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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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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1일, 법치일을 기억하라

‘사법농단’ 양승태 전 대법원장,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
등록 2019-01-12 13:19 수정 2020-05-03 04:29
2018년 6월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경기도 성남시 시흥동 자택 인근 공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2018년 6월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경기도 성남시 시흥동 자택 인근 공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소환된 1월11일은 ‘법치일’로 기록될 만하다. 전직 대법원장이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불려나간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도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사법부 수장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의 소명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검찰 소환 자체만으로도 사법부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검찰 수사 지지’서 바뀐 법원 내 분위기 </font></font>

양 전 대법원장의 조사를 끝으로 6개월여 동안 진행된 ‘사법 농단’ 수사는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준 사법 농단 사태는 앞으로 재판을 통해 실체적 진실이 명확하게 규명될 것이다. ‘제 식구’를 재판하는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이번 재판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태도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법관 사회는 지금 치욕과 반성보다 검찰 수사에 대한 원망이 더 팽배한 분위기다. 지난해 6월 사법 농단 관련 문건이 공개됐을 때만 해도 일선 판사들은 판사회의를 통해 “철저한 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검찰 수사를 지지했다. 앞서 대법관 13명 전원이 “재판 거래 의혹은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는 성명을 내고, 일선 법원장과 고등부장 등이 검찰 수사에 반대하는 의견을 낸 것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도 검찰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이번 수사에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받았던 한 판사가 곤욕을 치른 사실이 최근 알려지면서 판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판사는 검찰 조사에 앞서 출국 금지가 된 사실을 모른 채 지난해 8월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휴가를 가려다 공항에서 출국이 제지됐다고 한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판사는 “해외여행에 들떠 있던 그 판사의 아이들이 공항에서 출국을 제지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판사가 부모로서 느꼈을 자괴감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면 동료로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법원 출신의 한 변호사는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이라면 출국 금지된 것을 미리 통보해도 괜찮다고 본다”고 말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검찰 관계자는 “그런 일은 다른 사건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판사라고 해서 특혜를 줄 수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판사들도 이렇게 당하는데” 말까지</font></font>

판사들이 이번 수사의 대표적인 문제로 지적한 것은 과도한 압수수색과 피의사실 공표 논란이다. 압수수색은 수사 대상자의 범죄 혐의가 발견되면 이를 입증하는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수사에서는 검찰이 혐의를 찾기 위해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주장이다. 다른 혐의를 찾기 위한 압수수색은 별건 수사 논란을 낳는다. 검찰이 ‘재판 거래’ 대상으로 거론된 재판을 진행한 판사들의 전자우편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별건 수사 논란이 불거졌다. 최근 사표를 낸 최인석 울산지법원장은 지난해 10월 법원 내부 게시판에 “법원은 검찰에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법원이 영장 발부에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이지만, 압수수색영장 청구를 남발하는 검찰의 수사 행태를 비판한 글이기도 했다.

피의사실 공표 논란은 압수수색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됐을 때 검찰이 기각 사유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영장 내용을 공개하는 것을 두고 제기된다. 언론이 검찰의 주장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압수수색 대상자의 혐의가 공개된다.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로 무죄 추정 원칙은 깨진다. 판사들은 검찰이 이런 ‘악순환’을 수사 방식으로 활용한다고 의심한다. 일선 지법의 한 판사는 “이번 수사에서 무죄 추정 원칙과 피의자 인권 보호 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지만, 수사 대상이 판사들이라 법원이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으로 판사 100여 명이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판사들이 검찰 수사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뼈저리게 느꼈다는 말도 나온다. 법원 출신의 한 변호사는 “조사를 받았던 판사들 사이에서 ‘판사들도 이렇게 당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곤욕을 치를까’ 하는 말들이 나온다.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가 피의자나 참고인이 진술한 대로 작성되는지 의심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영장 기각률 90%” 검찰의 반박 </font></font>

검찰은 판사들의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반응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수사에서 법원은 압수수색영장 기각률이 90%에 이를 정도로 까다롭게 심사했다. 기각 사유도 ‘대법관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리 없다’는 등 터무니없는 게 많다. 그래놓고 수사팀이 압수수색영장 청구를 남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사법부를 상대로 한 수사이기 때문에 수사팀도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했다. 사법부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떠넘기다시피 한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데 피의사실 공표 등 사소한 문제로 수사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수사를 방해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사법 농단 수사는 사법부가 세 차례나 자체 조사를 벌였으나 국민적 의혹을 전혀 해소하지 못해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에 진상 규명을 ‘의뢰’한 성격이 강하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 법원행정처에 사법 농단 관련 문건 410건을 공개하도록 지시한 뒤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검찰 수사는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문건을 토대로 진행됐을 뿐 아니라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법원이 검찰의 압수수색영장을 대거 기각한 것이 잘못됐다는 게 검찰의 시각이다. 수사팀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서 법원은 수사 대상자에 해당한다. 그런 법원이 압수수색영장 기각으로 수사를 방해해온 것도 모자라 수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 중대 범죄를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font color="#008ABD">글 </font>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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