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학 진학 상위 10개 학과가 다 의대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초과학 쪽 인재 유입은 더 감소할 겁니다.”(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 ㄱ씨)
‘장학금 돌려주고 의대 진학하는 과학고 학생들’ ‘의대 광풍에 자퇴·편입·휴학 봇물’. 2023년 상반기 교육 뉴스의 중심에는 ‘이공계 인재 의대 쏠림 현상’이 있었다. 현상의 주된 원인은 대우다. 간신히 생활비를 벌며 박사 학위를 따기까지 10년. 운 좋게 원하던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도 의사나 선진국 연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연봉. 이공계 꿈나무들에게 ‘왜 의대만 좇냐’고 탓하기엔 현실적 장벽이 크다.
2023년 하반기, 이런 ‘기초과학 연구 홀대’ 인식에 쐐기를 박는 정부 계획이 발표됐다. 정부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2024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전체 R&D 예산은 16.6%가 삭감(5조2천억원이 줄어 25조9천억원)됐는데, 특히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주요사업비 삭감 규모는 25.2%에 달한다.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를 포함한 4대 과학기술원의 주요사업비도 12%가량 줄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국가에선 교육·미래 먹거리 투자만이 살길’이란 인식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도 하지 않았던 삭감이다.
2023년 6월 윤석열 대통령의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이권 카르텔’ 언급 이후 발표된 정부 계획이다. 과학기술계 온라인 커뮤니티 ‘김박사넷’ ‘한인과학기술자네트워크’(KOSEN) 등에 올라오는 글은 놀라운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놈의 카르텔” “카르텔로 연구비가 새고 남용된다면 정확하게 지목해 처벌해야지, 막연하게 힘을 더 실어야 할 과학자들 예산을 삭감하는 건 진짜 우매한 세수 절감 대책”….
예상에서 벗어난 정부 계획은 급작스러운 과학기술 연구의 예산 조정으로 이어졌다. 직격타를 맞은 건 이공계 학부생, 박사과정 대학원 연구원, 국립·사립대 대학교수, 출연연 연구원들이다.
“지금 수행하고 있는 연구과제 예산을 그냥 위에서 삭감하라고 했다. 총체적 예산 삭감인데 이전 정부에서 강조한 연구과제는 더 많이 삭감되는 분위기다. 출연연 예산 삭감이 평균 25% 정도다. 우주·양자·탄소중립기술 이런 건 앞으로 대한민국 먹거리인데 이런 미래 연구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는 건 말이 안 된다.”(출연연 연구원 ㄱ씨)
“우리(기관)도 20%대 삭감해 어떤 과제를 줄여야 하나 심의 중인 거 같다. 급격하게 예산을 삭감하면, 현장에선 줄어든 예산에 맞게 연구비를 재조정해야 한다. 재조정해도 연구목표 달성이 어려우면 아예 목표를 바꿔야 한다. 그 절차도 까다로워서 이중고다. 낮은 가격의 장비도 있지만 어떤 연구 장비는 수억에 달하기도 한다. 철학 없는 예산 삭감도 화나지만 반대 의견 내지 않고 말 잘 듣는 장관, 관련 기관 수장들에게도 연구원들이 분개하고 있다.”(출연연 연구원 ㄴ씨)
인원 감축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삭감된 출연연 주요 사업비에서 연수직 연구원 1인당 인건비를 적용해 추산한 결과, 2024 년도 정부 연구·개발 예산안이 계획대로 확정되면 25개 정부 출연연은 연수직 연구원 1200여 명을 감축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카르텔 패거리에 속할 수 있는 사람보다 현실적으로 힘없는, 카르텔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거”(커뮤니티 김박사넷 익명 게시판 댓글)란 우려는 이공계 학부생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출연연 연구원 ㄴ씨는 “우리나라는 가장 좋은 폰은 만들 수 있지만 최초의 아이폰은 못 만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항상 눈치봐야 하는 분위기에서 혁신을 기대할 수가 없다. 항공우주과학연구원의 누리호 발사 성공 대가가 이거냔 말도 나온다”고 말했다.
국립대 교수 ㄷ씨는 <한겨레21> 서면 인터뷰에서 타격의 도미노 구조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구비 삭감 구조(연구비 삭감→ 학생 인건비 삭감→ 학생들, 진학 대신 취업으로 진로 변경→ 연구실 운영 어려움→ 기초과학 연구 역량 약화)상 결국 대학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학생들은 이런 영향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대학에서도 예산 삭감 영향은 도미노처럼 이어진다. 교수가 진행 중인 연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면 석박사 학생을 받지 못하고, 석박사 학생을 받지 못하는 연구실이 많아지면 기초과학 연구보다 취업으로 진로를 바꾸는 인재가 늘어난다. 설사 연구원에 남는 인재가 있다 해도, 감축된 인원 때문에 추가 업무가 많아지면 개인 연구 시간이 줄어든다. ‘예산을 삭감하면 카르텔이 해소된다’는 단순한 해법에 과학계가 한숨을 쉬는 이유다.
