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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참사 막을 79가지 권고에 ‘셀프 면죄부’ 남발한 정부

사참위, 제2의 세월호·가습기 참사 막을 과제 79건 제시했으나
이행 보고서 입수해보니 정부는 34건에 거절·현행 유지 답변
등록 2023-10-06 22:30 수정 2023-10-07 15:12
최예용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둘째)이 2020년 11월 18일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1990년대 국내 가습기 살균제 개발 및 출시 상황과 시장형성 과정'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 및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최예용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둘째)이 2020년 11월 18일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1990년대 국내 가습기 살균제 개발 및 출시 상황과 시장형성 과정'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 및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1. (사참위 권고) 재난 피해자 인권침해 및 혐오표현 확산 방지를 위해 실태를 조사·연구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 바람.
(정부 답변) “재난 피해자 인식 조사 진행. 관련 가이드라인에 혐오 대응 내용을 포함함. 유가족과 간담회 개최.”
#2. (사참위 권고) 대통령은 민간인 불법 사찰과 진상규명 방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과하기 바람.
(정부 답변) “2017년 8월16일 대통령 사과가 이미 있었음.”

4·16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한 권고에 최근 정부가 내놓은 답변의 일부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2022년 9월 두 참사에 대한 재발 방지 과제 79건을 정부에 권고했다. 1년이 지난 2023년 9월 말, 정부가 법에 따라 그간의 이행 경과 보고서를 국회에 보고했다. <한겨레21>이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보고서를 살펴보니, 정부는 34건(44.7%)에 대해 권고 이행을 거절했거나 ‘현행 제도로 충분하다’는 취지로 답했다. 권고를 이행 중이거나 이행했다고 밝힌 나머지 45건 답변도 이미 결정된 정책을 끌어와 이행 실적으로 내세운 사례가 많았다. 이태원 참사를 비롯해 재난 때마다 반복된 피해자 지원 문제는 이번에도 형식적 답변으로 일관했다.

혐오표현 반복돼도 “매뉴얼 개정했다” 답변

가장 눈에 띄는 과제는 세월호 때 불거졌던 문제가 이태원 참사 때도 되풀이된 사례다. 정부는 이번에도 뚜렷한 대책을 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사참위는 ‘재난 피해자 혐오표현 확산을 막을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으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재난 피해자 혐오표현 인식조사 진행, 유가족 등과 간담회 개최”를 이행 실적으로 내세웠다. 의견 청취와 실태 파악에만 1년을 허비한 셈이다. 인권위는 2023년 5월 제정한 ‘재난피해자 권리보호 가이드라인’에 혐오 대응 내용을 넣었다고도 강조했으나, 해당 가이드라인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혐오표현 예방 의무를 추상적으로 담고 있을 뿐이다. 인권위는 혐오표현 대응 방안에 관한 연구용역도 따로 발주하지 않았다.

재난의 잘못을 피해자에게 돌리고 혐오하는 현상은 재난 때마다 반복된 문제다. 세월호 참사 때 극우 커뮤니티 회원들이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조롱했고, 이태원 참사 때 보수단체 회원들이 분향소 앞에 혐오표현을 담은 펼침막을 걸었다. 피해자들이 고립되고 진상규명 운동이 위축됐다. 사회의 보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이번에도 제도적 대안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참사 현장에 피해자 보호 공간과 임시영안소를 마련하는 등 피해자 지원 체계를 갖추라는 권고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규모 재난 때마다 피해자 지원이 후순위로 밀리는 문제를 바로잡자는 취지였으나, 행정안전부 재난대응총괄과는 “2021년 9월 ‘수습지원단 운영매뉴얼’에 피해자 지원 임무 등을 포함해 수립했다”며 현행 제도로도 충분하다는 취지로 답했다. 또 “정확한 정보 제공을 위해 정례 브리핑을 실시하고 전담 공무원을 1:1로 지정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매뉴얼 개정 이후인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때도 피해자 지원은 엉망이었다. 임시영안소는 새벽 3시께 마련됐고 그마저도 유가족 출입이 금지됐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유가족이 희생자를 찾아 헤매던 모습은 8년 뒤 서울 이태원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정부가 홍보한 ‘1:1 매칭 공무원’도 실제로는 유가족에게 장례비 영수증 안내만 하는 등 지극히 행정편의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단지 매뉴얼을 고치는 것만으론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행안부는 그 이유를 분석하거나 대안을 모색하지 않았다. 행안부는 ‘향후 계획’으로 “매뉴얼 추가 개정이 필요한 사항을 지속적으로 확인·점검”하겠다고 답변했다.

