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정말 숨졌을까. 그의 아들이 전한 사망 소식은 과연 믿을 만한 걸까. 21년 동안 외국으로 도망 다니다 6월22일 국내로 압송된 정 전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씨는 “아버지가 지난해 12월1일 에콰도르에서 숨졌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그는 물증도 제시했다. 에콰도르 당국이 발급한 사망증명서와 유골함, 키르기스스탄 국적의 위조 여권 등이다. 사망증명서에는 정 전 회장이 에콰도르의 한 병원에서 신부전증으로 숨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검찰은 전했다. 정씨는 정 전 회장이 2015년쯤부터 건강이 나빠졌다고 설명했다.
사망 확인되면 체납액 소멸검찰은 일단 정씨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정씨는 검찰이 자신을 추적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붙잡혔다. 검찰 추적에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한 상태였다. 그런 정씨가 지녔던 소지품이 조작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언젠가 체포될 것에 대비해 아버지 사망증명서를 조작해서 갖고 다닌 것으로 의심하기는 어렵다. 검찰 관계자는 “정씨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에콰도르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캐나다로 가려다 경유지인 파나마에서 붙잡혔다. 만약 정씨가 검찰이 추적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평범한 여행 경로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정 전 회장의 생사 여부에 대한 최종 결론은 내리지 않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정 전 회장의 사망설이) 의문의 여지 없이 확실하게 확인될 때까지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이 이처럼 신중한 이유는 무려 2225억원에 이르는 그의 국세 체납액 때문이다. 체납된 세금은 자식에게 상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것으로 최종 확인되면 이 체납액은 그대로 소멸된다.
물론 정 전 회장의 재산을 찾으면 이 돈을 추징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인을 붙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재산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다. 세무 당국은 일단 정 전 회장의 재산을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했다. 6월26일 김현준 국세청장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정 전 회장의 은닉재산을 철저하게 찾겠다고 말했다. 정 전 회장과 그의 아들 4형제의 세금 체납액은 3200억원이 넘는다. 검찰 관계자는 “정 전 회장이 자신과 아들들 명의로 재산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은닉재산을 찾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정 전 회장은 ‘정경유착’의 상징적 인물이다. 기업인이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에게 뇌물을 주고 그 대가로 사업상 이득을 받는 커넥션은 한국형 압축성장의 폐단이었다. 정 전 회장은 그 정점에 있었다. 말단 세무공무원에서 재계 14위의 대기업 총수로 ‘자수성가’한 원천은 뇌물이다. “정태수의 돈은 뒤탈이 없다” “그의 입은 자물통이다”라는 말들은 그의 노회함을 상징한다. 그는 ‘무거운 입’ 덕택에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 사건(일명 ‘수서 비리’)으로 구속 기소됐을 때도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불러온 한보철강 부도의 여파는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정·관계 로비로 5조원에 이르는 특혜대출을 받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부도를 맞았다. 혼자 몰락하지는 않았다. 1997년 4월7일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국회 한보청문회에서 정 전 회장은 당시 여야 유력 정치인 3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맹형규 의원의 질의가 계기가 됐다. 맹 의원은 “김덕룡 의원에게 돈을 준 사실이 있나? 없죠?”라며 김 의원을 ‘실드 치는’(보호막 치는) 질문을 던졌다. YS계 좌장인 김 의원은 여당의 막강한 실세였다.
그런데 이전까지 “모른다”고 잡아떼던 정 전 회장은 태도를 바꿔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민련 김용환 의원, 새정치국민회의 김상현 의원에게도 돈을 줬다”고 묻지 않은 의원들의 이름까지 말했다. 이들은 여야 3당의 실세 중 실세였다. 청문회장은 발칵 뒤집혔다.
한보철강 부도로 이미 구속된 상태였던 정 전 회장은 그날 밤 검찰에 불려갔다. 그는 33명의 정치인 명단을 순순히 불었다.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였다. 그는 “국회의원들은 칼만 안 들었지 다 강도다. 나는 국회의원에게 뜯기기만 했다”는 푸념도 쏟아냈다. 검찰에 전 재산을 압류당하고 3남(정보근)까지 구속됐는데도 아무도 손을 써주지 않는 정치권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던 셈이다. 그는 다음날 청문회에서는 다시 입을 닫았다. 의원들의 집요한 추궁에 “계속 (질문)해보세요” “(로비) 자금에 대해서는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뭘 알겠습니까” 등의 조롱도 서슴지 않았다. 정 전 회장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2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정태수 리스트’에 올랐던 정치인들은 모두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이들 중 5명만 기소됐고 홍인길·권노갑 의원은 형집행정지로 곧 풀려났다.
