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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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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과 이아무개의 DNA

2015년 DNA로 사망 확인한 전 세모그룹 회장,

과거 속옷 DNA 분석으로 확인된 화성연쇄살인범
등록 2019-09-28 15:31 수정 2020-05-03 04:29
1987년 1월 경기도 화성 황계리에서 일어난 5차 화성연쇄살인사건 현장을 경찰이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1987년 1월 경기도 화성 황계리에서 일어난 5차 화성연쇄살인사건 현장을 경찰이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남 순천의 한 매실밭에서 수습된 변사체에서 유병언의 디엔에이(DNA)를 처음 확인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후 어머니께 전화 걸어 말씀드렸는데 ‘거짓말 말라’며 끊으셨다.”

임시근 성균관대 바이오융합과학기술원 교수는 2015년 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수사 국면에서 DNA 분석으로 신원을 확인했던 당시 그 사실을 ‘가족조차 믿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역시나 유병언의 죽음을 믿지 않았던 기자는 얼른 노트에 임 교수의 말을 받아적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유전자과에서 신원확인정보관리실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최근 대학으로 소속을 옮겼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는 신뢰도

‘유병언 소동’ 이후 5년이 지나 이 노트를 꺼내 다시 읽었던 건 DNA 분석으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특정되면서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9월19일 브리핑을 열어 용의자 이아무개(56)씨의 DNA가 화성 사건 중 3차례(5·7·9차) 사건의 증거물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한다고 밝혔다. 사상 최악의 장기 미제사건으로 꼽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5년 사이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10차례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이다.

이번에 DNA 분석을 맡았던 강필원 국과수 법유전자과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씨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과 일치할 확률을 묻는 질문에 “확률이 너무 높아서 이론적으로 봤을 때 지구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훨씬 그 이상의 신뢰도를 지니고 있다”고 답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이씨가 범인일 확률은 99% 넘는다고 입을 모았다.

여론도 이번엔 경찰 당국의 발표를 믿는 분위기다.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 일부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의 검찰 수사 논란이 진행 중인 이 시기에 장기 미제사건의 용의자가 특정된 것은 당국의 ‘물타기’가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지만 DNA 분석 결과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유병언의 DNA와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의 DNA는 어떻게 다를까? 왜 그때는 믿지 않았고, 지금은 믿는 것일까? DNA 분석 과정만 놓고 보면 큰 차이는 없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이씨는 1994년 충북 청주 처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부산교도소에 수감됐다. 2010년 제정된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에 따라 검찰은 이씨의 DNA를 채취해 데이터베이스(DB)에 저장하고 있었다. DNA법은 살인과 강도, 강간 등 11개 강력범죄자의 DNA를 DB에 저장하도록 정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 7월 국과수에 화성 사건으로 희생된 9번째 피해자의 거들을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이 거들에서 검출된 DNA와 DB를 대조한 결과 이씨의 DNA와 일치함을 확인했다. 잇따라 5번째, 7번째 사건의 증거물에서도 이씨의 DNA가 검출되면서 경찰은 이씨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했다.

2014년 5월11일 검찰은 소환조사 했던 유 전 회장의 친형 유병일씨에게서 DNA를 채취했다. 수사 당국은 전남 순천 송치재 별장에서 수집한 증거물(소변 등), 경기도 안성 구원파 숙소에서 압수한 칫솔에서 채취한 DNA를 유병일씨 것과 비교 분석해 유 전 회장의 것으로 판단했다. 수사 당국은 이를 DNA DB에 저장했다. 경찰은 그해 6월12일 순천의 한 매실밭에서 발견한 변사체 조직 중 일부를 떼어 국과수에 신원 확인을 요청했다. 국과수는 변사체의 DNA가 DB에 저장했던 유 전 회장의 것과 일치함을 확인했다. 수사 당국은 추후 검찰에 소환된 유 전 회장 아들의 DNA를 채취해 확인하면서 변사체가 유 전 회장이라고 다시 한번 결론 내렸다.

화성 사건에서 억울한 죽음 없었을지도

이 둘의 DNA 분석이 과학적으로 잘못됐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지만 DNA 분석 결과만으로 매실밭 주검이 유 전 회장이고, 이씨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국과수의 DNA 분석으로도 증거물의 진위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 전 회장의 측근이 유 전 회장의 숨겨진 형제의 소변과 칫솔 등을 순천 별장과 안성 숙소에 미리 가져다놓고, 그의 주검을 순천 매실밭에 갖다 놨다면 유 전 회장은 지금 어딘가에 살아서 이 기사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임 교수는 과 한 통화에서 “누군가 일부러 DNA를 묻혀서 현장에 떨어뜨려놓지 않는 이상 DNA 분석 결과는 의심할 여지 없는 강력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누군가 이씨의 DNA를 채취해 연쇄살인사건 현장 증거물에 묻혔다면 이씨는 해당 범죄의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증거 조작은 강력범죄 현장에서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수사 과정에서 끝까지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2013년 9월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주부 이아무개(39)씨가 피살된 사건 현장에서 담배꽁초 두 개가 발견돼 경찰은 DNA 분석을 의뢰했다. 경찰은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2주 동안 담배꽁초의 주인을 찾기 위해 수사력을 쏟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담배꽁초는 범인이었던 이씨 남편이 범행 직전 아파트 밖에서 주웠고, 일부러 사건 현장에 떨어뜨린 것으로 확인됐다.

“DNA 분석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아주 적은 양의 증거로도 분석할 수 있는 민감도는 증가하고, 분석에 걸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임 교수는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 며칠씩 걸리던 유전자 분석을 현재는 8시간 이내로 끝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DNA 분석 기술은 앞으로도 범죄 수사에서 중요한 도구로 활용될 것이다. 범인을 특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지만 역으로 범인이 아닌 사람을 수사선상에서 제외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경찰은 2만 명 넘는 시민을 수사 대상에 올리고 3천 명에 가까운 용의자를 지목했는데 억울하게 수사받던 시민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재 수준의 DNA 분석이 가능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던 2차 피해였다.

DNA로 무죄 벗겨주는 단체도

미국에선 억울하게 범죄 혐의를 받고 형을 선고받은 재소자의 사건 증거 DNA를 분석해 누명을 벗겨주는 단체 ‘이노센스(무죄) 프로젝트’의 활동도 주목받고 있다. 1989년 처음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는 현재까지 367명의 무죄를 밝혔는데 이들이 억울하게 형을 산 기간은 총 5천 년에 이른다. 21명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가까스로 억울함을 벗었다. 367명 중 69%가 잘못된 증언 때문에 누명을 쓰게 된 것으로 분석됐다. 아직 한국에선 DNA 분석으로 누명을 벗긴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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