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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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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원 뜻 외면한 임세원법 논의

국회 발의된 법안들 정신장애인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

의료진 안전·정신질환자 ‘낙인 없는 치료’ 유지 못 담아
등록 2019-01-12 13:39 수정 2020-05-03 04:29
다음 를 읽고 임세원 교수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고르시오.
2018년의 마지막 날이었던 12월31일 오후 5시39분,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진료실에서 임세원 교수는 환자 박아무개(30)씨의 진료를 보고 있었다. 박씨는 사전에 진료 예약 없이 이날 오후 불쑥 찾아와 진료를 신청했다. 진료실에 들어와 흉기를 꺼내든 박씨를 본 임 교수는 간호조무사에게 보안요원 호출을 요청했다. 상급 종합병원인 강북삼성병원은 보안 수준이 높았다. 진료실 내 호출벨과 비상탈출로가 갖춰져 있다. 호출을 요청한 임 교수는 진료실 내 마련된 비상탈출로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끝내 박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렸다. 병원에 배치돼 있었던 보안요원은 거의 1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보안요원은 박씨를 저지했고, 5분 만에 도착한 경찰은 박씨를 체포했다. 임 교수는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두 시간 뒤인 저녁 7시30분께 숨을 거뒀다.
박씨는 2015년 9월23일 조울증으로 해당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20일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가족들은 박씨의 입원비를 지급할 경제적 여력이 안 됐다고 했다. 박씨는 퇴원한 뒤 1년 넘게 병원을 찾지 않다가 2017년 초 병원에 왔다. 그는 특정 약을 처방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임 교수가 거절하자 난동을 부렸다.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진료사본만 떼갔다. 그리고 이듬해 말인 2018년 말 흉기를 들고 병원을 찾아 임 교수를 숨지게 했다.
①진료실 내 호출벨 ②보안요원 ③비상탈출로 ④경찰 ⑤환자에 대한 적절한 치료
1월4일 오전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열린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영결식에서 동료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강북삼성병원 제공

1월4일 오전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열린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영결식에서 동료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강북삼성병원 제공

세밑까지 환자를 돌보다 유명을 달리한 임세원(47) 교수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겁다. 임 교수는 정신질환자의 진료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강한 의사였다. 그는 20년간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관련 논문을 100편 가까이 발표했고, 2011년 개발된 한국형 표준 자살예방 교육프로그램 ‘보고 듣고 말하기’(보듣말)를 개발했다. 한때 우울증을 앓았던 임 교수는 2016년 자신의 우울증 극복 과정을 담은 책 를 쓰기도 했다. 임 교수의 유족은 “평소 고인은 마음의 고통이 있는 모든 분이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정신적 치료와 사회적 지원을 받기를 원했다”고 고인의 평소 뜻을 기렸다.

“사회적 낙인 없이 정신과 치료” 임 교수의 유지

“우리 가족의 자랑이었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의 안전이 지켜지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정신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1월2일 장례식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임 교수의 유족이 요청한 것은 ‘의료진의 안전’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없는 치료’ 두 가지였다.

하지만 임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한국 사회에서 이뤄지는 논의는 온통 병원의 안전·보안 수준을 높이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사실상 정신장애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면서 이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고 있다. 임 교수와 유족의 염원이었던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줄이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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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계는 국회에 발의된 법안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회의원들은 임 교수 사망 뒤 앞다퉈 이른바 ‘임세원법’을 쏟아냈다.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일부개정법률안에는 경찰에 즉시 연락할 수 있는 비상벨 설치, 의료인이 대피할 수 있는 비상문과 비상 공간 설치, 이러한 시설 설치 비용을 보건복지부 예산으로 지원, 의료인 상해 행위시 처벌 수위 강화,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 조항 삭제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번 사건의 본질을 비켜간 것이다.

정신질환자 낙인찍는 ‘임세원법’
지난해 12월31일 오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던 환자가 의사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고가 일어난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한겨레 신소영 기자

지난해 12월31일 오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던 환자가 의사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고가 일어난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한겨레 신소영 기자

의료기관 내 폭행 피의자에 대한 처벌 강화(한국당 윤종필 의원), 보안장비 설치와 보안요원 배치 및 피의자 처벌 강화(한국당 박인숙 의원), 비상벨·비상문·대피 공간 마련 및 안전요원 배치(한국당 윤상현 의원), 진료 환경 안전 실태조사 실시(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 등 의료법 개정안은 대체로 정신질환자를 잠재적인 가해자로 보는 관점에서 만들어졌다.

