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의 존 마크 램자이어 교수가 쓴 ‘태평양전쟁 중의 성매매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이라는 논문이 미국 학술지 <법경제학 국제리뷰>(IRLE)에 실렸다. 곧 인쇄본으로도 출판될 예정이다. IRLE는 심사를 거쳐서 통과된 논문만 게재하는, 법경제학 분야에서 나름 명망을 인정받는 저널이다. 나도 IRLE로부터 몇 차례 심사 의뢰를 받아 제출된 논문들을 심사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을 읽고 나서 먼저 든 생각 중 하나는 ‘그의 논문이 도대체 어떻게 심사 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논문은 학문적으로 가치가 없는 함량 미달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논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한다는 점이다.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거나 노예제도가 흑인 노예의 자발적 계약 관계였다고 해석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연구나 주장이 논란을 일으킨 게 처음은 아니다. 역사라는 게 학자 몇 명이 작당해서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닌데 이런 왜곡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사회적 비난이 쏟아질 것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그걸 감수하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보상은 사회적 관심과 인지도일 수도, 그런 논란으로 이득을 보는 누군가가 약속한 금전적 대가일 수도 있다. 역사 부정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대응은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다.
몇 년 전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을 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많은 사람이 “도대체 뭐라고 썼길래?”라며 그 책을 사서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 책을 읽어보기는 했느냐?”는 반박은 노이즈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한 질문이었다. 그런 논문이나 책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다. 전문가들이 신속하고 객관적인 검증으로 그런 글의 학술 가치를 분석하고 문제점을 낱낱이 적시한다면 사회 전체가 오랜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을 자세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다. 경제학 논문의 학술 가치는 새로운 이론적 설명을 제시하고 적합한 실증분석을 뒷받침할 때 인정받는다. 그러나 램자이어의 논문은 아무런 이론도, 실증분석도 없다. 이 논문의 주제가 ‘위험직업의 계약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었다면 얼마든지 다른 예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굳이 위안부 여성의 예를 분석에 끼워 맞췄다. ‘끼워 맞췄다’고 쓴 이유는,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군이 강제로 착취하고 유린한 성노예였지 위안부 운용자와 ‘계약 관계’인 피고용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안부 여성의 사례로 계약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램자이어는 피해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라는 직업을 선택했으며 사창가 포주들과 동등한 관계에서 자신의 성매매 계약 조건을 자유롭게 “협상”할 수 있는 관계였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은 흔히 다른 경제모델에서 쓰이는 것처럼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다. 이 가정이야말로 램자이어 논문의 핵심이며, 그 가정 없이는 논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가정 자체가 논문의 중요 결정 요인인 경우 학술논문으로 가치가 없다.
램자이어는 자신의 가정을 정당화하려고 10살짜리 ‘일본인’ 여아가 자발적으로 성매매 계약에 동의했다는 사례를 든다. 그러나 이는 당시 일본법에 따르더라도 미성년자는 노동계약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정면으로 반할 뿐 아니라, 한국인 위안부 여성의 경우에는 더욱 해당하지 않는다. 2월26일 석지영 하버드대학 로스쿨 교수는 미국 시사주간 <뉴요커> 기고에서 램자이어 교수와 나눈 전자우편과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램자이어가 “한국인 위안부가 작성한 계약서를 갖고 있지 않다. 찾을 수 없었다”고 시인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램자이어는 논문에서, 한국인 위안부의 경우 “실제로 모집 과정에서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고 쓰고 있다. 이는 “위안부 여성들이 자발적 매춘부였으며 포주와 계약을 협상했다”는 가정을 스스로 부정하는 자기모순이다. 논문의 가정이 부인된 만큼, 논문의 핵심 주제인 ‘계약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며 논문의 논리 기반이 허물어진다.
논문 서두에서 램자이어는 위안부 여성들의 계약에서 보이는 특이점(다른 성매매 여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짧은 계약 기간, 많은 선불임금 지급)을 경제학의 게임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며 일본과 한국 내 일반 성매매 여성들과 위안부 여성들의 상황을 비교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비교분석은 어디에도 없다.
그 대신, 램자이어는 일본인 성매매 여성과 일본인 위안부 3명의 임금을 비교했다. 이 3명의 임금 기록이 일반 성매매 여성들의 임금보다 높았다는 것을 마치 실증분석인 것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일본인 위안부 3명이 어떻게 선택된 샘플인지 알 수 없다는 점, 그 3명의 자료에만 근거해서 임금 격차가 컸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 무엇보다 이들은 모두 일본인 위안부였으며 한국인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자료와 무관하다는 점 등은 이 논문의 데이터 분석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결함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램자이어는 또 위안부 여성들의 계약 기간이 짧고 그 뒤엔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며, 그 증거로 위안부 여성들을 팔아넘긴 모집자들의 증언을 든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위증했을 가능성은 아예 검증하거나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램자이어가 논문에 쓴 ‘증거 자료’라는 것이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연히 드러낸다. 논문의 실증분석 자료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그 논문은 학술저널에 게재될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명돼 즉각 철회 대상이 된다.
연판장 서명 닷새 만에 2500명 육박그렇다면 이 논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뭘까? 위험직업의 계약관계 분석에 적절하지 않은 군 위안부의 사례를 분석틀로 쓴 것,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도 안 되고 증명할 수도 없는 가정을 한 것, 그 가정이 일본군의 위안부 여성에 대한 범죄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건 단 한 가지, ‘전쟁범죄의 합리화’다.
램자이어는 단지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주려 경제학과 게임이론을 도용했다. 경제학자들이 이 논문에 크게 분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학자로서 그런 행동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공감하는 경제학자와 게임이론 전공 학자들이 뜻을 모아 대응성명서 초안 작성에 들어갔고, 한미경제학회(KAEA) 임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열린 공개토론과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2월22일(미국시각) 연판장 전문과 서명 동참을 호소하는 전자우편이 한미경제학회 회원들과 전세계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에게 전달됐다. 연판장 서명이 시작된 지 닷새 만에 서명 참여자가 2500명에 육박했고, 그 뒤로도 참여가 이어지면서 3월2일 현재 3010명을 넘어섰다. 경제학자뿐 아니라 역사학, 정치학, 여성학, 법학, 국제관계, 공공정책 등 사회과학 각 분야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렇게 이른 시일 안에 많은 학자가 뜻을 모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대다수가 이 사안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논문이 저널에 출판될 자격이 있음을 판단하기 위해 같은 연구 분야의 다른 연구자에게 그 논문에 대해 꼼꼼하고 전문적인 심사를 요청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정치적 목적 말고 학술 가치가 없는 논문을 거르는 자정 능력이 작동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램자이어의 이번 논문이 IRLE 같은 학술 전문 저널에 실렸다는 것은 논문 심사 과정이 본연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학문의 자유와 곡학아세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자. 정치적 목적에 학문을 악용하는 것, 폭력과 착취를 학문의 이름을 빌려 정당화하려는 행위는, 실제 그런 외압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각한 해악 행위다.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은 학문의 윤리와 가치를 땅에 떨어뜨렸다. 우리는 이 논문이 학술저널에 실릴 논문으로서 자격 미달인 만큼 논문 철회를 요구한다. 나아가,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IRLE가 논문 심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학문 윤리에 위배되는 행위가 있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수 미알론 미국 에머리대학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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