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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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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노동자를 ‘삭제’하는 공모자들

‘진정한 자유’ 꿈꿨던 이재학 피디의 죽음
등록 2020-03-18 21:40 수정 2020-05-03 04:29
2월12일 국회 정론관에서 고 이재학 피디 유족들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2월12일 국회 정론관에서 고 이재학 피디 유족들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두꺼운 ‘거짓 갑옷’으로 위장한 노동자들이 방송 프로그램 제작 현장 곳곳에 존재한다. 그들은 ‘프리랜서’ ‘파견’ ‘도급’ 등으로 불리지만 실제 노동 현장을 살펴보면 다수가 노동관계법령을 적용받아야 마땅한 노동자이거나 직접 고용됐어야 할 정규직 노동자이다.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수는 계속 늘고 있지만, 방송사들은 그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이들은 철저히 사용자의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부서별로 ‘알음알음’ 채용됐다가,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다.

퇴사 이후 법률 대응으로 항변했던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오히려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외로운 싸움을 포기했다. 방송계 비정규직들이 타 업종보다 노동법 보호를 받기까지의 과정은 유독 가시밭길이다. 왜 그럴까. 그들을 ‘노동법’ 적용이 언감생심인 ‘무늬만 프리랜서’로 정교하게 위장시키는 기술자들, 그리고 이를 묵인하고 오히려 조력하는 공모자가 겹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동 지우는 ‘위장의 기술자들’

1차 위장 기술자는 사용자, 즉 방송사다. 대법원은 사용자에게 종속돼 일하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기준을 오래전에 확정했다. 방송사들은 그 기준을 대놓고 지우고 겉으로는 ‘프리랜서’라 꾸민다.

계약서를 쓰지 않거나, ‘프리랜서 계약서’ 혹은 ‘위탁(용역) 계약서’ 등을 작성하면서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령의 적용을 받지 않는 프리랜서”라는 노골적인 문구를 넣는다.

사용자는 이들에게 방송사 출입증을 발급해주지 않고, 연차휴가를 부여하지 않고, 정규직이 참여하는 정기회의에도 부르지 않는다. 다만 ‘프리랜서’들은 1년 기한의 임시 발급증으로 매일 일정한 장소로 출근하고, ‘연차’라는 표현이 빠진 휴가를 다녀온다. 정기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구두로 전달받는다. 4대보험 적용을 요구하는 프리랜서에게는 “적은 월급에 4대보험료까지 내면 실수령액이 적어진다”는 정해진 답이 돌아온다. 물론 이 위장의 충실한 목적은 방송사가 노동법 적용에 따른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고 저렴한 보수로 프리랜서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다.

이런 사례가 노동현장에 만연해지자, 2006년 대법원은 판결을 통해 사용자 임의로 정할 수 있는 여지가 큰 ‘취업규칙 적용 여부’ ‘사업소득세 징수 여부’ ‘4대보험 적용 여부’ 등이 법상 노동자임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건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용자가 임의로 정하면 그만인 이 요건들은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결론짓는 데 유용한 잣대로 활용된다.

노동자성 판단에 가장 핵심적인 조건인 ‘사용자의 상당한 지휘·감독 아래 근무하는지 여부’는 방송 제작 업무의 특성을 고려할 때 기본으로 충족될 소지가 매우 크다. 프로그램 제작을 총괄 지휘하는 총연출이 아닌 이상, 누구도 자신이 결정해 업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최근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법원 판결문에도 나타나듯이, 이들은 ‘짜인 스케줄’ 속에 다수 정규직과 ‘협업하면서’, 철저하게 ‘프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청에 퇴직금 미지급 관련 임금체불 진정을 제기한 노동자들은 이런 핵심 요건이 아닌 부수적 요건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끝에 노동자성이 쉽게 부정되곤 한다.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출퇴근 시간이 일정했나요?”(최근 법원은 업무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고정되지 않은 특수고용형태 노동자에 대한 노동자성을 연이어 인정하는 추세다.) “취업규칙을 받은 적이 있나요?”(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도 취업규칙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프로그램 한 편을 마치면 고정적으로 출근했나요?”(제작부 정규직도 고정된 시간에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방송사가 재량근무제를 적극 활용하는 이유 중 하나다.)

최근 들어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두 번이나 인정한 고용노동부지만, 여전히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조사를 답습하고 불법 요소가 많은 현장의 관리·감독마저 소홀한 실정이다. 이들 역시 위장된 프리랜서를 방치한 공모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법원은 어떤가. 방송 제작 업무의 특수성을 정확히 살피고 이를 토대로 형식이 프리랜서지만 실질은 노동자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속속 나왔다. 하지만 법원 역시 방송 제작 현장 고용 구조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위장된 형식에만 매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단적으로 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PD)가 생전에 진행했던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의 1심에서 법원은 “프리랜서 AD로 입사했기 때문에 정규직이 아니다”라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판결을 내렸다. AD의 실제 업무가 무엇인지, 고인이 실제 했던 업무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살폈다면 도저히 언급할 수 없는 문구였다.

이재학 피디의 소망을 이루려면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이 없어지면 오랜 기간 같이 일했던 동료가 없어지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여기는 정규직 동료들의 시선이 더해졌다. 그 현장에서 위장된 프리랜서들은 감히 노동법을 언급하기조차 두려웠다.

고 이재학 피디는 오랜 세월 거짓으로 위장된 무거운 갑옷을 벗고자 했다. 방송계 수많은 위장된 프리랜서들도 함께 노동법의 보호를 받으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바랐다. 그의 생전 소망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라도 법이, 함께 일해온 동료들이, 관계 부처가 기술자 혹은 공모자가 아닌 ‘조력자’가 되어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다.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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