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 휴가철을 맞아 각 출판사에서 상반기 기대작을 다수 선보였다. 대작 가운데서는 역사서가 다수 눈에 띄는데, 기원전 흉노 유목제국사부터 1990년대 지성사까지 다채로운 내용들로 기대감을 높인다. 전작에서 커다란 학술적 성과를 나타냈던 국내 사회학자, 역사학자 들의 국내서와 와다 하루키, 카렌 암스트롱 등 국내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저자의 재출간 번역서를 따로 묶어 보았다.
그 옛날 민중가요에서, 각종 단체와 행사 출범 선언문에서 끝도 없이 뜨겁게 ‘민중’을 부르짖던 저항 담론은 어디에 있을까? ‘그 민중’은 누구를 지칭하며 어떤 특징을 가리키는 것일까?
2019년 <전쟁과 희생>(역사비평사 펴냄)으로 한국의 전사자 숭배 문화 현상을 분석하고 2020년 <5·18 광주 커뮤니타스>(사람의무늬 펴냄)를 출간하며 공동체 연대와 헌신의 드라마를 풀어낸 사회학자 강인철이 ‘민중’ 개념을 설명하는 2부작을 내놓았다. 첫 번째 책에 해당하는 <민중, 저항하는 주체>는 정치 주체성과 저항성을 중심으로 한 ‘민중론자’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두 번째 책인 <민중, 시대와 역사 속에서>는 민중의 개념사를 통사로 엮었다. 두 권 각각 600쪽이 넘는 분량으로 성균관대 출판부가 펴냈다.
저자는 ‘민중’이 동아시아사에서 2천년 넘는 역사를 지닌 어휘로써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 온 것이라고 추정한다. 1919년 3·1운동은 민중의 개념사에서 결정적 사건이었다. 사용 빈도가 급증하고 이 개념에 역사적 주체라는 의미가 추가되었으며 저항성과 변혁이라는 뜻까지 덧붙었기 때문이다. 이후 1930년대 나라 안팎의 조선인 좌파들이 민중 대신 ‘인민’이란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민중은 탈정치화되었고 이 현상이 1960년대 초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저항적 민중 개념이 재등장한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정치·사회운동·문화·교육 그리고 의학·체육·과학기술 영역까지 폭넓게 쓰이면서 민중 개념의 전성기를 맞는다. 1990년대 이후 변혁적 민중 개념의 사용 빈도는 감소했고 민중 개념과 이론은 급속히 쇠퇴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민중의 외연은 조정환이 2000년대 새롭게 제안한 ‘다중’ 개념과 비슷하다고도 분석한다. 최장집이 쓴 <민중에서 시민으로>(2009, 돌베개 펴냄), 이남희가 쓴 <민중 만들기>(2015, 후마니타스 펴냄) 등과 함께 읽으면 더욱 깊은 독서가 되겠다. 각 권 3만7천원.
쑨거, 다케우치 요시미 등 동아시아 사상가들의 저서를 국내 소개하는 데 앞장서 온 사회학자 윤여일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는 2008년 일본 전후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한국의 동시대 사상계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90~2000년대 주요 계간지를 검토하며 한국사상계가 내놓은 ‘동아시아 담론’의 실체를 탐구하기에 이른다. 2016년 윤여일의 <동아시아 담론>(돌베개 펴냄)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저자가 지식사회학적 담론 분석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윤여일의 신간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돌베개 펴냄)는 한발 더 나아간다. ‘문화의 시대’라고 일컬어 온 1990년대 한국 사회를 문예지·학술지·계간지·대중문화지 등 잡지 형태 문헌을 검토하며 새롭게 직조했다. 저자는 1990년대 잡지들이 펼쳤던 논제들을 포착해 당시 사상계 담론 지형의 조감도를 제공하고 1990년대를 형상화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지금 시대로 이어지는 지식사의 의미를 짚어보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방황’하는 90년대는 80년대에 견줘보면 크고 작은 이론들이 쟁명했다. 그 자체로 80년대의 “반동”이고 “부수현상”이었다는 평가는 한 가지의 해석이다. 문학과 사상, 세대, 국가, 여/성, 생태, 노동 유연화, 월드컵과 ‘대중’ 등을 나눠 살핀다. 오늘날 한국 사회와 문화를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사유의 길잡이로서 유용한 1990년대 지성사. 1만9천원.
1999년 창비에서 펴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한국전쟁>(서동만 옮김) 개정판이 올해 정전 70년을 맞아 25년 만에 출간되었다.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남상구·조윤수 옮김, 청아출판사 펴냄)는 남북한, 중국, 소련, 미국, 일본 자료들을 직접 읽고 해독할 수 있는 연구자로서 저자의 가치가 빛나는 책이다. 역사적 사료를 상호 교차 분석해 사실을 확인, 발굴하여 전쟁에 관한 전모를 밝혔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전쟁을 동북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동북아시아 전쟁’으로 규정한다. 중국 혁명과 이 전쟁으로 남북한, 미국, 중국, 소련의 관계, 일본과 타이완의 관계가 확정되어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확립했다.