“나는 개인기초연구를 하나 진행하고 있는데, 혹시 연구 2단계를 못하고 과제가 중단될까봐 요즘 조마조마하다.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연구자들은 개인기초연구 같은 과제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제들에 삭감이 적용되면 초반에 연구 기반을 구축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이 있다. 사립대는 석사 등록금이 학기당 700만원으로 상당히 비싸, 석사 학생 두 명만 있어도 연간 등록금으로 3천만원가량 들어간다.(석사과정 학생들은 학위과정과 동시에 교수가 수주해온 과제를 수행하기 때문에 교수가 이 비용을 확보해줘야 하는데, 예산이 삭감되면 부담이 된다는 의미)”(신진 연구자인 사립대 교수 ㄹ씨)
“당장 내년부터 개인기초연구 과제 중 일부는 50% 이상 예산이 삭감되는 걸로 알고 있다. 선정률도 올해 하반기 크게 줄었다. 지방대는 소규모 인력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기초과제 수행이 어려워지면 연구실 운영 자체가 어려워진다. 인건비 걱정으로 석박사 학생을 받을 수 없는 연구실이 속출할 거고, 당연히 진학보다 취업으로 진로를 바꾸는 학생이 늘 거다. 필요한 재료를 사지 못해 실험 자체를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신진 연구자인 국립대 교수 ㄷ씨)
“대학원생들은 출연연 연구비 삭감으로 취업이 힘들어지면 외국 대학·기업으로 방향을 전환할 가능성이 크다. 또 예산을 삭감하면 추가 과제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추가 과제를 하면 개인 연구 집중 시간이 줄고 연구실 생활이 어려워진다. 연구실이 장비를 미리 사고 빚처럼 갚아나가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산이 삭감되면 연구실 운영이 어려워진다.”(박사과정 중인 국립대 대학원 연구원 ㅁ씨)
문제는 한국의 과학기술 기초체력이다. 국립대 교수 ㄹ씨는 “기업 R&D는 바로 사업으로 연결돼 금전적으로 몇 년 내에 보상받을 수 있는 연구 주제를 택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가 R&D는 사업성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인력 양성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매년 10월 노벨상의 계절이면 미디어에는 ‘우리나라엔 왜 기초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까’ 따위의 볼멘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소수의 과학자에게 예산을 몰아주는 것’ ‘민간기업이 할 수 있는, 성과·목표 달성이 분명한 연구에 예산을 주는 것’ ‘과학자의 급여를 줄이는 것’ 등을 걸림돌로 꼽는다. 지금 상황은 이 걸림돌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전체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신진 연구자는 지원하겠다는 방침, 상대평가를 도입해 하위 평가를 받은 사업의 예산은 삭감하겠다는 계획, 출연연과 대학원의 인력 감축 고려 등.
“혁신적인 연구라는 게 원래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지던 기술이라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요. 연구자마다 평가에 대한 생각도 다르거든요. 단기 성과도 중요하지만 여유 있는 호흡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한 것 같아요.” 출연연 연구원 ㄴ씨의 말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젊은 과학자 육성 예산은 증액했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면 신진 연구자 연구실 조기정착 지원, 우수 신진 연구, 한우물 파기 기초연구 등에는 32.1%억원 증액한 3232억원이 편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과학자들은 ‘몇 년만 지나면 예산 삭감 직격타를 받게 되는 건데 조삼모사 아니냐’고 비판한다. <한겨레21>과 인터뷰한 ㄷ교수도 “금액을 조금 낮추더라도 더 많은 연구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나도 신진 연구자인데, 왜 신진 연구자만 늘려야 하는지 공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정부가 저성과 연구에 대한 구조조정 의지를 표명한 것과 관련해 “주로 기술이전, 논문 발표 등 실적으로 연구 평가를 할 가능성이 큰데, 이런 실적이 없다고 저성과 연구라고 평가받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과학계 반발과 우려는 빠르게 번졌다.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는 9월1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반년간 준비한 내년 예산안이 단 2개월 만에 원점 재검토됐다. 국내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폭 삭감됐다”며 반발 성명을 발표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영국 맨체스터대학 교수는 9월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 서울 2023’ 행사 기자간담회에서 “예산 삭감이 전반적으로 한국 과학계에 타격을 줄 것 같다”고 말했고, 또 다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조지 스무트 홍콩과학기술대학 교수도 같은 자리에서 “기초과학에 투자하면 100배 넘는 이득을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천연자원이 없는 국가인데 기술에 투자하면서 경제 10위권 국가가 됐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커진 뒤 <조선일보>는 ‘정부·여당이 대폭 삭감된 R&D 예산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다시 증액하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대통령실은 9월20일 “사실과 다르다”고 다시 한번 정부 방침을 확인했다. 정부·여당에선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정도가 “기초과학기술 R&D 연구비 삭감은 문제를 더욱 증폭할 뿐, 과학기술 연구 정책 제도 개선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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