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2월, 첫 번째 내국인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이 발견된다. 낯선 질병에 대한 공포가 사회를 뒤덮었다. 과학적인 정보가 부족한 시기, 언론과 미디어도 선정적 보도로 일관하며 잘못된 인식을 강화한다. 88 서울올림픽 개최가 임박한 1987년, 국회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을 제정한다. 이른바 에이즈예방법의 탄생이다.
3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는 예방법초기 에이즈예방법에는 거소 임의조사, 강제 격리 등 HIV 감염인의 기본적 권리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조항이 많았다. HIV 감염인을 격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알 수 없는 질병을 묶어두려는 미개한 조처였다. 이제 치료제의 눈부신 발전과 HIV 감염인들의 존재가 알려지고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면서 HIV 감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만약 감염됐다면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이젠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알게 된 지혜를 실현할지 건설적인 계획을 세워 실행하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이즈라는 질병과 HIV 감염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3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의료기관에서 HIV 감염인의 치료·시술·입원을 거부하는 등 의료 차별이 여전히 심각하다. 종업원에게 HIV 검사를 강제하거나, 감염 사실이 알려진 사람에게 퇴사를 종용하는 등 노동권 침해도 심각하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돼야 할 건강할 권리, 일할 권리 등 감염인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차별의 현실은 공고하다.
세계인권선언 채택 70주년이자 ‘세계 에이즈의 날’(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 매년 12월1일) 31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 우리는 에이즈예방법 제19조를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19조(전파매개행위의 금지)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이를 위반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함)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법에 담긴 제19조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 법은 현실에서 예방 조처(콘돔 착용) 없이 성관계를 한 HIV 감염인을 처벌하는 데 쓰인다.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이 조항에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 조항은 HIV 전파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실제 전파가 일어난 행위의 결과를 보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파매개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처벌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조항은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조항으로 처벌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감염 사실을 몰라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조기 검진을 가로막고, 결과적으로 HIV가 공포와 편견을 타고 더욱 전파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은 예방과 관련이 없다. 단지 감염을 범죄시해 사회 밖으로 밀쳐내려 했던 시대가 낳은 비극이다.
6개월 약 복용하면 감염 확률 0%U=U(Undetectable=Untransmittable, (바이러스) 미검출=전파되지 않음) 캠페인이 전 지구를 각성시키고 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기관을 비롯해 97개국의 800개 단체가 잇따라 쓴 U=U 성명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HIV 감염인이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으면 6개월 이내에 HIV가 미검출 수준으로 떨어지고 그 상태가 유지된다. 바이러스 미검출 수준을 유지하는 HIV 감염인과 성접촉으로 HIV에 감염될 확률은 0%다.”
과거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과 비슷한 법제를 만들었던 국가들도 오늘날 이를 완화하거나 폐지하는 추세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도 HIV 감염인들을 이 조항으로 처벌하고 있다. 실제 지난 8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한 HIV 감염인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피고인의 ‘HIV RNA’ 농도가 ‘not detected’ 또는 ‘20 copies/㎖ 미만’이었던 점이 인정되기는 하지만, (중략) 이는 단지 HIV 바이러스가 억제된 상태임을 가리킬 뿐 소멸된 상태를 이르는 것은 아닌 점, 위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감염인의 경우 성관계 등을 통해 HIV 바이러스를 전파할 위험이 사실상 ‘0’에 가까울 정도로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위험이 ‘0’으로 된다고 일반화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는 점….”
97개국 800개 단체가 모두 0이라고 말할 때, 한국의 법원만 0이 아니라고 말한다. 올해 캐나다는 국가적으로 U=U 캠페인에 동참해 ‘전파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0%’라는 내용을 담아 법적 기준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런 국제적 흐름에 역주행하는 한국이 얼마나 후진적 과거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유엔에이즈(UNAIDS)도 공포와 낙인 위주의 정책은 오히려 공중보건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런 환경이 조기 검진과 적절한 치료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HIV의 효과적인 예방을 위해서는 의료 차별을 철폐해야 하며, 취약 그룹이 HIV 검사를 손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은 HIV 감염인이 HIV 전파의 주범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꾸준히 복약해 이미 전파력이 없는 감염인에게 지나친 낙인을 부여하는 것은 예방정책에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거듭 강조하듯, HIV 신규 감염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조기 검진과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HIV 감염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치료받지 않는 상황이야말로 HIV 감염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의학적 평등이 사회적 평등 되길모든 시대를 통틀어 형사처벌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치료제나 예방 조처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HIV 감염인과 비감염인 모두 감염 여부와 관계없이 건강할 권리가 있다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 U=U 시대, HIV 감염인이 콘돔을 써야 하는 이유는 성병 예방, 피임 등 비감염인과 정확히 같은 이유가 되었다. 의학에서의 평등이 사회적 평등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개인 간 합의로 이루어진 성관계를 처벌하는 국가의 통제적 관점과 HIV 감염인이 부도덕하다는, 그야말로 비윤리적인 혐오에 기대어 이 조항이 지속되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이 폐지된 시대는 에이즈라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시대일 것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는 HIV 감염인과 인권활동가들의 연대체로 2016년 발족했다. 감염인이 경험하는 차별에 주목하고, 소수자의 목소리로 인권 담론을 확장하며, 에이즈에 덧씌워진 낙인과 혐오를 지우기 위해 활동한다. 연대의 가치를 담아 공동으로 썼기에 단체명으로 기고한다.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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