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부터 대한민국을 뒤흔든 블랙리스트 사태가 지난 1심 판결과 민관 합동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위원회) 출범으로 한 고비 넘는 모양새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못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수없이 이뤄진 국정원 보고</font></font>
첫 번째 과제는 국가정보원의 역할 규명이다. 7월27일 나온 ‘문화계 블랙리스트’ 1심 판결문(2017고합 102·이하 판결문)을 보면 ‘국정원’이란 단어가 수차례 등장한다. 판결문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청와대·국정원·문체부를 통한 지원배제의 시스템’(판결문 130쪽)으로 규정한다. 청와대의 지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좌파·반정부 문화예술인 지원 배제 명단을 작성했는데, 지시 이전에 반드시 ‘국정원 보고’가 있었다.
판결문이 제목을 특정한 국정원 보고서만 해도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보고서’(2013년 하반기), ‘좌성향 세력의 세 확산 기도 등 문화 관련 이념 문제 보고서’(2013년 하반기), ‘영화 자가당착에 대한 국정원 정보 보고서’(2014년 하반기), ‘예술위의 2014년 상반기 문예기금 지원 대상자 선정 결과 문제 국정원 문건’(2014년 2월께) 등 4건에 이른다.
보고서로 특정되지 않더라도 ‘국정원의 정보보고 문건’이 계속 등장한다. 판결문을 보면 사실상 문화정책 전반을 국정원이 통제·관리해왔음이 확인된다. 문예기금 지원 심의를 하면서는 “검토나 조치가 필요한 경우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 중 해당 부분을 관련 비서관과 공유하면서 업무를 진행”(판결문 73쪽)하도록 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보직 교수 임명 등에서도 “좌성향 교수의 퇴출 유도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을 통해 문체부로 하달됐다. 영화에서부터 정부 기관 인사, 문예기금 운영 등 문화행정의 모든 분야를 사실상 국정원이 지배해온 셈이다.
앞으로 문체부와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위원회를 통해 블랙리스트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일 계획이지만, 국정원 관련 부분은 진상 규명이 쉽지 않은 난제다. 지난 6월 만들어진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 교육문화’도 13개 조사 과제를 발표하며 블랙리스트를 포함했지만, 문화행정 전반에 대한 개입은 언급하지 않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화이트리스트 위법 조사도 필요</font></font>
또 다른 과제는, 블랙리스트와 동전의 양면인 화이트리스트다. 박근혜 정부 문화행정의 ‘가이드라인’으로 보이는 ‘문제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방안 보고서’(박준우 정무수석, 신동철 국민소통비서관 작성)를 보면 박근혜 정부의 문화행정은 ‘1. 중앙정부 보조금 차단 2. 좌파 인사 확인 조치 3. 모태펀드 관리대책 강구 4. 관심 조치가 필요한 분야’ 등의 항목으로 구성됐다. 1·2·4항이 블랙리스트 관련 내용이라면 3항은 화이트리스트(지원 독려) 관련 대책이다. 3항의 실행 계획에는 ‘창투사에 실질적 영향력 행사’ ‘(주)한국벤처투자 임원진(대표·간부·감사) 국정 철학 공유 인사로 대폭 교체’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계획은 그대로 실행됐다. ‘블랙리스트’ 논란을 통해 정권에 비판적인 제작자·감독·배우 등이 출연한 영화들이 정부의 여러 지원에서 배제된 사실은 확인됐지만, 모태펀드로 적극적 지원을 받아온 영화들이 어떤 위법적 과정을 거쳤는지 제대로 규명된 게 없다.(제1157호 <font color="#C21A1A">‘박근혜 정권 영화계 길들이기 기획의 전말’</font> 참조)
마지막 과제는 인적 청산이다. 다수의 현장 문화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에 부역했던 공무원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지원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통을 넘어 서글픔을 느낀다”고 말한다. 장관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일부 처벌을 받았다지만 박근혜 정부에 부역하며 예술인을 난도질했던 공무원들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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