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약과 생략, 그리고 상상력.
2018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은 ‘스포츠 정치’가 무엇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1월1일 신년사에서 촉발된 ‘평창올림픽 참가 용의’ 메시지는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남북 고위급 회담(9일), 남북 차관급 실무회담(17일)으로 이어져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북한 선수단 규모 발표까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평창올림픽 종목별 엔트리 마감이 거의 이뤄진 상황에서 튀어나온 북한발 평창올림픽 참가 의향 발표는 상식적으로 통용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토마스 바흐 IOC 회장은 반색을 한다. IOC는 “기꺼이 환영한다. 올림픽 정신의 위대한 발걸음”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호적 반응은 2013년 취임한 바흐 위원장의 북한 공들이기와 관련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절대권력 IOC의 ‘북한 공들이기’</font></font>그러자 당장 나온 얘기가 출전권을 이미 확보했던 피겨스케이팅 페어의 렴대옥-김주식 짝 이야기였다. 둘은 지난해 9월 독일 네벨혼 대회에서 평창올림픽 출전권을 땄다. 하지만 이후 올림픽 출전 의사를 밝히지 않아 출전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IOC는 둘의 복권을 비롯해 북한의 참가 가능 종목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적극 탐색에 나섰고, 실제 출전권이 없는 알파인스키와 크로스컨트리에서도 북한에 출전권을 주려 애쓰고 있다.
올림픽에 자력 진출한 종목도 없고, 엔트리 마감을 지키지 못해 출전권을 놓친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된 배경엔 IOC의 절대권력과 정치가 있다. IOC 헌장 제44조에는 “IOC 집행위원회가 올림픽 참가자 수를 결정한다”고 돼 있다. 언론에서 말하는 ‘와일드카드’는 이 조항에 근거를 둔다. 여기에 평창올림픽 흥행과 바흐 위원장의 야망이 결합돼 만들어진 것이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다.
애초 남북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은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물 건너간 얘기처럼 보였다. 여자 출전 8개국이 결정됐고 대진표가 이미 짜였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을 만들어 나오겠다고 하면 그 자체로 상궤(형식)를 위반한 것이 된다. 그러나 IOC가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준비를 꾸준히 해왔다는 증거가 있다.
지난해 6월 바흐 위원장은 전북 무주 세계태권도대회 기간에 한국을 방문했고, 이때 문재인 대통령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추진하겠다는 얘기를 꺼냈고, 새러 머리(30)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이 북한 선수들의 활약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해 선수들의 역량을 평가하기도 했다. 머리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북한 선수 2~3명은 도움이 될 것이다. 5명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단일팀을 하려 했다면 그때 하지 왜 지금 하느냐”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르네 파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회장도 지난해 4월 강원도 강릉에서 열린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팀 대결을 관전했고, 경기 뒤 선수들과 모두 모여 단체사진을 찍는 등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
올림픽 뉴스를 다루는 의 닉 버틀러 기자는 ‘바흐 위원장이 지금까지의 성공에 감사할 사람은 김정은이다’라는 기사에서 의미심장한 지적을 했다. 그는 기사에서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애초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기획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IOC 처지에선 북한 참가가 평화올림픽을 보증하는 셈이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쪽에서도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선수들이 빠진 상태에서 최고의 흥행 카드를 갖게 됐다는 뜻이다. 버틀러 기자는 “평창올림픽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유엔 사무총장을 노리는 바흐 위원장이 통과해야 할 중요 관문이라는 소문도 있다”고 썼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첫 고위급 회담서 이미 단일팀 논의 </font></font>한국 정부에도 남북 긴장 완화와 남북대화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단일팀은 거부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메가 스포츠 이벤트 유치의 효용성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이미지 실추, 러시아의 ‘국가적인 도핑’과 징계로 인한 굴곡 등 여러 악재가 겹친 평창겨울올림픽을 흥행시키려면 정부도 특별한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 정부 당국자는 “평창올림픽의 유산을 무엇으로 남길 것인가. 이것저것 따져봐도 평화올림픽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물론 북한이 1월1일 갑작스럽게 평창올림픽 참가 의향을 밝히는 바람에 시간적으로 단일팀에 대한 충분한 숙성과 논의의 시간을 갖지 못했고, 그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이 부른 남한 사회 내부의 반발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올림픽을 위해 4년간 고생한 남한팀 선수(23명)가 북한 선수 때문에 공연히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반발이 일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논의가 진행되면서 매체들도 추측성 보도를 하거나 반북 정서에 감정적으로 편승한 기사를 내보냈다. 이 혼란은 냉정하게 평가해 ‘팩트의 부재’가 불러왔다.
남북한 당국은 1월9일 첫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한 대강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발표하지 않았다. 거의 열흘이 지나서야 일부 윤곽을 밝혔다. 남북 협상을 지휘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1월18일 서울 광운대 특강에서 “북한 선수 5~6명이 합류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10명 이상이 사전 연습을 해 여기서 뛰어난 선수를 골라 참여시킬 것이다. IOC도 이 방향으로 양해하겠다고 얘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선수가 남한으로 내려와 합동훈련을 한 뒤 북한 선수를 6명 이내로 선발한다는 것이 현재 정해진 단일팀의 뼈대다.
