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호(50)씨가 옆으로 멘 검은색 가방에서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냈다. 지난해 12월에 산 소니 A230 카메라다. 2000년대 후반 모델로, 포털 사이트의 한 중고거래 카페에서 카메라 10만원, 렌즈 13만원에 샀다. 그 전에 쓰던 중고 카메라가 오래된데다 액정이 깨져서 바꿨다. “처음엔 오토(자동 모드)로 놓고 찍었는데, 사진이 안 늘더라. 그래서 지금은 M(사용자 수동 설정) 모드로 찍는다. 꽃과 한옥을 찍는 게 좋다.” 철호씨 말에 옆에 앉은 이상훈(50)씨가 “인물(사진) 찍는 사람이 사람 찍는 건 안 좋냐”고 눙쳤다. 철호씨가 “아! 사람 찍는 것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진은 ‘인생의 전환점’</font></font>
철호씨와 상훈씨는 ‘희망사진사’다. 이들의 사진관은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사이 왼쪽에 있는 한 부스다. 광화문광장을 찾는 관광객과 시민들을 찍고 돈을 번다. “사진 못 찍는다고 관광객한테 혼난 적도 있는데 지금은 아니다.” 철호씨는 인터뷰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철호씨가 카메라와 인연을 맺은 건 2년 전이다. 그 전엔 사진 찍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인생은 사진을 찍기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은 철호씨에게 “인생의 전환점”이다.
철호씨는 약 20년 동안 집다운 집에서 살지 못했다. 2000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나온 뒤 서울 을지로, 청량리, 동대문 일대의 고시원을 전전했다. 지금 철호씨가 사는 곳은 동대문구에 있는 가나안쉼터다. 2012년 입소해 7년이 넘었다. 철호씨는 집이 없는 홈리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철호씨는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면 이 말을 자주 했다. 그때 왜 술을 많이 마셨는지, 왜 가출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털어놓은 삶의 흔적에는 열패감에 괴로웠던 청년 철호씨가 있었다.
1989년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철호씨는 오디오 전문회사인 태광에로이카에 취업했다. 대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1년 동안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포기하고 군대에 갔다. 제대 뒤 운 좋게 메이저 레코드 회사인 아세아레코드의 CD생산부에 들어가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음반 CD를 만들었다. 하지만 대기업 다닌 이, 대학 다닌 이들과 비교하면 한심해 보이는 자신의 처지에 속이 상했다. 아픈 동생도 신경 쓰였다. 술이 늘자, 아버지는 ‘장남’ 운운하며 큰소리를 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안은 왜 그럴까’ ‘누가 나랑 결혼할까’ 생각했다. 결혼하면 내가 동생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런 여성이 있을까. 스트레스를 받았다.” 철호씨는 술독에 빠져 살았고, 카드 대금이 연체되기 시작했다. 부모님 볼 낯이 없어 마지막으로 집을 나온 게 30살이다. 종말론이 떠돌던 2000년 밀레니엄이었다.
철호씨는 주민등록까지 말소돼 직장이라는 걸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했다. 충남 천안 등에서 인테리어 작업이나 벽지를 붙이는 일 등 닥치는 대로 했지만 돈은 모이지 않았다. 그는 고시원에 살며 일용직을 전전하던 중 갑상샘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오는 갑상샘기능항진증에 걸렸다. 수십 일 동안 토하며 몸무게가 42㎏까지 빠졌다. 병원에 2~3주 입원한 뒤 퇴원하고 보니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 배고파서 찾은 가나안쉼터가 지금까지 철호씨 집이 됐다. 그가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도 가나안쉼터에서 안내해준 덕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홈리스 사진 학교’ 졸업생 100여 명</font></font>
철호씨가 활동하는 희망사진사는 일종의 이동 사진사다. 광화문, 경복궁 등에서 관광객 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서 인화해주며 장당 5천원을 받는다. 월·화요일을 쉬고, 나머지 닷새 동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며 평균 150만원을 번다. 집회와 시위가 많거나 무더울 때는 근무시간이 줄어 임금이 적다. 임금은 서울시에서 지원한다. 장당 수익은 서울시와 사진사가 절반씩 갖는다.
희망사진사는 광화문광장 1호점에 2명, 지난해 10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개관한 2호점 2명을 포함해 총 4명이다. 모두 홈리스 출신인데, 전국 최초로 홈리스를 대상으로 하는 사진 전문학교 희망아카데미를 졸업했다. 희망아카데미는 조세현 사진작가와 서울시가 함께 2016년 7월 시작해 2018년 35명, 2019년 30명 등 지금까지 100여 명이 졸업했다. 2012년 사단법인 조세현의희망프레임과 함께 사진에 관심 있는 홈리스를 대상으로 진행하던 초·중급 과정 ‘희망프레임’에서 인문학 강의 등을 더한 심화과정이다. 사진 이론, 실기, 출사(사진 찍으러 나감)뿐만 아니라 혜민 스님, 김재련 변호사,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오은 시인 등이 멘토로 참여해 홈리스의 자존감 회복과 사회 복귀를 도왔다. 자존감과 의욕이 떨어진 홈리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합동평가를 해서 과제로 찍은 사진에 점수 등을 매겨 누적 점수 1~3등에겐 상을 주고, 강의를 빠지지 않은 이에겐 개근상을 준다. 한 기수에 35명 정도가 적정 교육생 수지만 인기가 꽤 많아 50명 넘게 신청하기도 한다.
