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에 1분 1초 다르듯 날마다 넌 새로워져~.” 샤이니의 노래 <원오브원>에 맞춰 신랑 안태훈(25)씨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턱시도를 입은 그는 이쪽저쪽 하객을 보며 사진 찍을 시간을 줬다. 신랑 입장곡은 신부가 골랐다.
“네가 머문 이 세상이 더 아름다운 건, 겁 없이 외치던 말, 사랑해 너를” 소녀시대의 <포에버원>이 흐르자 신부 공선진(28)씨가 입장했다. 전동휠체어에 웨딩드레스가 밟히지 않도록 활동지원사가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소녀시대 골수팬 태훈씨가 선택한 곡이다.
2023년 2월18일 서울 영등포구 공공운수노조 누리홀에서 열린 중증 뇌병변장애인인 선진씨와 태훈씨의 결혼식이다.
“내 이름은 공선진. 보고 싶은 사람들 모두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 내가 바라는 거 오직 그뿐입니다. 지금은 완전 독립, 기분이 좋아.” 스크린에 선진씨가 쓴 노랫말에 가수 몬구가 곡을 붙이고 고재필 미디어필링 대표가 촬영한 유튜브 영상이 떴다. 선진씨는 부모님이 이혼한 뒤 4살부터 23살까지 시설에서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립 생각을 했어요. 성인시설엔 가기 싫었거든요. 거기 가면 막내가 될 텐데 언니들이 구박하면 끝도 없어요. 나와서 살고 싶었어요.” 2018년 시설을 나온 그는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한 달에 491시간 받으며 서대문장애인지원주택에 산다.
태훈씨는 2살 때 시설에 들어왔다. 부모님을 본 적이 없다. 뇌병변장애로 말할 수 없는 그는 문자로 “버렸다”라고 썼다. 그가 고등학생 때 시설 친구 두 명이 병으로 숨졌다. “우울증이 왔고 저도 죽고 싶었어요.” 선진씨에 이어 2022년 3월 시설에서 나온 그는 한 달에 360시간 활동지원을 받으며 장애인자립생활주택에 산다. 한울림장애인자립센터에서 선진씨와 함께 일한다. “시설에서 나와 힘든 점도 많아요. 그런데 저녁밥을 꼭 오후 5시30분 정해진 시간에 먹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아요.”(안태훈)
태훈씨는 12살 때부터 선진씨를 좋아했다. 여러 번 차였다. 고백 스무 번 만에 커플이 됐다. 태훈씨가 기념일을 알려주는 앱을 보여준다. 2023년 3월10일이면 사귄 지 1천 일이다. “저는 샤이니 팬이고 태훈이는 소녀시대 팬인데 소속사가 같아서 싸울 일이 별로 없어요. 또 태훈이는 거짓말을 안 해요. 저한테만큼은 솔직해요.”(공선진) 2017년 샤이니 종현이 숨진 뒤 선진씨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누구보다 태훈씨가 그 마음을 이해했다. 태훈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에스지(SG)워너비 채동하의 팬이다.
태훈씨에게 왜 그렇게 선진씨가 좋았냐고 묻자 그가 휴대전화 자판을 누른다. 시간이 걸린다. “천천히 해.” 선진씨는 기다린다. 태훈씨가 완성한 문장은 이렇다. “연상이고 예뻐서.” 둘은 퇴근하면 같이 유튜브를 본다. 선진씨는 노래를 부르고 태훈씨는 춤춘다. 태훈씨가 “잘 춘다”고 쓰니 선진씨가 “본인으로선 최선을 다한다”며 웃었다.
선진씨와 태훈씨 모두 야구를 좋아하지만 응원하는 팀은 다르다. 선진씨는 기아 타이거즈, 태훈씨는 삼성 라이온즈 팬이다. 태훈씨는 연극을 좋아하지만 선진씨는 아니다. 데이트 비용은 반씩 나눈다. 태훈씨가 카톡을 씹으면 둘은 싸운다. 사과는 에스엔에스(SNS)에 올린다.
