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16일 전세계 40여 개국에 지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한국의 디지털성범죄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사진 아래)를 발표했다. 단체는 한국에서 불법촬영·유포 등 디지털성범죄가 급격히 늘었지만 “한국 정부는 디지털성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이해가 결여돼 있다”고 지적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전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인권유린 사태를 조사해 널리 알리고, 유엔 등 국제단체와 협력해 정부가 정책을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는 독립적인 비정부단체다. 시리아 내전, 로힝야 학살, 북한의 식량난과 강제노동, 코로나19 영향 등을 조사해왔다. 이번 보고서는 ‘디지털 기술과 여성 인권’ 주제로 낸 첫 보고서로, 불법촬영 관련 논의가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점 때문에 한국을 택했다.
이번 조사를 담당한 헤더 바(사진 위) 휴먼라이츠워치 여성권리국 임시 공동디렉터를 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2년여 동안 한국을 오가며 디지털성범죄 실태 조사에 매달려왔다. 앞서 한국의 ‘미투’운동과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등 여성 인권 관련 뉴스를 꾸준히 챙겨봤다고 한다. 불법촬영 기사를 처음 읽은 건 4∼5년 전이다. “한국은 불법촬영 문제로 매우 큰 타격을 입은 첫 번째 국가다. 전세계적으로 여성을 동의 없이 촬영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고 있는데, 한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제도가 (불법촬영 근절에) 실효적으로 작용했는지 배우고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다.”
불법촬영물이 올라오던 대형 커뮤니티 소라넷이 폐지되고, ‘웹하드 카르텔’과 ‘엔(n)번방’ 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나 디지털성범죄 관련 법이 잇따라 개정됐지만, 휴먼라이츠워치는 한국 정부의 대응이 여전히 미진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정부가 불법촬영물 소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뿌리 깊은 성차별을 바꾸는 등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조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경찰은 (디지털성범죄) 신고 접수를 거부하고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피해자를 비난하고 촬영물을 신중하게 다루지 않고 부적절하게 신문하는 등 인권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피해자는) 사건 진행 과정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재판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판사들은 낮은 형량을 선고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보고서). 헤더 바 디렉터는 한국이 “불법촬영 범죄가 가장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나라”인 동시에 “정부기관의 대응이 소극적인 나라”라고 진단했다.
‘비협조적인 정부’ 모습은 조사 과정에서도 거듭 확인됐다. 휴먼라이츠워치의 면담 요청에 응한 정부기관은 방송통신위원회뿐이다. 여성가족부는 서면 답변만 보냈고, 경찰청과 법무부는 아예 면담에 응하지 않았다. 국회, 교육부, 대검찰청, 대법원 등에 서신을 보냈지만 어느 기관도 응답하지 않았다. 디지털성범죄와 관련해 여러 정부기관에 더욱 적극적인 조처를 요구하는 47개 권고안을 보고서에 담은 이유다.
헤더 바 디렉터는 “포괄적 성교육과 디지털 시민의식을 기르는 교육이 병행되지 않으면 디지털성범죄를 예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크게 두 축을 제안했다. 하나는 성별 고정관념을 삭제하고 ‘동의’의 중요성 등을 포함한 ‘포괄적 성교육’, 다른 하나는 기술을 바르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시민의식 교육’이다. “한국은 처벌법을 만들었지만 다른 분야의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이런 범죄를 ‘있을 수 있는 일’로 취급하거나 도리어 이를 장려하기까지 하는 여성혐오 문화를 끝내야 한다.”
실제로 서울시가 2021년 5월 발표한 ‘아동·청소년 디지털성범죄 가해자 상담사례’ 분석 결과를 보면 가해 청소년들은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거나’(21%) ‘재미난 장난’(19%)이라고 생각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답변(중복 응답)했다.
“7살 딸이 파키스탄에서 사립학교를 다니는데 벌써 기본적인 성교육을 시작했다. 딸과 요즘 관계, 성평등, ‘동의’의 의미, 성소수자 권리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있다.”
반면 보고서 속 한국의 성교육은 “데이트에 많은 돈을 쓰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상대 여성에게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 받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 강간이 일어날 수 있다”(2015년, 고등학교 성교육 지침서)고 쓰여 있는 수준이다.
필요한 제도는 하나 더 있다. 여성이 과소대표된 주요 분야, 즉 정치·경찰·사법 분야에서 차별을 시정하는 적극적 조처를 통해 “여성 수를 늘리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모든 기관의 성별 불균형을 모니터링하고 여성이 과소대표되는 상황을 바로잡아나가야 한다”고 헤더 바 디렉터는 짚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권운동을 한 경험이 있는 그는 “더 강력한 할당제가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아프가니스탄 국회는 한국(19%)보다 여성 의원 비율(28%)이 더 높다. 할당제 덕분이다. 이 여성 의원들은 입법 과정에서 여성의 관점을 반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 한국에선 이런 조처를 두고 “남성에게 ‘역차별’인 제도”라는 주장이 나온다고 전하자, 그는 “난센스”라고 잘라 말했다. “(정치 등) 주요 분야에 여성이 부족한 것은 직접적인 차별의 결과다. 한국 여성은 매우 잘 교육받았다. (주요) 정부기관에서 (지금보다) 많은 자리를 차지해야 할, 동등하게 자격을 갖춘 여성들이 있다.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여성을 더 많이 고용하라는 게 바로 공정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처럼 구조적 차별을 시정해가는 작업은 “남성에게도 (지금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는” 제도라고 그는 설명했다. “(남성이란 이유로)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이 줄어들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더 많은 기회가 생기니까” 말이다.
헤더 바 디렉터는 한국 여성이 만들어온 변화에 일관되게 낙관과 희망을 표했다. “여성이 ‘인간’임을 완전히 존중받기 위해 물러나선 안 되고 물러날 수도 없다. 인터넷에는 언제나 ‘얼간이’(jerk)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차단할 필요가 있다. 한국 여성은 이미 2018년에 거리를 점유해 세상을 바꾸지 않았나. 정부가 불법촬영에 대응하게 했다. 그 힘을 다시 한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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