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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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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고독하게 혼자 감당치 않도록

별나고 소박했던 초록나무, 임보라 목사를 기억하며…
아프고 슬픈 이들에게 밥을 먹이던 목사, 그 덕에 우리는 한 뼘 더 나아진 삶을 살았네
등록 2023-02-10 20:53 수정 2023-02-13 09:50
2015년 임보라 목사가 무지개색 띠를 목에 두른 채 목회를 진행하고 있다. 박김형준 작가 제공

2015년 임보라 목사가 무지개색 띠를 목에 두른 채 목회를 진행하고 있다. 박김형준 작가 제공

“그대는 임보라의 고독을 이미 보았겠지?” 임보라 목사의 장례식장에서 섬돌향린교회를 통해 알고 지낸 분이 내게 물었다. ‘고독’이란 단어는 임보라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임보라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댈 어깨를 빌려주던 이, 비빌 언덕이 되던 이, 강직하면서도 부드럽던 이, 함께 울고 웃고 또 화내주던 이, 단단한 나무 같은 목사 임보라. 그런 그의 고독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그의 빛나는 수식어에 흠이 될까 조금은 주저하게 된다. 그럼에도 든든한 기둥이던 ‘임보라 목사’보다, 소박하고 별난 ‘초록나무 임보라’를 더 기억하고 싶어진다.

하루를 1년같이 살던, 홍길동

나보다 임보라 목사를 더 잘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럼에도 서로 기억하는 ‘자기만의 임보라'가 있듯, 내게도 나와 임보라만이 공유하는 특별한 추억이 있다.

2014년 여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숨통을 틔울 만한 안전한 공간이 절실하던 때, 무엇이라도 함께하겠다는 결심으로 내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섬돌향린교회가 향린교회에서 분가한 지 1년 조금 넘을 때였다. 대학 시절 은사님이 섬돌향린교회에서 청소년부와 어린이부를 함께 만들어갈 전도사를 찾는다며, 임보라 목사 곁에서 배우면 좋겠다고 찾아가보라고 했다. 임 목사가 누군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유명한 사람이었다.

면접을 보러 간 당시 서울 마포의 작은 교회, 십자가도 없는 건물에서 목사가 아닌 교인 세 명이 맞아줬다. 심지어 목사라고 소개한 그는 면접 자리에서 인사만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 목사님은 바쁜가?'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섬돌에서의 첫 예배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됐다. 꾸미지 않고 소박했으나, 별스럽고 정겨웠으며 눈물이 나오는 곳이었다.

예배 뒤 임 목사와 제대로 인사하기도 전에, 교인들과 먼저 인사를 나누고 환대받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목사가 아닌 교회에서 장을 맡은 교인들과 나누라고 했다. 결정할 사항이 있으면 목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함께 논의했다. 처음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목사님이 힘이 없나'라는 생각도 했다. 예배 뒤 교회 회의를 제외하고는 서로 교인들과 이야기하느라 예배 준비하느라, 그와 대화할 기회가 적었다. ‘도대체 언제 남의 목사님이 아닌, 우리 목사님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 목사는 늘 바빴다. 제주 강정에 있다가, 현장 기도회에 갔다가, 시위하러 갔다. 설교는 교회에서도 하고 현장에서도 했다. 집에 가서도 두 딸과 아버지, 고양이 다섯 마리와 개 한 마리를 돌본다고 했다. 일주일 중 거의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어 산다고 했다. 일정 사이마다 틈내어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들어주고 밥을 사줬다. 바쁜 와중에도 교인들에게 밥을 지어 나누는 일을 자주 했다. 밥을 나누는 일이 중요함을 그를 통해 알았다. 품이 넓은 만큼 손은 또 어찌나 큰지, 한번은 청년부를 초대한다고 해서 집에 10명이 함께 갔는데 임 목사는 30인분의 밥을 해놓았다. 아, 물론 후식은 따로.

2014년 레인보우액션에 참여한 임보라 목사가 즐겁게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김형준 작가 제공

2014년 레인보우액션에 참여한 임보라 목사가 즐겁게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김형준 작가 제공

안 보이면 텃밭을 가꾸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그래도 바쁜 와중에 틈틈이 책을 놓지 않았고, 짬이 생기면 눈 감고 모자란 잠을 겨우 채우는 듯했다. 갑자기 그가 사라져 찾으면 옥상 텃밭에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지도 않은 채 물을 주고 흙을 고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내가 한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몸을 써야 개운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고 했다. 켜켜이 쌓인 고충과 응어리를 해소하는 그만의 방법이었으리라.

시간이 지나 느꼈지만, 임 목사는 교회 밖에선 유명인이었지만 안에서는 되레 교인 속에 녹아들어 다르지 않은 위치에 있으려 했다. 섬돌향린교회의 ‘섬돌'은 이웃이 나를 딛고 오르내리도록 몸을 내주는 디딤돌이다. 그는 권위는커녕 그저 소박하게 한 명의 섬돌로 있고자 했다.

