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태아는 하나일까 둘일까.
철학적인 질문이다. 태아가 엄마 몸속에서 자라며 피와 양분을 나눈다는 점에선 하나로 볼 수도 있고, 열 달을 자란 뒤 떨어져나온다는 점에선 둘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험법)은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엄마와 태아는 둘이다. 엄마가 일하다 독성 물질에 노출돼 태아가 피해를 입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산재보험법은 ‘노동자(근로자)’의 피해를 보상하도록 돼 있어서다. 엄마는 노동자가 맞지만 태아는 아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긴다면, 정상이다.
10년 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2009~2010년 제주의료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중 27명이 임신했는데 9명이 유산하고,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낳았다. 2011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연구책임자 백도명) 조사 결과, 간호사들이 업무 중에 생식독성 물질을 다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간호사들은 2012년 1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유산은 산재로 인정받았지만, 선천성 질환아 출산은 인정받지 못했다.
유산은 산재, 선천성 질환은 산재 아님그때 엄마 배 속에 있던 아이는 이제 10살이 됐다. 여전히 심장에 이상이 있어 산소 부족에 시달린다. 엄마 간호사들은 행정소송을 벌였지만 대법원까지 와서 3년째 계류 중이다. 법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최근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간호사들에게 산재 불승인을 한 근로복지공단의 상위 기구인 고용노동부가 산재보험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은 고용노동부가 우송대 산학협력단에 연구용역을 맡겨 2018년 12월10일 받은 ‘자녀 건강 손상에 대한 산재보상 방안’ 보고서(이하 용역보고서)를 입수했다.
이번 연구는 생식독성 유해물질을 직접 다루는 여성노동자와 이들이 출산하는 선천성 질환아의 규모를 처음 추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외국 사례를 참고해 피해자 산재보상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용역보고서는 한국의 16살 이상 40살 이하 가임기 여성노동자 354만575명 중 3%인 10만6669명이 생식독성 유해물질을 다룰 것으로 추정했다(이하 생식독성 취급군).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작업환경 실태조사에서 확인한 사업장별·물질별 취급자 분포 자료와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종합한 결과다. 연구진은 이들과 나머지 97%인 ‘생식독성 비취급군’을 비교했다.
생식독성 취급군은 비취급군보다 선천성 질환아를 낳을 확률이 33% 더 높았다. 생식독성 취급군에서 매년 1만2239명이 태어났는데 이 중 선천성 질환아는 170명이었다(1천 명당 13.9명꼴). 생식독성 비취급군에서 매년 39만4004명이 태어났는데 이 중 선천성 질환아는 4104명(1천 명당 10.4명꼴)이었다. 자연적인(생식독성 비취급군) 선천성 질환아 출산율을 고려하면, 매년 생식독성 취급군에서 태어나는 170명의 선천성 질환아 중 42명은 사업장의 유해물질 탓에 질환이 생긴 아이들이다.
이 피해 규모는 최소 예측치다. 용역보고서 연구책임자인 이현주 우송대 간호학과 교수는 “연구 한계상 위험군 규모가 과소 추정됐다”고 했다. 2세 질환을 일으키는 위험요인 중 물리적 인자(방사선 등), 생물학적 인자(바이러스 등), 사회심리적 인자(교대근무 등) 등은 이번 연구에서 모두 빠져 있다. 화학적 인자 중에서도 정부에서 공인한 일부 생식독성 유해물질만 다룬다.
시중에는 정부가 아예 유해성을 확인조차 못한 화학물질이 훨씬 많다. 환경부 등이 1월31일 발표한 ‘화학물질·화학제품 관리 강화 대책’에 따르면 현재 화학물질 1만2천 종 중 7429종은 “독성 정보가 없거나 부족해 위험성 확인 없이 유통”되고 있다. 실제 태아 형성 과정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모두 고려하면 위험군 규모가 훨씬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가임기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면서 선천성 질환아 출산과 유산, 불임도 빠르게 늘고 있다. 신생아 1만 명당 선천성 질환아 출산율은 2008년 336.4명에서 2014년 563.6명으로 67% 늘었다. 미숙아 출산율은 2007년 5.1%에서 2016년 7.2%로 늘었다. 유산은 2006년 5만1천 명에서 2015년 7만2천 명으로 41% 늘었다.