서울시는 희망아카데미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단순히 사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한 사회공헌 문화의 확산이 목표였으며, 그 프로젝트 중 하나로 사진을 통한 노숙인 자활 프로그램을 조세현 작가와 함께 기획했다. 사진·문화·예술 교육은 단순한 취미나 여가활동 지원이 아니라 노숙인의 자립과 자활의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호씨는 사진을 찍은 뒤 자신감이 생겼다. 올해 경희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부에 입학 신청을 해둔 상태다. 외국인 관광객 앞에서 당황하지 않기 위해 영어학원에도 다닐 생각이다. “전에는 뭘 하다가 힘들면 포기했는데, 이젠 아니다. 일출 사진을 찍으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서 부지런해졌고, 건강도 좋아졌다.” 상훈씨도 철호씨를 칭찬했다. “조세현 선생님이 처음엔 철호씨가 수줍어서 발표도 못하고 선생님 눈도 못 쳐다봤다고 하더라. 근데 지금은 말을 아주 잘한다. 철호씨는 1등으로 희망아카데미 3기를 졸업했다.”
철호씨는 희망아카데미 인문학 강의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혜민 스님께서 ‘내 몸아 참 고맙다. 많이 걷는 다리가 고맙다. 혈압이 있는데 심장아 참 고맙다’라는 말을 하셨다. 그때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나도 스스로에게 ‘무릎이 안 좋은데 홈리스 월드컵 준비한다고 혹사시켰구나, 다리야 참 고맙다’ 같은 말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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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호씨와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희망사진사로 일하는 상훈씨는 조금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홈리스 활동을 하기 위해 홈리스가 됐다. 캐나다 유학 시절 3년 동안 구세군에서 하는 홈리스 자원봉사를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한 게 계기가 됐다.
“당시 살던 곳이 토론토 다운타운이었다. 서울로 치면 영등포 정도였다. 집세가 싼 지역이라 홈리스가 밀집했고, 구제기관도 많아서 홈리스를 자주 보았다. 토론토에 있는 라이어슨대학은 겨울 저녁에 동아리실 같은 곳을 홈리스에게 개방해서 자도록 했다. 급여가 적은 강사 등 비전임 교원 중 홈리스 쉼터에서 머물며 대학에 강의하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같이 이야기하고 밥 먹는 모습에 영향받았다.”
유학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와서 목도한 홈리스들은 캐나다나 미국의 홈리스들에 비해 주눅 든 모습이었다. 가난하다고, 홈리스라는 이유로 배제하는 사회의 태도는 완강했고, 배제당하는 쪽은 쩔쩔매고 있었다. 홈리스들은 자신이 사회에 불필요한 비용을 유발하는 당사자임을 안다고 했다. 그런 부채의식은 활동가를 통해서도 심어지는 것 같았다. “홈리스와 친하게 지내면서 기를 살려주고 싶었고, 잠재적인 역량이 있으면 꽃피울 수 있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훈씨는 홈리스에게 필요한 건 뭔지, 어떤 활동을 해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 무료 급식소에 밥을 먹으러 가거나, 홈리스 쉼터에서 살았다. 그리고 2008년 서울시 등록 노숙인이 됐다.
상훈씨는 희망사진사가 홈리스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홈리스 상태를 벗어나는 게 보통의 주류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일하고, 직장을 가지고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대부분의 홈리스는 일한다고 하면 위험한 일자리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한 달에 두 번 쉬는 장시간 노동도 한다. 지난해 제1285호에서 빈곤 노인 노동을 다룬 기사처럼 ‘늙었다 일한다 다친다 가난하다’ 굴레를 못 벗어난다. 홈리스들이 노동하지 않으면 죄스러운 마음을 갖는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창의성 있는 예술활동이나 사회활동으로 노동을 대체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생계비를 받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 희망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 가운데 많은 나이와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원래 하던 장시간 노동 대신 예술활동을 하는 홈리스가 있다. 동대문 쪽방에 사는 조인순(59)씨는 지난해 10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동네 작은 갤러리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주로 낙산과 남산, 성곽을 찍었다. 전시 사진 40장 중 인순씨의 사진은 7~8장이었다.
인순씨는 동네 주민들에게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주며 마을에서 예술기획자로 살고 있다. “사진은 나한테 선생님이다. 나이 육십에 사진에 취미를 붙이게 되면서, 우울증도 많이 좋아졌다.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게 인도해줬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를 인생 목표로 삼고 있다.” 인순씨는 식당 조리사로 40년간 일하면서 닳은 양쪽 무릎 관절 수술을 하고 나면 희망사진사로도 일하고 싶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속가능한 희망을 위하여</font></font>
상훈씨와 철호씨는 새로운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희망사진관을 비영리 사회적기업이나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점이 늘어나면 사진에 관심 있는 홈리스가 좀더 안정적인 일자리와 예술활동을 병행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는 희망사진관을 열려면 서울시와 해당 구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1호점에서 2호점으로 늘리는 데 6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이유다. 또 2호점이 개관해 희망사진사가 늘어난 뒤, 비수기인 12~3월에는 수입이 없어졌다. 희망사진사들의 일자리가 불안해진 셈이다.
“홈리스가 시 지원금에 기대지 않고 영업으로 수익을 창출하면 해운대 희망사진관, 무등산 희망사진관도 만들어 더 많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다. 관광지에 희망사진사가 배치돼, 문화해설사 역할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러려면 먼저 홈리스 안에서 함께 활동할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상훈씨)
철호씨도 옆에서 거들었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 대한민국을 들썩들썩하게 만들겠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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