임 목사에게는 또 다른 면모도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가 대학 때부터 ‘힐 신고 데모’하러 다녀서 유명하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섬돌향린교회 청년들과 함께 드래그파티를 연 2015년, 빨간 드레스에 그 ‘힐’을 신고 보라색 가발을 늘어뜨리고는 자유롭게 춤추던 그였다. 누구는 목사 같지 않은 목사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나 또한 전도사 같지 않은 전도사로서 그는 내게 가장 목사다운 목사였고 선한 목자의 길을 보여준 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019년 나는 전도사에서 일반 교인으로 전향했고 임 목사는 내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그는 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라는 말로 공감했고 관용을 베풀었지만, 결정적일 때는 가장 날카롭게 경계에 서 있었으며, 일할 때는 완벽주의에 결단력 있게 이끌었다. 나는 그런 그의 여러 됨됨이를 존경했다.

함께 목회 활동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임 목사를 찾았고, 그를 통해 절망과 무기력 속에서 희망과 사랑을 입었다.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한 사람이라도 세심하게 돌보고 살펴야 함을 배웠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기보다 때로는 가만히 곁에 머무름으로써 힘과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일희일비해 쉬이 흔들릴 때마다 그를 보며 느긋하게 대처하는 법도 알았다. 때로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함도 말이다.

임 목사는 내가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여러 자리를 통해 기회를 열어줬다. 그러면서 본인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고민을 거듭했고, 더 많은 이의 편이 돼주거나 더 나누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이웃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여겼고 아픔을 보듬어 연대의 힘으로 잇고자 희망을 질기게 말해오던 이였다.

“괜찮아요”에서 “괜찮아지겠지요”로 바뀌던 말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혼자 오롯이 단단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임 목사가 그저 대단해 보였으나 어떨 때는 안쓰럽고 걱정됐다. 옆에서 본 그는 늘 어깨가 무거웠고, 오랫동안 고단해 보였다. 그는 쉬이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감당해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때때로 물었다. “목사님 괜찮으세요?” 그럼 그는 늘 “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는 “괜찮아지겠지요. 쉽지 않지요”라는 말도 들으면서, 나마저 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함께 일구는 목회 활동에서 각자 버티느라 쓸쓸하기도 했으나, 그의 단단한 등을 보고 의지하며 나아갔다. 나뿐만 아니라 정말 모두가 그랬다.

어느 곳에서 임보라는 예수 같은 이였고 롤모델이며 만나고 싶은 이였다. 하나 동시에 어디에서는 모욕받고 배척당하고 화살을 받는 이였다. 어느 곳에서 임보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앞장서는 이였으나, 또 어디에서는 온전히 혼자 감당하고 마지막까지 남겨지는 이였고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 혼자 책임져야 할 때가 많았으리라. 그 양극단의 상황에서 무수한 경계를 넘기며 혼자 괴로움을 삭였으리라 생각하니, 미안함과 괴로움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나는 임보라에게 불리던 것들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부담과 책임을 얹었을지, 결코 해방되지 않을 결박 같은 것은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고 어렵다. 그에게 따라붙은 수식어들이 결국은 그가 ‘목사'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으니까.

그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한 발자국 더 진보했고 그 덕에 우리는 한 뼘 더 나아진 삶을 살게 됐다. 그 과정에서 그의 하느님과 매번 씨름하며 넘어가는 모습을 봤고, 또 고비마다 섬돌향린교회 교인들을 신뢰하고 함께 건너왔다고 생각한다.

남은 이들은 이제 더욱 자주 우리가 경험한 임보라를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 아프고 슬픈 이들에게 밥을 먹이던 그를 기억하며 한동안 우리는 깊은 애도를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또다시 서로를 딛고 일어나 임보라가 말하던 세상의 중심, 아픈 이들 사이로 걸어가야 한다. 임보라가 바랐을 세상, 누구도 고독하게 혼자 감당치 않도록, 끈질기게 희망을 말하며 절망의 시대를 지나가야 한다. 그가 말하던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 남은 우리가 기어코 견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식이 2월7일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섬돌향린교회 제공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식이 2월7일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섬돌향린교회 제공

자유가 되어 나풀나풀 날기를

이제는 목사가 아닌 ‘임보라’ 자체로 그를 기억하고 부르고 싶다. 노래 잘하고 춤추는 것 좋아하고, 살랑거리는 오색 리넨 치마에 화려한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제주에서 밥집도 하고 싶고 장례지도사도 하고 싶었던, 반려견 찹쌀이를 사랑하는 임보라로.

우리들의 임보라, 이제는 더 이상 대단치 않은 모습으로 자유를 얻었기 바란다. 목사, 엄마, 지지자, 모든 이름 내려놓고 부디 소박하고 별난 임보라 자체로 그가 그토록 바라던 하느님의 품에 안겨 위로와 진정한 쉼을 누리기를. 초록나무 임보라 영혼의 안식을 바라는 수많은 이의 염원을 함께 보내며.

정유현 전 섬돌향린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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