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젠더 감수성을 가진 남자가 아니면 로맨스에 임할 수가 없어요. 그걸 무시하면서 이성적 끌림으로만 만나기에는 ‘리스크’(위험)가 너무 크기도 하고요.”
강미나(31·가명)씨에게 연애 상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격도, 외모도, 경제력도 아닌 ‘젠더 감수성’이다. “2017년 젠더 이슈가 많이 터졌을 때, 진짜 잘생긴 애를 만났거든요. 그런데 (젠더 감수성) 부분이 떨어지니까 아예 감흥이 안 생기는 거예요.” 그는 2017년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를 끝으로 ‘비연애’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회사에 공채 5년 동안 여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 자기네 기수에 여자 한 명이 처음 들어왔대요. 그 얘기를 하면서 왜 문제의식을 안 느끼지 답답했어요.”
연애 기준은 ‘젠더 감수성’강씨의 결론은 ‘4B운동’ 동참이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에서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4B운동은 섹스·연애·결혼·출산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4B(비)는 비섹스·비연애·비혼·비출산을 일컫는다. 기성 언론은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4B운동은 20대들에게 주요 화두다. 한겨레 젠더 매체 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대 805명에게 ‘20대 연애 행태에 대한 인식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4B운동을 알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66.8%(여성 69.3%, 남성 64.4%)였다. 엄마 세대와 언니 세대가 섹스·연애·결혼·출산을 생애주기에서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절댓값으로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20대 여성들은 이를 상황과 조건에 따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로 인식한다. 4B운동이 대중화한다면, 한국의 저출생 문제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할 수도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재시동)’ 시대, 1990년대생의 ‘연애’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한겨레가 만든 젠더 미디어 과 청년지식공동체 이 지난 8~10월 연애 중인 페미니스트 또는 친페미니스트 커플 10쌍을 만나 심층 인터뷰한 이유가 여기 있다. 사적인 관계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90년대생 페미니스트들의 연애 속에 ‘젠더 갈등’의 해법이 숨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데이트폭력이었다’ 싶은 경험이 많다. 성관계를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한다든지, 노출이 있는 옷을 보고 화가 난다고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는 남자를 만난 적도 있다. 내가 생리통으로 아플 때 ‘네가 아프다고 징징대서 내 하루가 기분이 나빠졌다. 왜 약을 미리 안 먹었는지 설명해. 아니면 아프다고 말하지 마’라는 식으로, 전 연인에게서 언어폭력을 많이 겪었다.”(강수연)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90년대생들은 기존 이성 연애에서 흔히 ‘애정 표현’으로 치부됐던 폭력과 불평등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민감도가 높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한 인터뷰이 10명 가운데 4명(여성 3명, 남성 1명)이 “이전 연애 관계에서 데이트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착적으로 부재중 전화를 남기거나, 다른 이성 친구와의 만남을 통제하는 행동도 데이트폭력이 될 수 있기에 스스로 행동을 검열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이성 연애는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연애 방식’이 아닌, ‘독점 연애’라고 했다.
“질투가 많은 편이었어요. 전 애인이 자신의 카톡 친구로 있는 이성들을 이용해 제 질투를 자극하려 했던 것도 한몫했죠. 이런 제 생각이 이성애/유성애 중심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랑의 범주를 더 많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질투를 많이 없앴다고 생각해요.”(서희선) “지금 애인은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라는 걸 알고 만났어요. 저는 서로 관계에서 정말 필요하기 전에는 독점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상대방도 동의했죠.”(이태곤)
이는 밀레니얼 세대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이 연애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로의 인간관계나 옷차림 등에 ‘개입’하되 ‘통제’로 이어지지 않게 경계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과 파트너의 바이섹슈얼(양성애), 에이섹슈얼(무성애) 같은 성적 지향이나 모노아모리(독점 연애), 폴리아모리 같은 연애관 등을 파악한 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기 전 연애에서는) 이성애 중심 사상이 확고하게 있어서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영화를 보면 독점 연애 규범을 깬 걸로 여겼던 거 같다. 여전히 질투가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학습됐음을 알게 되는 게 좀더 자유로움을 준다.”(박한규) “(내 애인인) 규원이는 로맨틱러브(유성애자)고 헤테로(이성애자)다. 처음부터 규원이한테 말했다. 나는 에이섹슈얼이고 못 느끼니까 네가 사랑을 나눌 상대가 필요하면 나는 아니야. 너와 내가 연애하면 우리는 연대의 느낌으로 연애하는 거야.”(김종희)
미투 운동을 계기로 ‘폭행’ ‘협박’이라는 기존 강간죄 구성 요건을 ‘동의’로 바꾸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논의의 의미를 친밀한 관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이 페미니스트 커플이다. 특히 남성들은 상대방의 명시적인 ‘예스’를 확인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상대의 비언어적 ‘노’를 민감하게 읽어내고 반응하는 일을 중시한다. 이들에게 ‘동의’의 의미는 파트너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재구성되는 것이다.
