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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확신범의 죽음

반성과 사죄 없는 죽음으로 인해 전두환은 가장 ‘잔인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돼
등록 2021-11-27 10:39 수정 2021-11-28 03:34
2021년 11월25일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등 11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전두환씨 사망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1년 11월25일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등 11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전두환씨 사망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1년 11월23일 아침 전두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갑자기 몽둥이로 뒤통수를 강하게 두들겨 맞은 듯 한순간 뒷골이 띵하고 멍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1980년 5월 전남대 학생이던 나는 5·18 현장에 있었다. 맨손으로 민주화를 외치던 바로 내 곁에서 계엄군의 진압봉과 총탄에 무고한 사람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그 순간 엄청난 규모로 밀려오는 공포심은 우리의 저항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렸다. 무기력함이 엄습했다. 그런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계엄군이 물러간 뒤 전남도청에 들어가 하룻밤을 잤다. 진한 악취가 후각을 자극하자 새벽잠에서 깼다. 역겨운 냄새를 따라가보니 민원실 통로에 배열된 희생자들의 주검이 썩어가고 있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그 풍경은 정신과 신체를 지배하는 선명한 트라우마로 각인됐다.

여전히 광주·민주주의에 퍼붓는 총탄

‘전두환’이라는 이름은 그 풍경의 중심에 있었다. 2017년 4월 발간된 <전두환 회고록>을 펼쳐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회고록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그의 거친 언어는 나를 향해, 광주를 향해, 민주주의를 향해 아직도 총탄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헬기 사격을 증언했던 조비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였고, 전두환이 보낸 공수부대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거나 상처를 입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폭도’였다.

1985년 우리는 전두환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비수를 날렸다.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현장에서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과, 저항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기록한 일종의 ‘5·18 서사’였다. 동료들과 함께 우리 손으로 직접 5·18 당시 광주에서 저지른 전두환의 유혈 진압 실상을 국민에게 알리겠다는 시도였다.

뜻밖에도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어 정권 연장을 꾀하던 전두환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민주화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1988년 국회에 ‘광주특위’가 구성됐고, 5·18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리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학살을 저지른 자들은 청문회를 오히려 변신의 기회로 삼았다. 전두환 친위대처럼 움직였던 보안사령부는 광주 유혈 진압의 기록을 샅샅이 뒤져 삭제하거나 변조해버렸다. 청문회에 나선 군 쪽 증인들은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백주 대낮에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벌어진 집단발포를 ‘자위권 상황’에서 벌어진 ‘정당행위’였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악화된 이유는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이 아니라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뻔뻔함의 극치였다.

5·18이 북한군 소행이라면 전적으로 전두환 책임

1994년 김영삼 정부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지시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12·12 군사쿠데타는 ‘반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내란’이라고 명명했다. 전두환에게는 내란수괴로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구속된 지 채 2년이 지난 1997년 말, 김영삼·김대중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전두환을 사면해버렸다. 사면 조치에 광주 시민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5·18 진상 규명은 ‘역사의 장’으로 넘어갔다. 2005년 노무현 정부의 국방부가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5·18 진상 규명에 나섰지만, 군 자료가 광범위하게 변조된 상황에서 조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철저하지 못한 과거 청산의 틈을 비집고 지만원 등 극우 인사들이 ‘5·18은 북한 특수군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퍼뜨렸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5·18의 희생을 바탕으로 꽃피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는 ‘5·18 가짜뉴스’조차 마음대로 퍼뜨릴 길을 터주고 말았다. 박근혜 정권의 국가보훈처는 5·18 추도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슬그머니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을 차용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매우 비겁하다. 만약 북한군이 5·18을 일으켰다면 당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등 국가의 핵심 정보기관 수장을 맡은 전두환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졌어야 할 문제다.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는 북한군 정보를 탐지하고 간첩을 잡으라고 만든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는 ‘북한군 개입설’에 기대 자신이 광주에서 벌인 학살 행위를 합리화하려 했다.

전두환의 회고록은 5·18에 대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졌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소송대리인 김정호 변호사)는 2017년 5월 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을 바탕으로 회고록에 기재된 허위사실 60여 가지를 추려 법원에 판매금지가처분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인용했다.

동시에 조영대 신부(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는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전두환을 재판정에 세웠다. 1심 재판부는 회고록의 주장과 달리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전두환의 사망으로 공소 기각될 운명에 처했다. 더 이상 전두환이 형사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회고록에 기재된 5·18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민사소송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범들은 전두환을 대신해 잘못 밝혀야

전두환의 사망으로 ‘어둠의 시대’가 저물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33년간의 군사독재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모두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그림자는 아직도 진하게 남아서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맴돈다. 비록 자연인으로서 전두환은 사라졌지만 그가 저지른 역사적 범죄행위는 여전히 사법 심판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반성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사죄하기를 거부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향해 ‘살인마’라고 불렀다. 반성과 사죄 없는 죽음으로 인해 그는 가장 ‘잔인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와 함께 역사적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이 이제 그를 대신해서 5·18 당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소상히 밝혀야 할 차례다. 여태까지는 전두환의 강경 입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부담은 이제 사라졌다. 지금이야말로 41년 전 광주에서 저질렀던 자신들의 행위를 솔직히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인생을 정리할 적절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재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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