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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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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 법 철조망을 가르다

당사자들, 약 1년 동안 만든 ‘진주참사방지법’ 국회 전달

응급입원 주체 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로… 보호자 동의 조항 삭제
등록 2019-05-06 11:54 수정 2020-05-03 04:29
‘진주참사방지법’을 만든 주인공들이 4월30일 오후 서울 중구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사무실의 쉼터에서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환갑 파도손 사무총장,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정하 파도손 대표. 류우종 기자

‘진주참사방지법’을 만든 주인공들이 4월30일 오후 서울 중구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사무실의 쉼터에서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환갑 파도손 사무총장,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정하 파도손 대표. 류우종 기자

“정신질환자는 자신과 관련된 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정신건강복지법) 제2조 9항)

‘진주 참사’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정신질환자의 범죄가 잇따르면서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정신질환자 당사자들이 직접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진주참사방지법)을 만들어 4월29일 국회에 전달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격리 요구하는 여론 </font></font>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이하 파도손),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한국정신장애인협회, 수원마음사랑, 안티카, 침묵의 소리 등 여섯 개 정신질환 당사자 단체가 토론 과정에 참여했다. 이들 단체는 지난해 6월1일 ‘정신장애인 당사자 권리선언’을 발표한 뒤 거의 매달 만나 법 개정안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법안 구성을 도왔다.

정신질환자가 직접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을 만든다고 하면 ‘응급입원을 거부하고 자유를 우선시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다. 범죄가 잇따르면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과 혐오가 큰 상황에서 여론이 더욱 강한 격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이 입수한 진주참사방지법안을 보면 이런 편견은 완전히 깨진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보다 응급입원의 주체를 더 명확히 밝히는 등 한국의 정신보건 체계에 대한 깊은 고민과 구체적인 대안을 담았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 제50조 1항은 “정신질환자로 추정되는 사람으로서 자해·타해 위험이 큰 사람을 발견한 사람은 상황이 매우 긴박한 경우 의사와 경찰관의 동의를 받아 정신의료기관에 응급입원을 의뢰할 수 있다”고 정했다.

정신질환 당사자들은 경남 진주에서 참사가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로 지금의 정신건강복지법에서 응급입원 주체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진주참사방지법에선 응급입원 주체를 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로 일원화했다.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실질적 책임자인 자치단체장으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한 것이다.

진주참사방지법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신건강 관련 기관의 다양화와 확충, 정신질환 당사자의 자기결정권과 기본권 보호, 정신질환을 앓았던 사람이 다른 환자를 돕는 ‘동료지원’ 확대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현행법에서 “정신질환자 관리 과정에서 보호의무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제15조 4항 내용은 뺐다. 제철웅 교수는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이 보호의무자에게 동의를 받도록 하는데, 현실에선 보호의무자가 정신질환자와 연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효성이 낮다. 보호의무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제재를 가하지 않아 법조문 자체가 사문화됐다”며 “절차 보조사업으로 동료지원을 확대하는 것과 함께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국가가 책임지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인간다운 삶 명시만 한 현행법</font></font>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은 부당한 탄압으로 희생된 수많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반성 위에 탄생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정신질환자 인권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고, 1995년 정신보건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강제입원 내용이 중심이었던 정신보건법도 인권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16년 9월 헌법재판소에서 정신보건법에 전원 일치로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이후 전부 개정된 지금의 정신건강복지법은 “모든 정신질환자는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지 아니한다”(제2조 2항), “정신질환자에 대해서는 입원 등이 최소화되도록 지역사회 중심의 치료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정신건강증진시설에 자신의 의지에 따른 입원 등이 권장되어야 한다”(5항), “정신질환자는 원칙적으로 자신의 신체와 재산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7항) 등 차별금지와 자기결정권 존중을 명시했다.

이처럼 진일보한 내용이 담겼지만 정신질환 당사자들은 당시 정신건강복지법 시행에 반대했다. 기본이념을 실천할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았서였다. 여전히 법안의 상당 부분은 정신질환자의 강제입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루고 있었다. 파도손 이정하 대표는 “차라리 문제가 많은 정신보건법이 유지됐으면 더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남았다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허울만 그럴듯한 정신건강복지법으로 바뀌면서 개선의 기회를 잃었다”고 했다.

이 대표의 말처럼 정신건강 증진과 정신질환자의 인간다운 삶을 ‘명시’만 한 정신건강복지법만으로 한국 사회는 개선되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율이 가장 높은 국가라는 오명을 13년 동안 유지했다. 매년 정신질환 보건의료 비용은 늘었지만 정신질환자는 줄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신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부족했고,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여론은 정신질환자 격리 강화를 주장했다. 국회에선 정신질환자 격리를 용이하게 하고 기본권을 제안하는 법안 수십 개가 발의됐다. 이정하 대표는 “우리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법이 필요했다”며 진주참사방지법 제출 배경을 밝혔다.

정신질환 당사자들에게서 법안을 건네받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응급입원 시스템에서 현재 구멍이 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법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데 충분히 공감한다. 당사자들이 제안한 법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지만 그대로 발의할지는 조금 더 고민해서 결정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철조망, 그것은 법이다. 질서이다. 규범이며 도덕이며 훈계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억압이다. 겹겹이 철조망을 둘러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철조망을 넘어서려는 사람을 짓밟고 그 쓰러진 얼굴 위에다 침을 뱉는다.”

조영래 변호사는 에서 존재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법을 철조망과 같다고 했다.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근로기준법’은 역설적으로 전태일 열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여전히 많은 법이 약자를 보호하는 척하면서 억압한다. 울타리의 가면을 쓴 ‘철조망’들이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도 그렇다.

“철조망을 넘는 과정은 인간으로 회복되어가는 과정이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그 어떤 법률과 질서와 도덕과 훈계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자신의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이다. 철조망 앞에 결박당하여 의식이 마비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생명력, 인간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에서)

정신장애인들은 철조망을 넘을 수 있을까. 결박을 거부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억압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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