“둘만 술을 마시거나 집에 초대받거나 같이 여행을 가면 마치 ‘(섹스)해도 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도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에는 그런 상황 자체가 스킨십을 해도 된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2015년 말부터는 바뀌었어요. 철저하게 의심하고 (섹스를) 하다가도 상대방이 그만하자고 하면 중단하고요.”(이태곤) “(파트너가 스킨십에) 동의하지 않는 시그널(신호)을 찾아요. 얘가 별로 마음이 없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김건우)
페미니스트 커플은 섹스 역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쾌락만큼 피임과 안전을 중시한다.
“연애 초반에 성관계 전후로 걱정이 많았다. 분명 편하게 얘기하자고 했는데도 그 주제가 나로 돌아오면 말하기 힘들더라. 그러다 ‘1섹 1리뷰’를 해보자, 한 번 섹스하면 무조건 한 번 리뷰를 하기로 한 거다. 연애 초반부터 그러다보니 함께 즐기기 위한 목적에서 피임, 안전 문제도 점점 편하게 이야기하게 됐다.”(박민경) “섹스 전에 계획을 다 해야 해요. 콘돔을 껴야 하고, 씻고 자야 하고. 여자친구를 병에 걸리게 하면 안 되니까요. 하나 틀어지면 여파가 너무 커요. 그래서 저는 ‘무드’(분위기)라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어딜 감히 손도 안 씻고 막 해요. 콘돔도 안 끼고 하고. 산부인과 한 번 가면 돈이 얼만데요.”(김건우)
남성들에게도 페미니즘이 의미가 있을까. 페미니스트 커플들은 남녀 모두 “페미니즘이 연애 상대를 고르는 주요 기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연애라는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 가능한 폭력의 문제로부터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 했다. 남성들의 경우 페미니즘을 통해 ‘맨박스’(사회적으로 강요되는 남성성)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특히 이들은 페미니즘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고도 했다.
“스토킹 경험 뒤 애인과 안전하게 이별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사람을 만날 때 주위 평을 많이 듣고 평소 행실이 어땠는지를 예민하게 보는 것 같다. 파트너를 선택하는 기준이 내 선호 같은 게 아니라 내 생명이 됐다. 남성들은 그런 걱정을 상대적으로 안 하니까 부럽기도 했다.”(서유경)
“페미니즘은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연애를 보장하는 안전망이에요.”(서희선)
“이전 연애에서는 (여자친구한테) 감정표현을 잘 안 했어요, 좋은 이야기도 나쁜 이야기도. 페미니즘을 공부한 뒤 나도 나를 이해하고 우리 관계는 어떤지 많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니까 그 관계가 깊어지는 느낌도 들고.”(이성영)
페미니즘을 핵심 DNA로 하는 20대 여성들의 또 다른 연애 담론은 ‘탈연애’다. 남녀가 만나 역할놀이 하듯 연애하는 기성 연애에 종속되지 않는 탈연애는 연애 자체를 거부하는 비연애나 반(反)연애와는 다르다.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남성과 헤어진 경험을 듣기 위해 만난 김소리(29·가명)씨는 “그사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버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 애인이 ‘네 덕분에 많이 배웠다. 왜 여성이 사회적 약자인지 알게 됐다’고 하는 거예요. 그를 만나면서 이 사람이 노력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왜 아무도 잘못됐다고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그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은 뭘 한 걸까. 그래서 피해 보는 건 대체 누군가. 나를 거쳐간 놈들은 그래도 쓸 만한 놈으로 조금은 고쳐놔야겠다, 그래야 다음 여자가 덜 힘들다, 그게 제 나름의 연애 신조예요.”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공동기획: 김창인·전소현·강남규·김태형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유튜브 채널에서 1990년대생 커플의 ‘평등한’ 연애를 다룬 영상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검색은 사랑, 구독은 응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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