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오래전부터 에너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이는 육지와 고립된 섬의 숙명이었다. 석탄·석유 같은 발전 연료를 배로 들여오려 해도 날씨가 궂으면 허사였다. 고민 끝에 제주는 1997년부터 전남 해남에서 연결된 해저 송전망을 통해 전력 수요의 절반가량을 공급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불완전했다. 2006년 4월1일 해저 송전망 고장으로 제주 전역이 2시간30분 동안 정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제주는 에너지를 육지에 의존하는 대신 완전히 자립하는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겨왔다. 다행히 제주에는 바람 같은 자연 자원이 풍부했다. 제주의 포부는 2012년 발표된 ‘카본 프리 아일랜드 제주 2030’에 잘 정리돼 있다. 2030년까지 풍력, 소규모 수력, 태양광, 바이오가스 발전 등 재생에너지만으로 전력 사용량의 100%를 감당하고, 차량도 100% 전기자동차로 대체해 탄소 배출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에너지 자립을 꿈꾸는 제주의 실험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font>
제주공항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기를 30분. ‘동회천마을(새미)’이라 쓰인 큼지막한 표지석이 우뚝 서 있다. 들에 샘이 많아 ‘새미’라 불렸던 동회천마을(제주시 봉개동)은 작은 중산간마을이다. 북쪽으로 한라산과 오름 군락지가 펼쳐진 마을엔 낮은 집들이 서로 의지하듯 모여 있다.
그곳엔 아직 ‘올레’(작은 길)가 남아 있었다. 좁은 골목길엔 전통 돌담과 낮은 시멘트 담벼락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담장 안에는 옛 초가지붕에 새풀 대신 시멘트 기와를 올린 개량주택, 슬래브 옥상을 갖춘 단독주택, 최근 지어진 전원주택이 번갈아 터를 잡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년에 두 달은 전기요금 0원”</font></font>예스러운 마을은 제주 시내보다 더 도시적이었다. 집집마다 설치된 주택용 태양광발전 설비 때문이었다. 슬래브 주택과 전원주택은 옥상에, 옥상이 없는 개량주택은 마당에 평균 가로 4m, 세로 5m의 커다란 태양광 전지판(발전용량 3㎾)이 하늘을 바라보며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빛을 전기로 바꿔 가정이나 한국전력으로 보내주는 장치다.
마을을 찾은 9월14일은 태양광발전에 최적의 날씨는 아니었다. 햇빛이 좋고 서늘한 봄·가을은 발전량이 가장 많은 계절이다. 그러나 초가을의 제주는 여전히 더웠고, 태양이 자주 구름 속에 묻혔다.
마을의 57가구가 다 함께 태양광발전 설비를 설치한 것은 2015년이다. 1992년 마을 인근에 들어선 회천 쓰레기매립장 시설 사용을 5년 연장해주는 대가로 제주시로부터 받은 21억원이 종잣돈이 됐다. 당시 특별지원금을 받은 쓰레기매립장 인근 5개 마을은 특별지원금을 사용할 곳을 각자 선택했다. 그중 동회천마을은 마을총회를 열어 태양광발전 설비를 갖추기로 결정했다. 부영식 마을회장은 “처음에는 임대주택사업을 하려고 부지까지 알아봤는데 누가 그 관리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 와중에 도에서 클린에너지 정책을 한다고 하니까 태양광발전이 관리도 편하고 수익도 있을 것 같아 선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기를 직접 생산해 소비하는 주민들은 전기요금이 줄어드는 효과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 마을의 주택들은 낮이나 햇빛이 좋을 때 태양광발전 설비에서 발생한 전기를 쓰고, 남은 전기는 한전으로 보낸다. 거꾸로 밤이나 햇빛이 좋지 않을 때는 주택이 한전의 전기를 받아쓴다. 주민들은 이렇게 한 달간 가정과 한전 사이에 오간 전기량을 상계한 뒤 그 차액에 대한 요금만 내면 된다.