정신질환자의 복지 증진을 위한 법률인 ‘정신건강 복지법’ 개정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 정춘숙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을 보면 외래 치료 명령 청구시 보호자의 동의 절차 삭제, 정신질환자의 퇴원시 보호자 동의 없이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관할 보건소로 통보 등 정신질환자의 자율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주로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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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원법 논의가 임세원 교수와 유족의 뜻을 반영하지 못하고 되레 정신질환자 낙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사건의 중요한 논의 주체인 정신질환자들이 재발 방지 논의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9일 국회 보건복지위 전체회의 현안 보고는 임세원법 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날 참고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과 복지부 관계자들, 그리고 권준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 신호철 강북삼성병원장,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뿐이었다. 정신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 가족, 정신건강 복지센터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국회는 정신장애인이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겪는 실제적인 어려움을 들어보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국회 논의에서 배제된 ‘정신장애인’

박능후 장관은 현안 보고를 시작하면서 “정신질환자들의 범죄 발생, 폭행 (비율) 자체는 높은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지만 논의는 의사들의 안전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최대집 회장은 “의원급 의료기관 3만여 개, 중소 병원 의료기관 1500여 개 대부분의 진료실에 대피 공간과 대피로, 비상벨이 설치돼 있지 않다”며 안전관리기금을 정부 차원에서 마련해 안전시설을 보완할 것을 주장했다. 의료인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협 회장으로서는 당연한 발언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임세원 교수의 죽음을 안전 관점에서만 접근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날 논의에 참가한 관계자들은 대체로 정신장애인의 의료기관 입원이 어려워진 이후 범죄율이 증가했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2016년 헌법재판소는 정신장애인의 강제구금이 위헌이라고 결정했고, 이는 2017년 정신장애인의 입원 절차를 좀더 엄격하게 하는 정신건강 복지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신건강의학회가 정신건강 복지법 재개정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2017년의 법 개정 이후 정신장애인 입원 환자가 줄어서 범죄율이 높아졌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며 섣부른 법 개정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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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궁극적으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때문이다.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민간 보험에 가입하지도 못하고 여러 불이익이 많다. 이 때문에 빨리 치료할 수 있음에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다.” 권준수 이사장은 국회 현안 보고에서 정신장애인에게 사회적 낙인을 덧씌우지 않는 것이 치료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의료기관의 안전 수준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장애인을 배제하고 편견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편견 탓에 정신장애 치료 놓쳐”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는 정신장애인이라고 드러내면 바로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 우리가 쉽게 정신장애 사실을 밝힐 수 없는 이유다. 장애 사실을 숨기고 사회생활을 하는 분들은 한 달에 한두 번 병원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알코올성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 김아무개(37)씨는 정신장애인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김씨는 “사실상 정신장애인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사회복지시설뿐”이라고 했지만 이들에 대한 서비스를 담당하는 정신건강 복지센터는 전국에 243개소로 턱없이 부족하다. 센터에서 일하는 인력과 예산 지원이 부족해 그나마 있던 사회복지사도 일을 그만두는 실정이다.

서울 시내 한 복지센터에서 3년을 근무하고 최근 그만둔 한 사회복지사는 “병원에서 정신질환자를 내보내고 지역사회에서는 수용해야 하는데, 이 사이에 구멍이 뚫려 있다. 서로 교류가 원활하지 않다보니 관리의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혼자서 70명을 담당하려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노인 정신건강, 자살 상담, 아동 상담까지 하다보면 금방 소진된다. 일을 통해 다시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정신장애인들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끼지만 일을 계속하기 힘든 이유다”라고 했다.

정신장애인 인권단체들은 임세원법 논의에서 배제된 것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이정하 대표는 “임세원 교수의 죽음은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사건이다. 하지만 현재 정신보건 현장에서 치료 환경이나 경제적 지원이 미흡한 상태에서 처벌 강화와 강제 입원만 언급하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폭력으로 다가온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를 제외한 현재의 논의는 명백하게 비민주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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