정 전 회장은 이후 재기를 시도했다. 그는 2004년 한보철강 매각 예비입찰에 응찰했다가 떨어졌다. 이듬해에는 3남 보근씨와 함께 해외 유전 개발을 추진했으나 세금 체납으로 출국 금지를 당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됐다. 그는 재기를 위해 ‘명당자리’를 찾아다녔다. 2003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운명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서울 가회동 집에 전월세로 입주했다. 정 명예회장이 청운동 집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 물려준 뒤 구입한 집이었다. 일제강점기 최대 갑부인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이 살았던 곳이기도 했다.
당시 전세금만 10억원을 웃도는 집이었기 때문에 정 전 회장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한보철강 부도에 따른 6조원의 부채를 지고 세금 1500억원을 체납한 상태였다. 정 전 회장은 사업상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풍수지리나 점 등 미신적 요소에 크게 의존했다. 한보가 한창 잘나가던 때도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의 낡고 허름한 사무실을 고집했다. 이곳이 자신에게 재물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 전 회장은 1978년 자신이 직접 지은 은마아파트가 강남 개발 붐에 편승해 대박을 치면서 사업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정 전 회장은 2006년 또다시 사고를 쳤다.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한 지방대의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2006년 2월 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으나 건강상 이유로 법정 구속하지 않았다. 정 전 회장은 이듬해 일본에서 치료받겠다며 법원에 낸 출국금지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곧바로 출국했다. 그가 향한 곳은 일본이 아닌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였다. 먼저 해외로 도망간 넷째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4남 정한근씨는 1998년 300여억원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해외로 밀항했다.
정씨 부자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에콰도르 등을 떠돌며 도피생활을 했다. 도망자 신세였지만 해외로 빼돌린 재산 덕분에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은 도피생활 11년째인 지난해 8월 검찰에 꼬리를 밟혔다. 정 전 회장의 교비 횡령 사건을 수사했던 손영배 검사가 해외도피사범과 그들의 재산을 추적하는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장으로 취임한 직후였다.
검찰은 앞서 2017년 6월 정씨 부자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는 한 방송사의 보도를 토대로 조사에 착수한 뒤, 2018년 4월 미국에 범죄인인도를 청구했다. 하지만 이들의 소재지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 불발됐다. 대검 국제협력단은 정씨 부자의 주변 인물부터 추적했다. 검찰은 특히 정한근씨 가족에 주목했다. 정씨 가족의 출입국 내역과 여권발급신청서 등을 확인한 결과 가족이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정씨 가족의 추적은 긴밀한 국제 공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검찰은 2018년 9월 캐나다 국경관리국 일본 주재관의 도움으로 정씨가 고교 동창인 류아무개씨 이름으로 캐나다 시민권을 얻은 것을 확인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한국에 살고 있는 류씨는 정작 캐나다에 입국한 사실이 없었다. 또 서류상 류씨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상태였는데 미국 국토안보국에 등록된 류씨의 지문을 정씨의 국내 주민등록상 지문과 대조해보니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일치했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정씨가 류씨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그를 국내로 압송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씨가 2017년 7월 에콰도르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한 검찰은 지난 2월 에콰도르 대법원에 범죄인인도를 청구했다. 하지만 에콰도르 대법원은 두 달 뒤 정씨의 신병 인도를 거부했다.
정한근, 고교 동창 이름으로 신분 세탁그 대신 에콰도르 당국은 정씨의 체류비자 기간이 6월18일 만료돼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대검 국제협력단에 건넸다. 앞서 손 단장을 비롯한 검사들이 에콰도르를 방문해 협조를 요청했던 일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결국 정씨는 경유지인 파나마에서 입국을 거부당했고, 브라질과 두바이 등을 거쳐 6월23일 국내로 압송됐다. 검찰은 정씨 부자의 재산 추적에 나섰다. 이들의 재산도 주인의 운명을 따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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