4명 가족이 함께 사는 부영식 마을회장은 “보통 10만원 나오던 전기요금이 요새는 1만원이 안 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올여름 에어컨 2대를 24시간 계속 가동했는데 한 달 전기요금은 3만1천원에 불과했다. 혼자 지내는 채종량(75)씨도 전기요금 부담이 크게 줄었다. “1년에 두 달 정도는 (부가세·전력산업기반기금 등 청구 요금과 TV 수신료를 제외한) 전기요금이 0원이다. 덕분에 여름과 겨울 냉·난방비 걱정을 안 한다. 게다가 기름이나 핵발전을 이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에너지를 이용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주민들은 마을 태양광발전소(408㎾)의 공동 주인이기도 하다. 마을회는 특별 지원금과 마을 예산으로 총 17억3천만원을 들여 7933㎡(약 2400평) 부지에 별도 태양광발전소를 세웠다. 이곳에서 발생한 전기는 모두 한국전력거래소에 판매한다. 그 판매수익금은 매년 1억원에 이른다. 연간 예산이 3천~4천만원인 마을엔 큰돈이다. 현재 마을회는 지금까지 적립한 수익금을 주민 복지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 중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마을목장을 풍력·태양광 발전단지로</font></font>동회천마을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마을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제주 시내에서 가시리마을로 들어가는 녹산로를 사이에 두고 푸른 목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목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 뒤로 거대한 풍력발전기(0.75㎽, 1.5㎽, 3㎽)들이 솟아 있었다. 크고 작은 풍력발전기가 3개의 날개로 50~100m 지름의 원을 그리며 힘차게 돌 때마다 ‘휘이잉~ 휘이잉~’ 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시리를 방문한 9월13일은 제주가 태풍의 간접권에 들면서 초속 10m의 세찬 바람이 불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엉클어질 정도의 바람은 전기를 생산하기 좋은 날씨였다. 이들 23개 풍력발전기가 1년에 생산하는 전기는 9만6천kWh에 이른다. 도내 2만6천여 가구가 1년간 쓸 수 있는 양이다. 하늘로 치솟은 풍력발전기 아래 너른 땅에는 태양광발전단지(1만6700㎾)가 들어서 있었다. 풍력발전단지와 태양광발전단지가 이례적으로 공존하는 ‘재생에너지 종합판’이었다.
동회천마을과 달리 가시리마을 주민들은 풍력발전기나 태양광발전 설비를 소유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생산한 전기는 모두 해당 사업자의 몫이다. 가시리마을은 발전단지 부지를 사업자들에게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고 있다. 1년에 생기는 임대수익은 풍력발전단지와 태양광발전단지를 합쳐 10억원에 이른다.
가시리마을이 재생에너지 생산에 기여하는 동시에 수익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드넓은 마을목장 덕분이다. 조선시대 왕에게 바치는 어승마를 비롯해 상등마를 키우던 ‘갑마장’이었던 가시리의 마을목장은, 일제시대인 1933년 마을목장 육성 시책에 따라 마을 소유가 됐다. 이후 694만2148㎡(약 210만 평)에 이르는 마을목장은 원주민과 그 후손으로 구성된 조합원 250여 명이 모인 가시리협업목장조합(목장조합)에서 관리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수익으로 마을 주민 전기·시청료, 장학금 지원</font></font>큰 마을목장을 풍력·태양광 발전단지 부지로 빌려주자는 아이디어는 2009년 싹텄다. 중산간 벽지마을을 ‘외지인도 찾게 만드는 마을’로 탈바꿈하려던 주민들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각종 마을 지원 사업에 선정돼 정부·제주도 예산을 받았지만 안정적 수익이 절실했던 것이다. ‘골프장 부지로 땅을 팔거나 임대하라’는 유혹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조상이 만든 목장을 지키자’는 주민들의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때마침 ‘바람이 좋으니 풍력단지 건설사업 공모에 응모해보라’는 제주도의 제의를 받은 주민들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이를 추진했다.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설 마을목장 부지는 주거지에서 4㎞ 정도 떨어진 덕에 소음 피해 등을 걱정하는 주민의 반대도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어차피 풍력발전기 밑에는 소도 못 치니 태양광발전 단지도 함께 만들자’는 의견이 보태졌다. 이후 마을목장엔 2012년 가시리 국산화 풍력발전단지(제주에너지공사·임대기간 20년)와 2015년 가시리 풍력발전단지(SK D&D·20년)가 차례로 들어섰다. 또 올해부터 태양광발전단지(15년·미래에너지제주 등)가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마을목장 조합원 오상식(80)씨는 “처음엔 축산 농가뿐 아니라 소를 안 키우는 나도 혹시나 소와 말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매년 축산 농가에 확인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조성된 가시리 풍력발전단지에는 ‘전국 최초 주민참여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업 공모, 수익 구조 논의, 수익 배분 과정을 제주도나 사업자가 아닌 주민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발전 사업자가 목장조합에 지급하는 수익금 10억원 중 절반 가까이는 주민들에게 현금으로 나눠주는 대신 복지·문화 사업에 쓰인다. 이 마을 555가구엔 매달 2만원씩 전기요금과 1만원씩 케이블방송 시청료가 지급된다. 또 매년 유치원~초등학생은 20만원, 중학생은 50만원, 고등학생은 70만원, 대학생은 150만원의 장학금을 받는다. 초등학교 졸업축하금(10만원)과 대학 입학축하금(200만원)도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직 목표치엔 한참 못 미쳐</font></font>혜택은 또 있다. 목장조합의 임대수익금과 별도로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매년 마을에 1억5천만원가량의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금’(2㎽ 이상)이 지급된다. 이 돈으로 노후 주택을 고치거나 공동 물품을 사기도 한다. 오창홍 목장조합 조합장은 “우리 마을에 오면 유치원생부터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 누구나 복지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게 우리 계획”이라고 말했다.