이 외에 ‘재난 참사 피해자 지원을 위한 별도 조직을 마련하라’는 사참위 권고에 국무조정실 재난안전관리과는 “재난안전법에 근거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설치해 지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행법에 따라 ‘하던 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중대본이 현장 수습·지휘에 바빠 피해자 지원을 업무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태원 참사 때도 참사 발생 4시간이 지난 새벽 2시30분께 중대본이 차려진데다 현장 수습 위주로 지시를 내리기 바빴다. 유가족들은 최소한의 희생자 정보도 안내받지 못해 동사무소와 병원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국군기무사령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재판 결과가 나온 2022년 10월25일, 4·16연대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연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국군기무사령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재판 결과가 나온 2022년 10월25일, 4·16연대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연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불법사찰 구제’ 권고하자 “소송하면 된다”

사참위와 정부의 입장 차는 과거의 잘못을 역사로 남기는 문제에서도 도드라졌다. ‘공무원 교육과정에 세월호 특조위 방해 사건을 포함하라’고 사참위가 권고하자, 인사혁신처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교육하겠다”고 답변했다. 앞서 2017년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이 특조위 종료 시점을 임의로 당겨 잡고 특조위 대응 문건을 내부적으로 작성하는 등 진상 조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한 사실이 자체 감사로 드러난 바 있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오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사참위가 권고했지만, 정부는 추상적 문구로 갈음하길 택했다.

사참위는 ‘세월호 불법사찰 피해자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필요한 절차를 마련하라’는 권고도 했다. 피해자가 국가의 가해를 입증하고 구제받으려면 각종 증빙 자료가 필요하니, 국가가 과거의 가해를 반성한다면 이제라도 선제적으로 자료를 제공하란 취지다. 이에 대해 국가정보원 등은 “각종 소송·정보공개 청구 등을 통한 구제 절차가 이미 마련돼 있다”고 답변했다. 지금은 피해를 본 당사자가 직접 증거 목록을 찾아 일일이 정보공개 청구하고 소송해야 증빙자료를 모을 수 있는데, 현행대로 두겠다고 답한 것이다.

사참위가 반성을 권했으나 정부는 면죄부로 답했다. 과거 불거진 민간인 사찰 의혹 등에 대해 국정원은 “사참위가 관련 조사를 했으나 수사의뢰 등 추가 조치 없이 종결했다”며 추가 조사나 조직 차원의 입장을 낼 필요성이 없다고 답했다. 앞서 사참위는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이 세월호 유족 관련 동향보고서 40여 건을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호영 전 사참위 보좌관은 “불법 사찰이 확인됐으나 국정원 자료가 이름, 장소 등 구체적 정보를 지운 채 제공돼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체 조사를 실시하고 추가 진실을 밝히라고 권고한 건데 국정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답변했다”고 비판했다.

구성원의 범죄가 확인된 기관도 유사한 태도를 취했다. “(직원들의) 업무방해 정황을 확인해 수사의뢰 조치했다”(해양수산부·국방부)거나 “정보경찰의 불법사찰을 확인했으나 증빙이 될 만한 보고서가 없다”(경찰청)며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불법사찰을 한 직원이 여럿이라면 상부의 지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직 차원의 원인을 찾고 재발방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으나, 국가기관은 특수단 수사만을 도덕 기준으로 삼았다.

