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에 따른 돌봄 수요 급증에 대응해 지역사회에서 간호사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간호법 제정안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 가능성이 커졌다. 더불어민주당이 2023년 5월30일 재의결을 추진하지만 국민의힘이 반대해 재의결 요건인 ‘과반 출석, 출석 3분의 2 찬성’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간호법은 의사 업무를 떠안은 간호사의 살인적인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환자가 병원 밖에서 존엄한 노후를 보내도록 간호 서비스를 강화하는 미래지향적 취지를 담았다. 하지만 간호조무사를 비롯해 응급구조사·방사선사 등 의료계 다수 직역이 반대하면서 추진력을 잃었다.
간호법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지역사회’ 단어가 들어간 조항이다. 간호법의 목적을 설명한 제1조는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높은 수준의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간호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현재 간호사는 다양한 법률에 근거해 어린이집, 장기요양시설, 장애인복지시설 등에서 일한다. 하지만 현행 의료법 체계에서 의사의 지도 없이 혈압·혈당 체크를 하는 건 불법 의료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병원 밖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환자에게 적절한 간호를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간호사가 병원 밖에서도 충분한 간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바로 ‘지역사회’ 문구다.
의사들은 간호사들이 의사의 지도·감독을 벗어나 독자적인 의료행위를 하는 것에 반발한다. 환자의 안전이 걱정된다는 점을 내세운다. 간호조무사도 간호사의 업무 확대가 간호조무사의 입지를 좁힐 것이라 우려한다. 현재 돌봄기관에서는 비용 문제 등으로 간호사 대신 간호조무사를 채용하는 사례가 많다. 간호조무사는 간호법 제정 이후 간호사가 기관에 의무 배치될 가능성이 있고 간호조무사가 간호사의 지도를 받고 일하거나 아예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대한간호협회는 “의료법에서 규정한 간호사의 업무 조항을 간호법에 그대로 가져왔다. 간호법은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해 법이 규정한 간호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타 직역의 업무를 침탈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간호법 자체는 간호사의 업무 확대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간호조무사는 ‘지역사회’ 문구를 근거로 추후 시행령 등을 통해 간호사가 영역을 넓힐 것이라 의심한다. 다른 직역도 대체로 비슷한 이유로 간호법을 반대한다.
간호법이 직역 간 영역 다툼으로 번진 핵심 이유는 의료인의 업무 범위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료법에서 간호사의 업무는 △환자의 간호 요구에 대한 관찰, 자료 수집, 간호 판단 및 요양을 위한 간호 △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 등 네 가지로 열거했을 뿐 의료현장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상황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김윤 서울대 교수(의료관리학)는 “의료계 각 직역의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동시에 폭넓게 업무의 중복을 허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간호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보건인력지원법을 고쳐 각 직역의 업무 범위를 정하는 독립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는 <한겨레21>과 서면 인터뷰에서 “방문간호를 받는 환자 집에서 환자의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응급상황에서 간호사가 산소발생기로 산소를 투여한 경우 사전 의사 지시가 없다면 불법이다. 지속적인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 집에서 기본적인 활력징후 측정과 당검사도 방문간호지시서에 의사의 지시가 없다면 불법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간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119를 불러 의료기관 이송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아무 조처도 하지 않은 지역사회 간호사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직역도 비슷한 상황이다. 현재 응급구조사는 병원 밖에서 주사를 놓고 심폐소생술도 하지만 병원 안에서는 못한다. 간호사가 병원 밖에서 혈당 체크를 못하는 게 불합리한 것과 같으므로 직역 간 업무 중복을 허용해 응급구조·임상병리·방사선사 등 각 분야에서 실력을 쌓은 의료인력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윤 교수는 “임상병리사는 감염 관리, 방사선사는 초음파 검사에서 전문성이 있지만 의사가 의료인력에 광범위한 업무 독점권을 행사해 다른 인력이 자기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사가 가진 독점권을 완화하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주열 남서울대 교수(보건행정학)는 “의사가 가진 직무 가운데 간호사에게 넘겨줘야 할 일이 많은데 의사들이 반대해왔다”면서도 “보건의료체계는 20개 직종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한 직종의) 파이를 키우려면 (다른 직종과) 똑같이 키워야 하지만 간호사만 먼저 확대하니 다른 직역들이 반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간호법이 다루는 또 다른 문제는 간호사의 노동환경 개선이다. 간호사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대리 수술, 수술 부위 봉합, 수술 보조, 기관 삽관, 대리 처방 등을 하는데 현행 의료법상 불법이지만 의사 부족을 이유로 관행적으로 해왔다. 간호법으로 간호사 업무를 명확히 규정해 이 문제도 해결하자는 게 간호사의 입장이다.
대한간호협회가 전국 간호사에게 불법진료 신고(2023년 5월18~23일)를 받은 결과 닷새 만에 1만2189건이 접수됐다. 병원 유형별로는 종합병원(41.4%)과 상급종합병원(35.7%)에서 불법진료가 많았다. 불법 의료행위를 지시한 사람은 교수(44.2%)가 가장 많았고 전공의(레지던트) 24.5%, 전임의 11.8% 순이었다. 최훈화 대한간호사협회 정책전문위원은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려면 가장 먼저 의사가 많이 공급돼야 한다. 업무를 나누더라도 의사가 부족하면 현장은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전공의도 해결을 촉구한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5월18일 간호사들의 준법투쟁(의사의 불법 지시 거부)을 지지하는 입장문을 내어 “정부가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 80시간 이하로 제한한 이후 충분하게 대체 의사 인력을 채용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가 현재 만연한 대리 수술과 대리 처방의 근본 원인이다. 늘어나는 의료 이용에 비해 병원에 의사와 간호사가 충분히 채용되지 않는다. 병상당 인력 기준을 만들어 의사와 간호사를 추가 채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들이 돈이 되는 분야로 쏠려서 필수의료 분야에 발생한 공백을 해결하는 문제와도 엮여 있다.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협업해야 할 양 직역이 극단적으로 싸울 일은 아닌데 정치권과 맞물리면서 이런 결과에 이르렀다”며 “시급한 건 간호사의 근무환경 개선이고 일선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내용이다. 보수 인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줄이고 3교대 체제 등 근무여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동하는 간호사회는 “간호사가 의사·간호조무사·응급구조사 등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며 간호법에 반대하는 건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직역 갈등을 조장하는 일부 집단의 억지주장 때문에 생긴 문제”라며 “핵심은 간호사의 노동강도다. 간호사 1인당 환자수 법제화로 병원 밖으로 떠나는 간호사를 붙잡고 지역간호에서 당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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