남북 합의 내용을 진작에 밝혔으면 큰 혼란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 관계자는 “북한이 10명 이상 선수를 넣기 원한다면 무리한 요구여서 심각한 문제가 빚어지겠지만, 6명 이내로 보낸다면 어떻게든 단일팀을 꾸려나갈 수는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단일팀에서 남한 선수들의 피해를 줄이려면 23명의 팀 엔트리를 28~29명으로 늘려야 한다. 그러나 엔트리를 늘리는 것은 남북한 당국이 할 수 없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IOC다. 그래서 IOC가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정부가 남북 합의 사항을 기정사실로 공표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의 합류로 이뤄지는 단일팀에서 남한 선수들은 출전 시간 축소를 감수해야 한다. 가령 북한 선수 5~6명이 추가돼 단일팀의 엔트리가 28~29명으로 늘더라도 각 경기에 나가는 선수는 22명으로 한정된다. 머리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은 “북한 선수가 도움이 되겠지만, 1~3조에 들어올 북한 선수는 없다”고 말했다. 북한 선수들이 경기당 2~3명씩 들어올 경우 4조에 속한 한국 선수들이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자 아이스하키는 23명 정원 가운데 골리(골키퍼) 3명을 뺀 20명의 선수를 1조(5명), 2조(5명), 3조(5명), 4조(5명)로 나눈다. 보통 빠르고 득점력 높은 선수들이 상위 조에 많이 배치된다. 또 체력 소모가 커서 대략 1분마다 조가 통째로 교체된다. 북한 선수들은 머리 감독의 말대로 1~3조보다는 4조(5명)에서 뛸 확률이 높다. 단일팀은 평창올림픽에서 스위스(2월10일), 스웨덴(12일), 일본(14일), 두 차례 순위결정전(18일, 20일) 등 5차례 경기를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경기력 영향 최소화 방안 찾아야</font></font>만약 첫 스위스전 4조(5명)에 북한 선수 3명을 넣으면 남한 선수 3명이 빠지고, 두 번째 스웨덴전 4조(5명)에 북한 선수 2명을 넣으면 남한 선수 2명이 빠지는 식으로 5경기를 하면 4조(5명)의 남한 선수는 25번의 기회에서 12번을 채우게 된다. 1~3조 선수들처럼 5경기에 온전히 출전하지 못하지만, 4조 선수조차 최소 2.5경기에는 나간다는 뜻이다. 머리 감독도 “2~3명의 북한 선수를 추가하는 것은 오케이”라고 말했다.
물론 북한 선수의 합류로 기존 조직력이 영향받을 것이다. 보통 아이스하키 전술 2~3개를 익히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북한 선수 5명을 4조(5명)에 모두 배치해 5번의 경기에 남한팀 4조(5명)와 번갈아 투입하는 방식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과 맞붙는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B조(한국·스위스·스웨덴·일본)에 속한 스위스가 남북 단일팀에 엔트리를 늘려주는 것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왕 단일팀이 만들어졌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머리 감독은 “단일팀을 하려면 되도록 북한 선수들이 빨리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을 늘리자는 것이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충북 진천 선수촌을 남북 단일팀의 연습장이 될 것으로 본다. 단일팀은 2월4일 스웨덴과 평가전, 10일에는 올림픽 첫 경기를 앞두고 있어 팀 정비에 속도를 내야 한다.
단일팀의 성적도 국내 팬들의 관심을 모을 것이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한(22위), 북한(25위)의 세계 순위는 평창올림픽 출전권을 땄을 당시 세계 1~7위였던 다른 나라 7개 팀보다는 떨어진다. 스위스(6위), 스웨덴(5위)과는 0-5 정도로 패한 바 있고, 그나마 해볼 만한 일본(9위)과는 지난해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 0-3으로 졌다. 다만 세계의 모든 카메라가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집중되고, 남북 응원단 등 안방 관중의 기살리기에 힘입어 이변을 기대하는 팬들도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모든 스포츠는 정치적 </font></font>모든 스포츠는 정치적이다. 1970년대 ‘핑퐁 외교’로 미국과 중국이 결국 수교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1987년 크리켓 월드컵으로 오랜 갈등과 반목을 치유해나간 적이 있다. 거꾸로 1969년에는 월드컵 북중미 예선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경기 결과로 인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올림픽이 테러로 물들거나 동서양 진영의 대결장으로 반쪽이 된 적이 있다.
스포츠는 증류수처럼 순수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본산인 대한체육회가 순수하게 스포츠적인 꿈으로는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그것은 남북의 정치적 이해와 IOC의 구상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은 시작부터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이슈로 타올랐다. 평창올림픽은 평화올림픽이라는 레거시(유산)를 남길 것이 확실해 보인다.
김창금 스포츠부 기자 kimck@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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