가습기살균제 희생자 추모? “국가 책임 아냐”

국가기관의 책임 회피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추모 책임을 국가가 맡으라’는 권고에 환경부는 “피해자 단체가 추모사업 관련(해) 지원·신청시 (정부가) 비용 일부 지원 가능”이라고 답변했다. 정부가 희생자 추모를 직접 맡는 대신 지금처럼 재정 지원자로 남겠단 취지다.

환경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가 추모의 주체로 나서는 경우는 국가유공자 또는 국가의 책임이 있는 희생자를 대상으로 하는 추모사업.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경우는 현 체제와 같이 피해자단체 중심으로 추모사업이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 사참위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원인 중 하나가 30년에 걸친 국가의 부실한 안전관리 체계라고 봤지만, 환경부는 참사 희생자들이 ‘국가의 책임이 있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사참위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여부를 판단하는 ‘신속 심사’의 대상을 늘리라고도 권고했다. 가습기살균제로 피해를 입었더라도 모두가 제때 피해자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간질성 폐질환과 천식, 폐렴만 신속 심사를 받을 수 있다. 이 외의 질환은 모두 개별 심사를 받아야 한다. 6만7천 명에 이르는 잠재적 피해자 중 실제 피해자로 인정된 인원이 5천여 명에 그치는 이유다. 2023년 9월, 폐암과 가습기살균제 피해의 연관성이 연구로 입증돼 폐암 사망자가 뒤늦게 피해자로 인정됐지만 환경부는 개별 심사를 고집하고 있다. 환경부는 사참위 권고에도 “개별 심사에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 운영 중”이라고 답했다.

최성미 전 사참위 가습기살균제사건 지원팀장은 “현재 신속 심사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최근 인정된 폐암을 포함해 심사 대상을 확대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개별 심사 판정 기간도 단축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참위 권고가 ‘백지수표’가 된 배경엔 국회도 있다. 권고를 담은 법안 대부분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공무원의 불법명령 거부권을 규정한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이나 세월호 생존자 의료비 지급 기간 확대를 담은 세월호피해지원법 개정안, 선사의 안전관리 의무를 강화하도록 한 유선 및 도선사업법 개정안 등은 소위원회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정부가 이행을 완료했거나 이행 중이라고 밝힌 나머지 답변도 논쟁거리를 안고 있다. 여객선 안전공영제 등 관계 부처가 논의하는 안건도 있었지만, 기존에 추진하던 정책을 권고 이행 실적으로 둔갑시킨 사례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부가 ‘국가 중독 센터’를 설립하란 권고에 2016년부터 운영 중인 ‘중독분석실’을 이행 현황으로 제시하거나, 국무조정실이 ‘세월호 참사 피해자 장기지원계획 수립’ 권고에 2015년 4월 수립한 ‘분야별 피해지원 세부 추진계획’을 이행 실적으로 드는 식이다. 국방부 역시 세월호 유가족 불법사찰 방지 권고에 “2018년 9월 기무사 정보실 해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령에 ‘3불 조항’(정치개입·민간사찰·특권의식) 신설 후 유지”로 답변했다.

2022년 8월3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가습기살균제 희생자 가족들이 고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22년 8월3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가습기살균제 희생자 가족들이 고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15년 자료 들고 와 “이행 완료”

정부와 사참위가 보여 준 입장 차의 기저에는 결국 참사 피해 책임에 관한 근본적 시각 차가 깔려 있다. ‘대통령 사과’는 그 대표적 장면이다. 사참위는 두 참사와 관련해 민간인 불법사찰과 안전관리 부실의 국가 책임을 물어 대통령 사과를 요구했으나, 대통령실은 2017년 8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미 사과했다며 이행을 거절했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의 사과는 희생자 애도와 국민 생명 안전을 못 지킨 데 대한 사과였다. 반면 사참위가 요구하는 사과는 참사 이후 국가가 공권력을 남용해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은폐한 데 대해 명확히 국가 책임을 인정하라는 취지다.” 김선우 4·16연대 사무처장의 말이다. 이에 대한 대통령실의 답변은 “향후 계획: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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