2022년 크리스마스에 태훈씨가 청혼했다. 선진씨는 잠시 망설이다 동의했다.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아버지에게 선진씨가 결혼 소식을 알리니 아버지는 “욕을 찰지게” 했다. “어떻게 살려고 하냐”라는 사람도 많았다. 둘은 직장 근처로 집을 보러 다녔다. 서재덕 지원주택 주거지원 담당자 안내로 공공임대를 신청해 당첨됐다. 보증금 1천만원은 반반 냈다. 결혼식장도 문제였다. “너무 비싼데다 돈이 있어도 거기선 결혼식을 할 수 없었어요. 다 (휠체어로 지나가기 어려운) 턱이 있어서요.”(공선진) 스몰웨딩을 하려고 카페도 여럿 둘러봤지만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만한 화장실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턱이 없고 장애인화장실이 한 층에 두 개 갖춰진 공공운수노조로 식장을 잡았다.
선진씨는 어깨가 살짝 드러난 담백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골랐다. “반짝이가 붙은 게 사진은 잘 나온다고 했는데 저는 싫었어요.”(공선진) 이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까지 선진씨가 사는 장애인지원주택 담당 김치환 사회복지사와 강자영 사회복지사는 선진씨를 업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두 사회복지사는 지원주택에 사는 장애인의 자립을 돕고 지역사회와 연결한다. 결혼식장에 레드카펫 대신 놓을 작은 화분들, 하객들이 먹을 핑거푸드, 청첩장, 결혼식 순서까지 신랑 신부와 두 사회복지사가 함께 준비했다. 그 행사장에서 사회자로 선 김치환 사회복지사는 태훈씨보다 더 떨었다.
“내 인생의 동반자이자 또 다른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주례 대신 신랑 신부는 서로에게 말하며 10가지 약속을 하객에게 공개했다. “관리비·생활비는 반반, 일주일에 한 번 취미생활 함께 하기, 활동지원사가 퇴근하면 서로 목욕 도와주기, 싸우지 않고 싸우더라도 내가 먼저 사과하기, 각자 스케줄 되도록 미리 알려주기, 섹스는 합의해서 하기, 자녀는 3명까지 낳기, 10년 안에 더 넓고 안락한 집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렬히 사랑한다.”
이날 두 사람의 부모 대신 타임뱅크코리아의 손서락, 양혜란 대표가 초를 붙였다. 선진씨가 사는 장애인지원주택 이웃들이 춤을 췄다. 후원자, 지역사회, 직장동료 등 하객 40여 명이 탁자를 뒤로 밀고 앞으로 나와 손뼉 쳤다. 한바탕 춤춘 강자영 사회복지사가 축사했다. “일하고 배우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생각하는 거, 평범한 선택들인데 장애인은 ‘너는 안 된다’ ‘포기해라’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들어요. 두 사람이 직접 집, 결혼식장을 찾아다니는 걸 보며 저도 많이 배웠어요. 오늘 이 두 사람이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어요.”
기념 촬영을 마친 선진씨에게 기분이 어떠냐 물었다. “싱숭생숭해요. 마냥 재밌진 않아요. 잘 살 수 있을까 걱정도 돼요.” 곁의 태훈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천천히 썼다. “너무 좋아요.”
결혼식을 마친 두 사람은 강원도 강릉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두 사회복지사가 동행했다. 선진씨와 태훈씨는 샤이니와 소녀시대의 소속사인 에스엠(SM) 콘서트에 가고 싶다. “야광봉도 두 개 사놨어요.”(공선진) 방송에서 소개한 맛집이 진짜 맛있는지 탐방도 하고 싶다. 두 사람은 함께 퇴근한 밤에 노래를 들으며 춤추고, 서로 다른 야구팀을 응원하며 싸우고, 화해할 것이다. 어떤 날은 울기도 하겠지만, 선진씨는 태훈씨가 휴대전화로 문장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둘의 결혼식에 모인 친구들이 그들 곁에 있을 것이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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