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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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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 말해도 괜찮아

스트레스 토로할 마지막 창구 막히지 않도록

청심국제고 학생들 ‘자해 인식개선 캠페인’ 나서
등록 2019-02-16 16:09 수정 2020-05-03 04:29
2월8일 낮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설치된 ‘청소년 자해 인식개선 캠페인’ 손그림판 앞에서 청심국제고 3학년 국제반 서유진(왼쪽부터), 3학년 국내반 김규리, 청심국제고 학부모 권혁남·이은정씨가 사진을 찍고 있다.

2월8일 낮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설치된 ‘청소년 자해 인식개선 캠페인’ 손그림판 앞에서 청심국제고 3학년 국제반 서유진(왼쪽부터), 3학년 국내반 김규리, 청심국제고 학부모 권혁남·이은정씨가 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 10℃였던 2월8일 낮, 옷깃을 한껏 여민 채 광화문 교보문고 앞을 지나던 시민들이 손 모양의 대형 그림판 앞에서 가던 길을 잠시 멈췄다. 손바닥에는 큼지막하게 “자해, 이제는 말할 때!”라고 쓰여 있었다. 시민들은 ‘손목긋기’(리스트컷) 상처처럼 빨강(자해)·파랑(우울증)·검정(자살 시도) 줄이 그어진 손목에 반창고 모양 스티커를 붙여준 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민 이상훈(목사)씨는 “우리 아이들이 육체적 자해만큼이나 스스로를 ‘못난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 자해 문제도 심각한 것 같아 어른으로서 늘 미안한 마음”이라며 반창고를 꾹꾹 눌러 붙였다.

“치료보다 소통이 먼저다”

청심국제고 재학생들이 ‘청소년 자해 인식개선 캠페인’(Teens Speak Up! Let’s Talk: Self-harm)의 하나로 준비한 그림판이었다. 비영리 민간단체 멘탈헬스코리아(MHK)의 ‘청소년 피어스페셜리스트(동료상담가)’ 과정에 참여하는 학생들인데, 상당수는 예비 고3이다. 살 떨리는 최상위권 입시 경쟁의 와중에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에도 기록하지 못하는 외부 활동을 위해 빠듯한 시간을 쪼갠 학생들은 그만큼 절박함을 담아 ‘대한민국 청소년 정신건강을 위한 선언문’을 외쳤다.

“1. 자해는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2. 자해는 대체하고, 줄이고, 극복할 수 있다. 3. 사회가 자해를 제대로 알게 한다. 4. 자해를 이해하고 편견을 해소하려는 태도를 갖는다. 5. 치료보다 소통이 먼저다. 6. 과민반응은 금물, 다그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7. 자해는 자살의 전 단계가 아니다. 8. 무성의한 대처가 아닌, 전문적인 상담과 치료가 보급되어야 한다. 9. 사후 대처에 그치지 않고, 조기 예방을 위해 노력한다. 10. 청소년으로서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한 사회 및 정책의 변화를 촉구하고 연대한다.”

청심국제고 동료상담가 학생들은 “자살은 10년째 한국 청소년들의 사망 원인 1위이며, 한국 중고생 중 최소 7만여 명이 자해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진정 청소년을 위한 (정신건강) 대책은 없다”며 “조기 예방과 개입에 대한 정책과 예산을 늘리지 않으면서 사고가 터진 뒤 수습하기에만 급급한 현재의 상황에서는 상처받는 청소년만 더욱 늘어갈 것”이라고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병원보다 먼 부모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청심국제고는 학년별 학생 수가 100여 명이다. 작은 학교에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다보니 경쟁도 치열하다. 3월부터 고3이 되는 국제반 서유진 학생이 “기숙사 같은 층에서 내가 제일 많이 잔다”며 일과를 소개했는데, 중간에 더러 쉬기도 한다지만 공식 학습 일정이 하루 17시간30분에 이르렀다. 서유진 학생이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9시부터 수업을 들어요.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친 뒤 밤 9시에 기숙사로 돌아와요. 기숙사에서 다시 공부하다가 ‘12시 땡’ 하면 잠자리에 드는데, 친구들이 ‘12시밖에 안 됐는데 잔다’고 신기해해요”라고 말할 정도로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다.

