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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 윤석열의 ‘낯선 잔꾀’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13명 기소… 내부회의 가장한 수사팀 ‘짬짜미 회의’
등록 2020-02-01 14:28 수정 2020-05-03 04:29
윤석열 검찰총장이 1월20일 대검찰청 별관으로 건너가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윤석열 검찰총장이 1월20일 대검찰청 별관으로 건너가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윤석열 검찰총장이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관련자 13명의 무더기 기소를 지시한 과정은 그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냈다. 수사를 시작하면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불도저’ 기질은 익히 봐왔던 모습이다. 하지만 내부의 반대 의견을 누르기 위해 ‘잔꾀’를 부리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이성윤 지검장 반발 무마용 요식 회의

윤 총장은 1월29일 송철호(71) 울산시장, 황운하(58) 전 울산지방경찰청장, 백원우(54)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 전·현직 공무원 13명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기에 앞서 내부회의를 열었다. 앞서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기소 여부를 두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충돌했던 것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 윤 총장은 이 지검장이 “(최 비서관) 소환 조사 뒤 기소해야 한다”며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총장에게 ‘이의제기서’까지 제출했지만 이를 무시한 채 송경호 서울중앙지검 3차장에게 최 비서관을 기소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두고 검찰 안팎에서 논란이 일자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관련자에 대한 기소 결정은 정당한 절차를 거쳤음을 보여주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의는 일종의 ‘짬짜미’였다. 회의 참석자를 보면 사실상 수사팀 회의였다. 윤 총장과 이성윤 지검장을 제외하고 대검에선 구본선 대검차장, 배용원 공공수사부장, 임현 공공수사정책관, 김성훈 공안수사지원과장이 참석했고 서울중앙지검에선 신봉수 2차장, 김태은 공공수사2부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이번 수사의 실무 및 지휘 라인에 있는 간부로 윤 총장과 함께 수사팀으로부터 수사 상황을 보고받고 의견을 조율해왔다. 따라서 이날 회의는 윤 총장이 수사 지휘부와 이미 기소를 결정해놓고 기소에 반대하는 이성윤 지검장에게 이를 ‘통보’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이 지검장은 황운하 전 청장을 소환 조사도 없이 기소하는 등 무리한 측면이 있다고 반대했다). 애초부터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회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1월13일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1월13일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수사 무관’ 간부들 의견 청취 관례 깨

역대 검찰총장은 내부 의견을 듣는 통로로 주로 ‘대검 부장(검사장)회의’를 활용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처리할 때 수사와 무관한 부서의 간부들로부터 ‘수사에 오염되지 않은’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회의는 수사 지휘 라인이 아닌 간부들로부터 수사팀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약점’을 잡아내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윤 총장은 대검 부장회의는 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앞서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과 관련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기소에 반대했던 심재철 반부패·강력부장을 의식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성윤 지검장은 이날 회의에서 “외부 위원들로 구성된 전문수사자문단에 기소 여부를 맡기자”는 의견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문수사자문단 회의는 법무부가 최강욱 비서관 기소 논란과 관련해 일선 검찰에 공문을 내려보내 “적극 활용하라”고 지시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 총장과 대검 간부들은 “수사팀원 30명이 일치된 의견을 낸데다 사안의 복잡성과 전문성, 보안 유지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묵살했다. 이 지검장의 의견은 회의록에 ‘이견’으로 게재됐다.

전문수사자문단 회의는 2018년 5월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를 두고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과 양부남 수사단장(현 부산고검장)이 충돌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였다. 양 단장은 문 총장이 애초 수사에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대검 간부의 수사 개입 혐의가 드러나자 약속을 뒤집고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며 반발했다. 이에 대해 문 총장은 변호사와 법학 교수 등으로 구성된 외부 전문가들에게 대검 간부의 기소 여부를 맡기자고 양 단장에게 제안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검찰 관계자는 “대검 간부회의 등 내부회의를 해봤자 국민들이 믿어주지 않을 테니 아예 외부 전문가들에게 맡기자는 게 문 총장의 뜻이었다”고 말했다.

외부 자문단은 대검과 수사단이 회의를 거쳐 구성했다. 자문단은 12시간 가까운 마라톤회의 끝에 대검 간부 등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문 총장의 손을 들어줬다. 문 총장은 수사단의 ‘항명’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견이 발생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고, 이견을 조화롭게 해결해나가는 과정도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사단’을 해체시킨 인사 때 임명된 구본선 대검차장과 배용원 공공수사부장이 기소에 동의한 것을 두고도 뒷말이 나온다. 보수언론은 이를 근거로 이성윤 지검장의 ‘나홀로 반대’를 부당한 것으로 몰아갔다. 기소가 정당한데도 이 지검장이 청와대를 의식해 기소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 차장과 배 부장이 윤 총장과 함께 수사팀으로부터 매일 보고를 받고 의견을 조율해왔기 때문에 윤 총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총장을 보좌하는 차장과 이번 수사 책임자인 공공수사부장이 그날 회의에서 반대했다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총장 ‘내 검사 아니면 못 믿는다’ 메시지

이번 기소는 2월3일 단행될 중간간부 인사로 수사팀원 상당수가 교체되기 전에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만큼 윤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에 새롭게 임명되는 중간간부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기소는 윤 총장이 자기와 함께 일했던 검사들이 아니면 믿지 못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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