용역보고서는 2세 질환의 산재 인정이 필요한 이유를 헌법에서 찾고 있다. 헌법 제36조 2항은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밝힌다. 용역보고서는 이 문구를 “재생산 과정 없이 공동체가 존속할 수 없으므로 임신, 출산, 양육에 필요한 보호를 개인에게 전가하지 않고 공공영역에서 마련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20대 국회 통과할지는 미지수용역보고서는 선천성 질환아를 산재보험법 보상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산재 적용 대상을 기존 ‘근로자’에서 ‘일하는 사람과 일체를 이루었던 자녀’까지 확대하는 산재보험법 전부개정안이나 별도의 특별법 제정이 검토 대상에 올랐다.
고용노동부는 3월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보고한 주요 업무 추진 계획에서 ‘산재보험 사회안전망 기능 강화’ 방안 중 하나로 “임신 중 유해요인 노출로 인한 태아의 건강 손상 산재보상 방안 마련”을 포함시키며 법 개정 의지를 보였다.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용역보고서 권고안을 바탕으로 3월28일 산재보험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2세 질환과 관련된 부분을 특례 조항으로 신설했다. 개정안은 임신한 노동자의 자녀가 업무상 재해로 △신생아(출생 후 28일 이내) 상태에서 사망한 경우 △미숙아로 태어난 경우 △선천성 이상아로 태어난 경우 자녀에게 요양급여, 장해급여, 간병급여, 직업재활급여 등을 주고 그 부모에게 휴업급여를 주도록 했다. 보험급여는 최저 보상 기준금액으로 지급한다. 이용득 의원은 “개정안은 산재보험법의 사각지대를 해소해 산재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데 의의가 있다”며 “산업안전 분야에서 모성에 대한 특별한 보호조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다만 이번 개정안이 1년2개월가량 임기가 남은 20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세 질환을 산재로 인정하는 내용이 담긴 법 개정안은 벌써 여러 차례 발의됐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2016년 11월17일), 이정미 정의당 의원(2018년 4월27일),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2018년 5월3일), 김정재 자유한국당 의원(2018년 5월31일)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법안들이다. 모두 국회 계류 중이다.
2세 질환이 산재로 인정될 경우 여성노동자들의 작업환경도 바뀔 가능성이 크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윤진하 연세대 의대 교수는 “연간 42명의 선천성 질환아 추가 발생을 막으려면 생식독성 유해물질에 노출되는 가임기 여성노동자 10만6천 명의 작업환경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용자는 생식독성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가임기 여성이 직접 다루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윤 교수는 “작업환경을 바꾸면 선천성 질환아 출산뿐 아니라 유산과 불임도 동시에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가임기 여성 고용 배제 우려도”다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여성노동자가 차별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현주 교수는 “사용자들이 가임기 여성을 뽑지 않거나 해고하는 등 사업장에서 배제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우려도 있다”며 “사업장을 안전하게 바꾸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로 가는 산재보험법
“산재 아님” 헌법 불합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4월1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임신 중 여성노동자 업무에 기인한 태아 건강손상 산업재해 인정을 위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할 예정이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제주의료원에서 일하다 유산·선천성 질환아 출산 등 피해를 입은 간호사들의 산재인정 싸움을 도우며 10년째 함께해왔다.
위헌법률심판제청은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의 전제가 되는 법률이 위헌적 요소가 있을 때, 이 법률을 헌법재판소로 보내 판단을 구하는 과정이다. 공공운수노조는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태아 건강 손상을 산재로 볼 수 없다는 2016년 서울고등법원의 해석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문제제기했다. 또 업무상 재해를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근로자의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으로 규정한 산재보험법 제5조 제1호도 규정이 불확정하다고 주장했다.
위 판결과 법 조항이 헌법 제10조 불가침 기본적 인권 보장 국가 의무, 제34조 제1항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제2항 국가의 사회보장의무, 제6항 재해 예방 및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의무, 제11조 평등원칙 내지 평등권에 위반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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