한국의 많은 학부모에게는 ‘신화’ 같은 믿음이 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열심히 하면 ‘마음이 건강하니까 공부도 잘한다’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린다. 정작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최용석 멘탈헬스코리아 대표는 “국제고, 영재고 같은 학교 아이들 중 특히 고1 때 불안장애를 호소하는 아이가 많다. 대부분 중학교 때 전교 1등이었는데 고등학교에 가보니 천재 같은 아이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 분위기가 워낙 경쟁적이다보니 약점을 드러낼까봐 힘들다는 말도 못한다”고 설명했다. 청심국제고 3학년 국내반 김규리 학생은 “공부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공부만 하다보니 스트레스를 쌓기만 하고 표출하지 못한다”고 했다. 더욱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 중에는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려고 힘든 걸 참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님은 그걸 모르고 ‘우리 애는 괜찮다’고 맘을 놓아버린다”고 덧붙였다.

동료상담가 역할을 하는 청심국제고 학생들은 ‘심리적 딜레마’에 빠져 있는 한국 청소년들의 현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기댈 데는 부모님밖에 없어요. 고등학생만 돼도 다들 자기 성적 챙기느라 친구 얘기를 들어주기도 힘들어요. 부모님이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하는 순간 파멸이에요.”(김규리) “힘들어하는 친구를 (정신)병원에 가게 하는 것보다, 그 친구가 부모님께 힘든 걸 얘기하도록 만드는 게 더 어려워요. 제가 알기론 주변에 부모님한테 (심리적 고통을) 말할 용기를 내는 친구가 없고, 힘들게 말해도 부모님이 오히려 ‘네가 왜 정신과를 가냐, 너는 아무 문제 없다’고 하셔서 더 상처받는 경우도 있어요.”(서유진) 털어놓을 사람은 부모밖에 없는데, 정작 부모한테는 털어놓을 수 없는, 말 그대로 딜레마다. 캠페인에 동행한 청심국제고 학부모 권혁남씨는 “공부 잘하는 아이도 너무 많고 경쟁도 너무 심하다”며 “부모가 가정에서 아무리 잘해줘도 입시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아이들에게 행복은 없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캠페인 보고 말할 용기 내주길

김규리 학생은 중학교 시절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뜯거나 하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달랬다. “가족 간에 갈등이 심했는데 저는 ‘착한 아이’라 눈치를 엄청 봤어요. 여기에 고교 입시 스트레스도 있었고,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중2 시기라 많이 힘들었어요.” 김규리 학생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가족들이 왜 불화하는지 알고 싶어서, 심리학 관련 논문이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심리 안정에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은 대학에서 심리학이나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바로 옆 친구들은 김규리 학생이 도와주고 싶은 1순위다. 피어스페셜리스트 프로그램에 자원한 이유다.

외국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인 서유진 학생은 청소년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 편견, 그리고 정신건강은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정신건강 문제를 털어놓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친구들에게 “나한테는 말해도 괜찮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서 풀어보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캠페인에 나섰다. 혹시 자해하는 친구가 있다면, 캠페인을 보고 “말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내주길 바랐다.

청심국제고 동료상담가 학생들은 자해 캠페인에 이어, 여름방학 때는 청소년 500명이 참가하는 국회 앞 캠페인도 계획하고 있다. 서유진 학생은 “1년에 평균 한국 청소년 500명이 자살하는데, 국회의원들께 500명이 얼마나 많은 수인지 보여주고 청소년 정신건강 정책 개선을 촉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

동료상담가의 활약


불안 나누니 위로가 찾아왔다


2월10일 낮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카이스트경영대학원에서 카이스트 장석환 박사(왼쪽 셋째)와 청심국제고 피어스페셜리스트(동료상담가) 학생들이 ‘또래상담’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정윤 기자

2월10일 낮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카이스트경영대학원에서 카이스트 장석환 박사(왼쪽 셋째)와 청심국제고 피어스페셜리스트(동료상담가) 학생들이 ‘또래상담’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정윤 기자


