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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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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아'가 낳고 금융 엘리트가 키웠다

2천 명 넘는 엘리트로 구성된 금융감독원에서 벌어진 채용 비리…

‘모피아’ 출신들 전횡에 내부 자정 기능 없어 비리에 둔감한 게 결국 위기 불러
등록 2017-10-31 17:22 수정 2020-05-03 04:28
국내 400개 금융회사를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이 조직적인 채용비리로 1999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금감원 여의도 본원 모습. 한겨레 신소영 기자

국내 400개 금융회사를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이 조직적인 채용비리로 1999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금감원 여의도 본원 모습. 한겨레 신소영 기자

지난 10월25일 국내 4대 금융지주그룹인 엔에이치(NH)농협금융지주 김용환 회장의 집무실과 자택에 검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금융감독원 채용 비리 수사와 관련된 증거물을 확보하려는 압수수색이었다. 수사관들은 김 회장의 휴대전화와 업무일지 등을 압수하고 개인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복사해갔다.

이 압수수색은 금융계에서 ‘뜻밖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김 회장은 지난 9월 감사원이 적발한 금감원의 채용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았지만, 이때만 해도 별게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금감원의 채용 실무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과거 수출입은행(수은) 행장 시절 자신의 부하 직원이던 김아무개 수은 부행장 아들의 필기시험 합격 여부를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이 금감원 ‘넘버2’인 수석부원장 출신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알아봐줄 수도 있다는 게 금융계 인사들의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김 회장은 단순히 합격 여부를 묻기만 했는데, 금감원 실무책임자가 ‘오버’를 한 것 같다며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검찰이 김 회장을 직접 겨냥한 강제 수사에 나서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특히 압수수색 대상에 김 회장의 자택이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검찰 수사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집을 압수수색하는 영장은 범죄 혐의가 어느 정도 입증되지 않으면 법원에서 잘 발부하지 않는다. 법원 관계자는 “집을 압수수색당하면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까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인권침해 논란이 불거질 수 있기 때문에 범죄 혐의가 웬만큼 소명되지 않으면 자택은 압수수색 대상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 회장에게 아들의 합격 여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진 김 수은 부행장이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행동이 일반적인 부탁 수준을 넘어 대가성이 있는 ‘검은 거래’일 가능성을 검찰이 의심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지인의 아들 합격 여부만 물었다?

김 회장 쪽은 펄쩍 뛴다. 농협금융지주 관계자는 “(검찰이) 채용 비리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해서 (압수수색을) 한 것이지 뭔가 수상해서 한 건 아닐 것이다. 회장 집무실의 압수수색은 2시간50분, 자택은 1시간밖에 안 걸릴 정도로 (검찰이) 설렁설렁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앞서 감사 결과가 나왔을 때 에 “금감원에 채용 청탁을 한 적은 절대 없다. 실무책임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전화한 적도 없다”고 강하게 부인한 바 있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의심할 만한 게 전혀 없으면 압수수색 영장이 왜 발부됐겠나. 검찰은 나오는 대로 수사를 진행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의심은 상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금감원은 2016년 5급 직원 채용 때 필기시험에 탈락한 김 수은 부행장의 아들을 필기전형 합격 인원을 늘려 구제한 뒤 면접에서 높은 점수를 주는 수법으로 최종 합격시켰다. 김 부행장의 아들 대신 억울하게 탈락하는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지간한 ‘빽’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낼 일이다. 감사에서 적발되면 관련된 금감원 직원들은 중징계를 피할 수 없어 금융권 재취업까지 봉쇄된다. 하지만 금감원 실무책임자부터 최종 결재권자까지 누구 하나 제동을 걸지 않았다. 이들이 과연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발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으로 봐야 할까. 거절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다.

감사원은 금감원 채용 실무책임자가 김 회장의 청탁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실무책임자인 이아무개 당시 총무국장과 최종 결재권자인 서태종 수석부원장과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 총무국장은 김 회장이 수석부원장 시절 비서팀장과 감사팀장을 지냈다. 수석부원장 직속의 총무국에 소속된 자리다. 김 회장의 행시(23회) 6년 후배인 서 수석부원장은 과거 금융감독위원회 시절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그는 사석에서 김 회장을 자신의 ‘멘토’로서 존경한다는 말을 가끔 하기도 했다.

김 회장과 김 수은 부행장의 인연도 남다르다. 둘은 김 부행장 아들의 금감원 채용 문제로만 엮이지 않는다. 김 부행장의 딸은 김 회장이 대표로 있는 농협금융지주의 계열사인 농협은행에 다니는데, 공교롭게도 김 회장이 취임한 직후 채용됐다. 2015년 12월에 입사한 그는 올 초 홍콩에 조사역으로 파견을 나갔다. 하지만 홍콩에는 농협은행의 지점이나 사무소가 없다. 입사한 지 채 2년이 안된 직원을 출근할 사무실도 없는 외국에 파견을 보낸 것은 특혜라는 말이 농협은행 안에서 나온다. 이에 대해 농협은행 쪽은 “그 직원이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서 선발됐다. 다른 3년 차 직원도 함께 파견됐다. 특혜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서로 자녀 채용으로 얽힌 사이
최흥식 금감원장이 지난 17일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최흥식 금감원장이 지난 17일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김 회장은 국내 금융계를 장악한 ‘모피아’(현 기획재정부와 마피아의 합성어) 출신답게 금융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사다. 금융위 상임위원과 금감원 수석부원장, 수출입은행장을 거쳐 농협금융지주 회장에 오르는 잘나가는 모피아의 길을 그대로 밟았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첫 금융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공공기관 성격이 강한 농협의 특성 때문에 민관을 아우를 수 있는 현장 경험이 강하게 부각됐다. 임종룡 전 위원장도 농협금융지주 회장 재임 중에 금융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김 회장은 금융위와 금감원이 통합됐던 옛 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을 지내 언론계에도 발이 넓다.