1999년 창비판은 진보 성향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였던 서동만 상지대 교수가 옮겼다. 와다 교수의 제자인 서 교수는 2009년 폐암 투병 끝에 5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번 책은 2002년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개정판 이후 공개된 새로운 자료를 보강해 펴낸 개정증보판을 남상구·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우리말로 옮겼다. 두 사람 각각 일본현대사와 한일관계를 전공한 학자로서 신뢰감을 더한다. 3만8천원.
서방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스파이로 보고, 러시아인들은 야비한 반역자로 본다. 냉전 시대 소련 첩보기관 케이지비(KGB, 국가보안위원회)와 영국 비밀정보부 엠아이6(MI6)에서 이중 첩자로 활동한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일대기. 냉전 시대 스파이물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영국 언론인 겸 작가 벤 매킨타이어가 쓴 <스파이와 배신자>(김승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는 소설만큼 흥미진진한 실화 스파이물이다.
고르디옙스키는 아버지와 형 모두 케이지비 요원인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우수 요원으로 성장한다. 1966년 덴마크에서 서방 문화의 풍요로움을 만나고 프라하의 봄 등 역사적 사건들을 지켜보며 마음의 갈등을 겪던 그는 1974년부터 케이지비의 핵심 정보를 엠아이6로 빼돌렸고 영국 최고 스파이라는 인정을 얻는다. 2007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생일 행사에서 고르디옙스키는 영국 안보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2018년 출간된 이 책을 읽은 뒤 고르디옙스키는 짧고 흔들리는 글씨로 딱 한 줄짜리 평가를 매킨타이어에게 보냈다.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자기 모습이 영웅적으로 그려져 만족한다는 말인지, 사실에 입각한 냉전 시대 역사서로 인정할 만하다는 말인지는 모호하다. 3만2천원.
‘중앙아시아사 덕후’들은 주목하라. 한국의 대표적 중앙아시아사 연구자인 정재훈 경상국립대 교수가 쓴 흉노사로서, 국내 연구자가 쓴 첫번째 흉노 유목제국 통사가 나왔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 중반 몽골 초원을 무대로 등장한 첫 유목제국이었다. <흉노 유목제국사>(사계절 펴냄)는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2005, 문학과지성사 펴냄)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2016, 사계절 펴냄)에 이은 ‘고대유목제국사 3부작’을 완성한 책이다. 저자는 이 3부작으로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북아시아사를 복원하고 유목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환기해 동아시아사를 공존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초석을 놓았다. 내년엔 위구르사 부분을 정리해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가치는 400년 넘게 지속된 흉노사 전반을 발굴 자료가 아닌 문헌 연구로 새롭게 쓴 점이다. 기존 발굴 위주의 연구가 정치적 실체로서 흉노와 유목민의 특정 문화를 연결하려는 입장이 강했다면, 이 책은 고고학 발굴 자료와 문헌 기록의 불일치를 극복하면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정주하는 농경 문화와 떠도는 유목 문화를 나누어 농경 문화가 더 문명적이라는 이분법적 편견을 뛰어넘어 이 책은 흉노 문화의 다원성과 복합성을 드러낸다. 흉노가 유목 세력만의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을 포함한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다양성에 부응하려고 흉노가 한과 맺었던 관계와 노력을 설명하려고 했다. 흉노의 세계사적 위치를 재구성하는 북아시아사 연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만하다. 3만원.
종교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의 역사>(배국원·유지황 옮김, 교양인 펴냄)를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을 두루 섭렵하고 책을 출간해 온 영국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비교종교학 연구가 집대성된 책이다. 1944년 잉글랜드 우스터셔에서 태어난 암스트롱은 17살 때 스스로 수녀원에 들어가 변증학, 성서, 신학, 교회사와 수도원 생활의 역사 연구에 몰두했지만 7년 후 수녀원을 떠나야만 했다. 성인들이 신을 만났을 때의 황홀경은 읽을수록 좌절감을 주었고, 종교인으로서 헌신의 감각을 느낀 것도 장엄한 그레고리오 성가와 아름다운 예배 의식을 접하면 느낀 심미적 반응일 것이라고 그는 ‘이성적으로’ 추론한다. 예언자, 신비주의자 들이 묘사한 ‘그 신’을 끝내 만나지 못한 암스트롱은 환속 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종교학자가 되었다.
이 책은 ‘인간은 왜 신을 찾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고대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부터 유일신의 탄생,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 철학자의 신, 신비주의자의 신, 종교개혁가의 신, 19세기 ‘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절대신 숭배 사상 안팎을 종합했다. 1993년 영어판 초판 출간 뒤 1999년 우리말로 처음 번역돼 나온 것을 25년 만에 전면개역판으로 다시 출간했다. 기존 번역본에서 누락된 내용을 빠짐없이 되살리고 원문의 유려한 글맛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3만6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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