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취재원에게 굳이 살갑지 않으려 했던 날이 있었다. ‘낙하산 논란’을 타고 외부에서 온 박민 한국방송(KBS) 사장이 고작 취임 이틀차에 그간의 KBS에 대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연 2023년 11월14일. 대규모 인사가 체감될 만큼 낯선 얼굴로 채워진 기자회견장 군데군데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지만 반가움을 전하지 못했다. 지금의 KBS 분위기에서 여권이 찍은 ‘좌파 매체’ 기자와 가까워 보여선 좋을 게 없겠다는 우려였다.
박민 사장은 정식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무언가에 쫓기듯 인사발령을 쏟아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박 사장 임명을 승인(재가)한 11월12일, 박 사장은 곧장 70여 명에 대한 ‘심야 인사’를 단행했다. KBS 사내 공지가 게시된 시각 기준 밤 9시3분께 본부장급, 밤 11시47분께 국장과 일부 부장급에 대한 인사가 이뤄졌다. 이후 11월14일 기자회견까지 170여 명 규모의 보직자 인사가 이뤄졌다.
KBS는 물론 방송계 출신이 아닌, 일생을 <문화일보> 기자로 지낸 박 사장이 어떻게 이런 속도를 낸 걸까. 박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본부장을 중심으로 능력과 성과, 또 사내 안팎의 평가를 중심으로 잠정적인 분들을 정한 다음 그분들이 전면적으로 전권을 가지고 본부 내 인사를 하도록” 했다며 “(인사에) 개입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4500명에 달하는 KBS 직원 중 ‘능력과 성과, 사내 안팎의 평가’가 뛰어난 이들을 추려서 검증할 수 있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 다른 미스터리는 국장 없는 부서의 프로그램과 진행자들이 사라진 일이다. 11월13일 박 사장 취임과 동시에 <뉴스9>을 비롯한 주요 뉴스 프로그램 앵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주진우 라이브>와 <최강시사> 진행자들이 사라졌다. 이날 저녁 방송을 앞두고 있던 시사교양 프로그램 <더 라이브>는 갑자기 편성에서 삭제되더니 돌연 폐지가 결정됐다. 하루아침에 프로그램을 잃은 제작진은 그 근거를 명확히 알 수 없었고, 프리랜서 제작진은 일자리를 잃었다.
KBS 뉴스를 총괄하는 통합뉴스룸(보도국), <더 라이브>를 제작하는 시사교양1국, <주진우 라이브> <최강시사> 등 라디오 제작을 담당하는 라디오제작국 등의 국장은 여전히 공석이다. 주요 부서의 취재나 제작 책임, 나아가 인사권이 있는 자리를 비워둔 채 ‘위에서’ 프로그램 존폐를 결정해 통보한 것이다. 비워진 자리는 모두 소속 부서의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 과반이 동의해야 임명될 수 있는 ‘국장 임명동의제’ 대상이라는 점에서, 박 사장이 이 제도를 무력화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 사장 취임 열흘차에 이뤄진 평기자 인사에선 여권이 ‘불공정 기자’로 규정했던 기자들이 시청자센터에 모이게 됐다. 2023년 초 <뉴스9> 앵커로서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과 관련해 단식농성 중인 하청노동자를 인터뷰한 뒤 여당의 맹비난을 받았던 이재석 기자(전 <사사건건> 앵커), 박민 사장이 불공정 보도로 규정한 이른바 ‘검언유착’ 오보를 <뉴스9> 앵커로서 전하고 이후 사과 방송을 했던 정연욱 기자 등이다. 언론노조 KBS본부장을 지낸 이경호 기자, 강제 해임된 남영진 전 이사장 시절 이사회 사무국장이었던 황상길 기자, KBS 기자협회장과 통합뉴스룸 국장 출신인 이재강 기자 등이 한 부서에 모이게 됐다.
그러는사이 메인 뉴스인 <뉴스9>은 ‘땡윤 뉴스’라는 모욕적 수식어를 얻게 됐다. 지상파, 종합편성채널을 막론한 방송사들이 전국적 혼란을 부른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를 첫 번째 주제로 삼아 상당한 비중을 들여 보도한 11월17일, <뉴스9>은 윤 대통령의 아펙(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 소식을 ‘톱’으로 배치했다. 영국 현지시각으로 11월21일 윤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 및 공식 환영식 참석 당시엔 특별한 가치 판단이나 분석 없이 대통령이 받는 의전을 중계하는 데 5분여를 들였다.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와 우리 정부의 9·19 남북군사합의 일부 조항 효력 정지 사태가 벌어진 11월22일엔 무려 12개 꼭지를 관련 소식에 할애했다.
일련의 사태를 거치는 동안 이야기를 나눈 일부 KBS 구성원들이 박민 사장과 겹쳐 보인다며 공통적으로 꼽은 인물이 있다. ‘공정' ‘이념' 등 추상적 단어와 거친 언사로 편을 나누고, 절차적 정당성이나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개의치 않는다는 지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박 사장의 행보는 전례에 비교해 앞으로의 행보를 예상할 수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 사장은 이미 프로그램 제작진 하차와 폐지 통보, 그 과정에서 제작 자율성 침해 논란과 관련해 방송법 위반, 편성규약 위반, 단체협약 위반 등 혐의로 언론노조 KBS본부로부터 고발당한 상태다.
이런 상황을 전하다보면 늘 듣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KBS는 파업을 안 한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피바람이 불고, 유례없는 텔레비전 수신료 분리징수로 존폐 기로에 서 있는 상황에서 KBS 내부의 무력감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과거 공정방송 투쟁을 했던 선배 세대가 경영을 맡는 동안 느낀 실망감, ‘옳은 소리’를 냈던 일부 인사의 퇴사 등이 겹친 가운데 구심점이 없다는 진단도 있다. 더 먼 길을 가기 위한 준비를 해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다만 KBS를 ‘살릴’ 의지가 없는 사장의 방송 개입 논란과 함께 쌓이는 분노가 상당하다. 한 노조 관계자는 “이미 일선 제작 현장에선 제작 거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명박 정부 당시 해직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며 법적 요건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노지민 <미디어오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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