금융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금감원 채용 비리의 원인을 모피아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금융 고위 관료 출신의 금감원장이나 수석부원장들 가운데 일부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정치권 등의 청탁을 들어주는 일이 반복되면서 비리에 둔감한 조직이 됐다는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인사들을 발탁, 승진시키면서 이들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문화가 형성됐다는 진단이 금감원 내부에서 나온다.

앞서 최수현 원장 시절인 2014년 변호사 특채 과정에서 발생한 채용 비리가 대표적이다. 최 전 원장이 행시 동기인 임영호 전 의원 아들을 “잘 챙겨보라”고 지시하자, 실무진은 채용 규정을 바꾸고 성적을 조작해 합격시켰다. 이를 주도한 김수일 당시 부원장 등은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후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됐다. 김 전 부원장은 최근 검찰에 재소환돼 최 전 원장의 개입 여부를 조사받았으나, ‘최 전 원장은 개입하지 않았다’는 수사 초기의 진술을 그대로 반복했다고 한다. 김 전 부원장은 최 전 원장의 총애를 받았던 인사다.

사람만 물갈이해선 안 된다

모피아 출신의 전횡은 이뿐만 아니다. 2004년 금감원은 신입직원 채용에서 ‘외국대학 출신 전형’을 처음 도입했다. 3명이 최종 합격했는데 그중 한 명이 당시 모피아 출신 금감원 고위 간부의 딸이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그 전형은 고위 간부의 딸을 위한 맞춤형 전형이었다. 금융회사를 감독하는 기관에서 굳이 외국대학 출신을 따로 뽑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외국어가 필요한 업무는 통역사를 활용하면 되니까. 그런데도 당시 내부에서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전형은 2008년에 슬그머니 없어졌고, 그 직원은 입사 2년 만에 퇴사했다.

금감원은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은행, 보험, 증권 등 4천여 개 금융회사를 감독하며 ‘금융 검찰’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조직이 하루아침에 ‘적폐’로 내몰렸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상황은 심각하다. 문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공공기관의 채용 실태를 전수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최근의 금감원 채용 비리 관련 언론 보도를 본 뒤 내린 결정이라는 후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곧 있을 금감원 임원 인사에 금융권의 관심이 집중된다. 민간 출신인 최흥식 원장이 고위 간부들을 전원 외부에서 수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탓에 금감원의 모피아에 대한 반감은 어느 때보다 크다. 이번 기회에 금융위 고위 간부를 금감원 수석부원장에 임명하던 관행을 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금감원의 한 국장급 인사는 “금융위가 금감원 예산을 관할하기 때문에 금융위 출신을 수석부원장에 임명해왔는데, 지금은 이 자리가 모피아와 금융계의 ‘부적절한 관계’에 이용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 간부-금감원 수석부원장-금융 민간회사 대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옮기면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커넥션’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 임원급 인사는 “사람만 물갈이한다고 적폐가 청산되는 건 아니다. 시스템을 바꿔서 아예 청탁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이런 비리는 또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감원의 위기를 모피아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2천 명에 이르는 엘리트로 구성된 감독기구가 출범 18년이 지나도록 내부 자정 기능을 갖추지 못한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특히 금감원은 채용과 관련해 이미 두 차례나 감사원의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2008년과 2015년에 채용 규정 위반으로 각각 기관주의 처분을 받았다. 이번 채용 비리는 2015년 감사원의 경고가 있은 지 1년 만에 터진 것이다. 그만큼 조직 구성원들이 비리에 둔감했던 것일까. 2015년 감사 이후에라도 제대로 대책을 세웠다면 지금의 위기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금융계 전반으로 수사 확산 국면

금감원 채용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는 김용환 회장을 겨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금융권은 지금 검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금감원에 이어 우리은행도 고위층 자녀를 특혜 채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검찰 수사가 금융계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 관련 의혹은 국정감사에서 불거졌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국회 정무위 국감에서 지난해 우리은행의 신입사원 채용 추천 리스트를 공개했다. 리스트에는 국정원 직원 자녀부터 금감원 임원, 병원 원장, 대학교수 등 권력기관과 고위층 자녀가 포함됐다. 금감원은 우리은행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곧 검찰에 넘길 예정이다. 대통령의 ‘채용 비리 전수조사’ 지시까지 나온 상황이라 검찰 수사는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계의 고질적인 채용 비리 실태가 제대로 드러날지 주목된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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