“밖에서는 ‘카이스트 박사’라고 하면 대단하게 보는데….”
지난 2월10일 낮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카이스트경영대학원에서 카이스트 박사 장석환씨가 청심국제고 ‘피어스페셜리스트’(동료상담가) 학생들에게 ‘또래상담’ 경험을 나누기 시작했다. 카이스트도 청심국제고도 ‘고속도로 인생’을 달리는 행복한 인재만 모여 있을 것 같지만, ‘피어 프레셔’(동료 압박)로 오히려 불행한 학생도 많다.
장 박사 역시 후자였다. 서울 유명 사립대 공대에서 A+를 받으며 ‘과톱’(과수석)을 다투다 카이스트 대학원에 입학했다. 카이스트의 ‘날고 기는 수재’들과 함께 치른 첫 시험, 그는 ‘50명 중 45등’을 한 뒤 말 그대로 ‘멘붕’(멘털 붕괴)이 왔다. “현실을 못 받아들여서 몇 날 며칠을 울었던 것 같아요.” 첫 시험 이후에도 ‘날고 기는 동기’들과 자신을 비교할 상황은 계속됐다. 연구가 하고 싶어서 카이스트에 왔는데, 연구 주제를 찾기가 어려웠다. 연구 주제조차 못 찾고 있을 때, 앞서가는 동기들은 벌써 논문을 쓰고 연구 성과를 내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분발해야 하는데, 조바심이 생기니 더 연구에 집중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불안한 마음에 ‘연구를 그만둬야 하나’ 싶었지만 ‘카이스트 다니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님한테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었다.
장 박사는 2013년부터 카이스트 교내 상담센터에서 2년여간 상담을 받았다. 다행히 상담 결과가 좋았다. 드물게 빠른 속도로 부정적 감정을 극복했다. 카이스트 입학 2년 만에 연구 주제를 찾으면서 학교생활도 안정됐다. 2015년부터는 8주간 또래상담 교육을 받았고, 동료상담가로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기와 후배들을 돕고 있다. 상담에 대한 편견 탓에 상담을 주저하던 카이스트 학생들이 몰라보게 밝아진 장 박사를 보면서 상담센터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이날은 수강생인 청심국제고 학생들의 생애주기에 맞춘 ‘눈높이 강의’도 이뤄졌다. 장 박사는 스스럼없이 청소년 시절에 겪은 심리적 고통을 나눴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셨고, 결국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틀 전에 이혼하셨어요. 중3 때부터 공부로 힘든 가정사를 잊어보려 했는데, 목표만큼 공부가 안되니까 괴로움이 있었죠. 원하던 대학을 못 가서 재수 삼수 끝에 대학에 입학했고, 어렵사리 카이스트에 입학한 뒤에도 힘들었어요.”
롤모델 같은 인생 선배의 솔직한 고백에 청심국제고 학생들도 내면의 불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막상 하면 잘하는데, 발표 1분 전까지도 ‘관중석에나 앉아 있을걸’ 걱정하는 편이에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엄청 열심히 준비해놓고도 실전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돼요.” 장 박사는 “같은 경험이 반복된다고 고통이 무뎌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경험만 반복할 게 아니라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미래에 대한 걱정이 큰 시기라는 걸 알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의 불안과 걱정은 인생에서 없어도 될 부분이었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고 특히 남과 비교하지도 말고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위로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동료상담가 역할을 하고 싶은 학생들이니만큼 장 박사에게 ‘또래상담’에 관한 조언도 구했다.
“친구들이 힘들다고 말할 때, 도와주고는 싶은데 실제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서유진) “상담의 정의 알아요? 문제 해결이 아니라, 내담자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친구가 고민을 상담해오면 공감하면서 들어주면 돼요.”(장석환)
“친구를 상담할 때,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은가요, 아니면 친구가 상처 안 받게 ‘하얀 거짓말’을 해주는 게 좋은가요?”(김규리) “너무 솔직하게 대답하면 친구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얘기를 안 할 수 있어요. 친구가 원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 공감일 거예요. 자기가 틀렸다는 걸 친구도 알 테니, ‘힘들었겠구나’ 위로해주세요.”(장석환)
“상담사 역할을 어디까지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김규리) “또래상담사로서 역할에 충실하면 돼요. 전문적인 상담은 전문 상담가 교육을 받아야 할 수 있어요. 전문 상담이 필요할 것 같을 땐, 조심스레 상담 치료를 권유해보세요.”(장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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