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때마침 대한광복단에서 저지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의 소문난 부자 장승원을 광복단원들이 사살한 것이었다. 지난날 관찰사를 지내면서 임금의 토지까지 착복해가며 재산을 모은 장승원은 대한광복단에서 추진하는 군자금 조달에 불응했다.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을 비롯한 광복단원들을 경찰에 밀고하려고 했던 것이다. 광복단에서는 통고문을 보낸 전국의 부자들에게 시범을 보일 겸해서 장승원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것이었다.”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6권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일제강점기 1917년에 실제 있었던 대한광복회(대한광복단으로도 불렸다 합니다)의 활동 모습을 서술한 겁니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기존 의병투쟁과 계몽운동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통합해 결성한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조직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광복회 결성과 함께 총사령을 맡은 고헌 박상진 의사가 있었습니다.
소설 <아리랑>은 박상진 의사와 대한광복회에 대해 이같이 설명합니다.
“박상진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왜놈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누구보다 굳게 가진 인물이었다. 왜놈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군대를 양성해야 하고, 군대를 양성하려면 막대한 군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박상진이 전국적으로 조직한 것이 대한광복단이었다.”
박 의사는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조사받을 때 광복회라는 조직 이름과 관련해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본래대로 돌이키고 사물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다는 뜻으로 ‘광복’이란 말이 이때부터 쓰였던 것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12월7일 현재의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양정의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1910년 판사 등용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습니다. 하지만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자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사임하고 가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1915년 광복회를 결성해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펼쳤죠. 그러다 1918년 일제 군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른 뒤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11일 대구감옥에서 36년 6개월 남짓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2021년, 박 의사가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됩니다. 고향 울산에선 지금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재조명하는 다양한 순국 100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입니다.
울산시는 순국일을 전후한 8월9~15일을 ‘박상진 총사령 순국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선포했고, 울산박물관은 8월10일부터 12월19일까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습니다. 8월27일에는 '박상진의 시대 어떻게 이해하나'를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고, 10월 중에는 ‘박상진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답사 행사도 예정돼 있습니다.
울산시는 누리집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박상진 의사의 서훈 등급 상향을 위한 상훈법 개정을 촉구하는 시민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박 의사는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서훈 3등급)을 추서받았습니다. 공적에 견줘 서훈 등급이 낮다는 것이죠. 이 서명운동은 10만 명을 목표로 진행 중입니다.
특별기획전을 보신 이라면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전까지 일제강점기 초 살벌했던 무단통치 시기에 박 의사가 전 재산과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무장독립군 양성을 위한 전국적 조직 결성과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폈던 구체적인 행적을 확인하고 서훈 등급 상향을 촉구하는 서명운동 취지에 공감하실 겁니다. 특히 박 의사가 김좌진을 광복회 부사령으로 임명하고 군자금 제공을 약속하며 만주로 파견해 1920년 그 유명한 청산리대첩을 준비했던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청산리대첩 때 박 의사는 대구감옥에 수감돼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습니다.
신형석 울산박물관장은 “박상진 총사령과 광복회는 1910년대 일제 무단통치 시기 민족운동 세력을 규합해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며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운동 역량이 3‧1운동으로 이어지는 기반을 제공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신 관장은 이어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박 의사의 독립운동 정신은 이후에도 독립운동사 전체를 관통하며 1945년 광복까지 계승됐다. 특별기획전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박 의사를 기억하고 서훈 등급 상향도 이뤄지길 기원한다”고 했습니다.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펴낸 <한의 독립투사 고헌 박상진>에서 “박 의사의 행적이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방해공작과 분단한국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대부분 가려지고 말았다”고 아쉬워했습니다. 독립유공자의 공적 평가와 서훈이 대부분 친일 잔재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했던 시기에 이뤄지다보니 공정성과 객관성에 논란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특히 정부 수립 이후 국회 부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내며 영향력을 행사했던 보수정치인 장택상이 광복회 대원들에 의해 사살된 친일 부호 장승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박 의사의 공적과 서훈 등급이 낮게 평가된 것과 연관 짓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물산장려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주도했던 김성수가 서훈 2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가 친일 행적을 인정한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따라 2018년 2월 국무회의 의결로 서훈이 취소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라며 일제의 학병 강제징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총독부 어용 기관지 <매일신보> 등에 기고하고 연설하며 국방헌금도 납부했습니다.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 발령도 거부하고 전 재산과 청춘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박상진 의사의 서훈 등급이 그보다도 낮게 평가돼 등급 상향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울산=글·사진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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