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때 그 집은 가난했는데, 들어가서는 (아들들한테) 집이 생겼는데….”
지적장애인 김정훈(39·가명)씨는 지난 4년여를 돌아보며 말했다. 8월21일 해운대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도움으로 <한겨레21>과 한 영상통화에서다. 20년 넘게 먹고 자고 일했던 경남 창원 돼지농장을 떠나 작은아버지 부부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게 2014년 12월이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자, 아버지 소유의 땅을 판 돈 2억여원이 김씨에게 입금됐다. 그런 그에게 장례식장에서 만난 작은아버지 부부는 동거를 제안했다. “부산에서 같이 살자.”
작은아버지네와 함께 산 4년, 남은 건 1억원 빚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동산 매매와 대출 등이 김씨의 금융거래 내역에 하나둘 찍히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다. 지적장애 3급인 김씨는 완성된 문장을 말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논리적 사고나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기 어렵다. 특히 돈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 자신이 돼지농장에서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자산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작은아버지 김아무개씨와 숙모 백아무개씨는 이 점을 이용해 김씨의 퇴직금과 급여, 상속재산을 수십 차례 걸쳐 가로챘다. 숙모는 김씨 명의로 대출받아 김씨 명의로 오피스텔을 산 뒤, 그 소유권을 그의 작은아들 명의로 옮겼다. 또 김씨 계좌를 제 것처럼 관리하며 큰아들의 오피스텔 구매를 위해 3천여만원을 꺼내 썼다. 또 다른 부동산 한 채도 김씨 돈으로 산 뒤 다른 사람에게 팔아, 차액을 포함해 2억4천여만원을 가져갔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작은아버지 부부는 마치 김씨를 물건처럼 ‘빼앗고 뺏기듯’ 번갈아 데리고 살며 경제적으로 착취했다.
이런 범행은 2018년 10월까지 4년 가까이 이어졌다. 두 사촌동생에게는 어느새 집이 생겼다. 그러나 김씨 수중에 남은 거라곤 빚 1억여원뿐이었다. 김씨는 부산장애인권익옹호기관과 발달장애인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공공후견인을 선임하고 2019년 12월 작은아버지네 가족 4명을 준사기·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줘야 한다”고 읊조리던 김씨의 바람을 가로막은 건 ‘친족상도례’였다. 검찰 조사 끝에 2019년 12월31일 작은아버지 부부가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검찰이 산정한 피해액은 1400여만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금액에 대해선 ‘동거 친족’이기 때문에 공소권이 없다고 했다. 친족상도례(형법 제328조)는 직계혈족이나 배우자, 동거 중인 친족이 사기·횡령·배임 등 재산범죄를 저지르면 그 형을 무조건 면제받게 하고, 그 외의 친족이 죄를 범하면 고소가 있어야 공소 제기가 가능하도록 한 제도다. 국가 형벌권이 가족끼리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 함부로 규율하면 안 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범행 동기나 죄질,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대부분 일률적으로 적용된다.
작은아버지 부부는 김씨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김씨와 함께 산 시기에 벌어진 범죄와 피해액에 대해선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작은아버지의 욕설을 견디다 못한 김씨가 가출해 인근 고물상에서 숙식하던 때 쓴 돈 1400여만원만 범죄행위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지난 5월 부산지법은 작은아버지 부부에게 징역 4개월을 선고하고, 숙모에겐 “피해 금액을 갚았다”며 그 형의 집행유예 2년을 덧붙였다.
가족 개념 변한 67년, 규정은 그대로
피해자와 같이 살지 않았던 작은아버지의 아들 둘은 검찰에서 혐의가 없다는 처분을 받았다. “피해자가 재산을 갖고 있으면, 장애 혜택을 받지 못하고 건강보험료가 부과되니 부동산 소유권을 잠시 이전해둔 것에 불과하다” “재산을 가로챌 의도가 없었다”는 변명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김씨의 법률대리인인 이현우 변호사를 비롯해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이정민 변호사, 희망을만드는법 최현정 변호사 등 10여 명의 변호사는 김씨가 재판 절차에서 보장받아야 할 형사피해자의 진술권을 침해받았다는 취지로 친족상도례가 위헌인지 가려달라는 헌법소원을 냈다. 4월7일 헌재는 위헌 여부 심리에 들어갔다. 앞서 헌재는 2012년 친족상도례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친족상도례는 형법이 제정된 1953년에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권위를 인정받는 대가족의 큰어른이 가족 사이에 벌어진 재산 다툼을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가족은 해체됐고 가족의 정의와 형태는 변했다. 친족상도례가 ‘시대착오적’이라 지적받는 이유다. “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들 중 민사, 형사, 가사를 가리지 않고 친족 간 재산분쟁에서 비롯된 사건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가족 구성원의 수가 줄어들고 따로 거주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가족 구성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게 쉽지 않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분쟁의 대상이 되는 재산 가치가 큰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모성준 판사, ‘형법상 친족상도례 규정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개정 방향’)
그러나 70여 년 된 낡은 규정은 빗발치는 법 개정 요구에도 진지하게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적이 없다. 이정민 변호사는 “형법이나 민법과 같은 기본법에는 누구도 손대려 하지 않는다. 가족제도같이 본질적인 문제는 사회적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는 2017년 299건, 2018년 630건, 2019년 356건 등 해마다 수백 건의 친족상도례 관련 상담 문의가 접수된다. 집에서 145만원을 잃어버린 시각장애인이 엄마와 형제를 처벌할 수 있는지, 수년 전 가출한 채 이혼해주지 않는 부인이 자신 앞으로 명의신탁된 부동산을 몰래 팔아버렸는데 처벌이 가능한지 묻는 상담전화 등이다. 올해(2020년 6월 기준) 친족상도례와 관련된 상담만 125건이나 된다. 그러나 이런 상담 사례가 기소, 재판 단계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공단 쪽 설명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이유로 형을 면제해주기 때문에, 재판은커녕 경찰·검찰 수사도 진행되지 않는다.
고소조차 못한 지적장애인 재산 착취
낡은 규정은 재산을 갈취하는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나 친척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경제적 착취 가해자 상당수가 가족인 지적장애인의 경우 그 문제가 심각하다. 2019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착취 사건(328건)의 가해자를 살펴보니, 가족 및 친인척(19.2%)이 타인(56.5%), 기관종사자(24.1%)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다.(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2019 장애인학대 현황보고서>)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친연대 사무국장은 “가족이 장애인 앞으로 된 재산을 가로챘다는 상담 사례가 접수되지만, 대부분 친족상도례 때문에 고소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 돼버린다”고 지적했다.
이현우 변호사는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로 재량의 여지를 둘 수 있다. 여러 사정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가족이나 친인척 관계라는 이유로 기소조차 못하고 처벌의 여지를 원천 차단하는 현재의 조항은 적절하지 않다. 이제는 재고해야 할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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