 한 명에게 의존할수록 그 한 명을 둘러싸는 ‘인의 장막’이 생깁니다. 주변에 몰리는 사람들을 통해 국민과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실제 국민 다수와 거리가 멀어지고 괴리되기 쉬워요. ‘정치인 한 명이 다 할 수 있다’는 기대심리, 그리고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자만감. 그게 정치인이 몰락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한 의전, 팬덤의 맹목적 지지 등은 그 큰 틀 안에 있는 것이고요.”
문씨가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내용은 “정치지도자 한 사람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버리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견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그 역시 정치인 한 명이 세상의 많은 면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안 전 지사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에 그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선 어떤 정치인도 철인이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된다. ‘벌거벗은 임금님’ 안희정의 몰락이 남긴 교훈이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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