갈 길은 아직 멀다. 지난해 제주의 총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비율은 11.55%에 그쳤다. 전국 평균(7.35%)보다 높지만, 2030년까지 에너지 자립을 이루겠다는 목표엔 한참 못 미친다. 또 2030년까지 도내 모든 차량을 전기자동차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이지만, 7월 기준 전기차 수는 7457대로 전체 등록 차량의 2%대에 불과하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9월 한 강연에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청정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지속 가능한 도시 모델이다. 제주도는 에너지와 생활, 주택과 도시 부분에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며 지속적인 도전을 강조했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제주·서귀포=<font color="#008ABD">글 사진</font>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김동주 지음, 경인문화사 펴냄, 2017
, 이유진 지음, 이후 펴냄, 2010</font>
<font color="#A6CA37">제주 풍력발전지구와 풍력자원 공유화 기금</font>
제주의 바람은 모두의 것
제주는 오랫동안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해온 만큼 이를 둘러싼 갈등의 역사도 깊다. 특히 소음·진동이 발생하고 지질·지형에 영향을 미치는 풍력발전을 두고 격렬한 찬반 다툼이 일었다. 이를 못 견딘 사업자가 스스로 허가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주에선 주민 갈등 없이 에너지 자립을 실현하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풍력발전지구 지정 제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풍력 자원이 많고, 환경 영향은 적으며, 주민 수용성이 높은 곳을 미리 풍력발전지구로 지정한 뒤 이 지역에 대해서만 사업자에게 풍력발전 허가를 내주는 제도다. 사전에 주민 동의를 구하고 난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한 조처다. 반면 제주 외 다른 지역에선 사업자의 사업 능력과 기술력만 따져 허가를 내준다. 발전소가 인근 주민에게 미치는 피해, 환경·경관에 끼치는 영향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경북 청송, 전남 여수 등 전국에서 풍력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이 벌어지는 이유다.
제주가 도지사의 권한이 큰 ‘제주특별자치도’라 가능한 일이었다. 2011년 5월 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을 통해 도지사는 풍력발전 사업에 관한 모든 허가 권한을 중앙정부로부터 이양 받았다. 이때 제주도가 풍력발전지구를 지정·육성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곧바로 제주도는 조례를 제정해 풍력발전지구의 입지 기준, 주민·이해관계자 의견 수렴 절차, 지구 지정 취소·단축 기준을 만들었다. 2012년 지방자치단체 처음으로 에너지 공기업인 ‘제주에너지공사’를 설립해 풍력발전 공영개발의 시동을 걸 수 있었던 것도 특별법 개정 덕분이다. 를 쓴 김동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은 “지금이라도 국회가 (제주를 제외한 시·도가 영향 받는) 전기사업법 등을 개정하면 전국적으로 풍력발전지구 지정 제도를 충분히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에는 풍력발전으로 발생한 사업자의 개발 이익을 도민에게 환원하는 제도도 있다. 2013년 이후 새로 건설된 풍력발전소의 사업자는 당기순이익의 17.5% 또는 매출액 7%를 기부금으로 내고 있다. 바람은 특정 지역이 아닌 도민 전체의 자원이므로 ‘바람 자원화’의 혜택도 도민이 골고루 누려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지난해 7월에는 아예 ‘풍력자원 공유화 기금 조례’를 공포했다. 이 조례엔 사업자가 낸 기부금뿐 아니라 제주도의 출연금, 제주에너지공사의 이익배당금 등으로 조성된 ‘풍력자원 공유화 기금’을 재생에너지 개발·이용·보급 사업과 취약계층 에너지 지원 사업 등에 쓰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올해 기금 수입은 49억원으로 잡혀 있다. 제주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지역 환경단체가 10년 넘게 도민주체개발·개발이익지역환원을 내건 ‘풍력자원 공유화 운동’을 벌인 성과다. 김동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은 “제주는 지역에 부존하고 있는 자연 자원으로 에너지 자립을 하고 그로 인한 이익은 지역으로 환원하는 모델을 만들어왔다”며 “이를 다른 지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다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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