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는 없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암살 사건에 대해 남북관계를 오래 연구해온 연구자 김연철(인제대 교수)·김창수(코리아연구원 원장)·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의 의견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 2월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에서 암살당한 김정남(여권명 김철)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누가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를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의 이야기처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스탠딩 오더(반드시 처리해야 할 명령권자의 명령)가 예전부터 있었는데 지금에야 실행됐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나온 ‘2012년 망명설’처럼 최근 남쪽의 망명 공작이 있었거나 탈북자 망명정부 구상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북한이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범행 이틀 뒤 범행 장소에 다시 온 용의자마치 암살 포르노처럼 백주 대낮에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진 ‘백두혈통’ 살해에 대해 그들도 황당하고 미심쩍어했다. 두 명의 여성이 불과 2.33초 만에 하루 10만 명이 오가는 공항에서 실행한 암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 도저히 국가조직의 계획된 범죄로 보이지 않았다.
암살 용의자 중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29)은 범행 당시 얼굴을 가리지 않아 공항 폐쇄회로 TV에 찍혔고, 범행 이틀 뒤 다시 범행 장소에 왔다가 체포됐다. 훈련된 요원의 행동으로 납득되지 않는 행적이다. 다른 용의자로 인도네시아 여권을 가진 시티 아이샤(25)도 도안 티 흐엉에 이어 곧바로 경찰에 잡혔다.
이들은 리얼리티 쇼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지만 말레이시아 경찰은 예행연습까지 거친 치밀한 범행으로 단정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범행 동기, 장소, 방법과 용의자 행적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레이시아 당국이 수사 결과를 거짓으로 발표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북한이 배후일 가능성을 높였다. 칼리드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2월22일 기자회견에서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과 북한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이 암살 사건에 연루돼 있다고 밝혔다. 칼리드 청장은 이들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하면서 “북한 대사관에 이 두 사람에 대한 인터뷰를 서면으로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말레이시아 경찰은 암살의 배후로 북한 국적 남성 4명을 지목했고,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는 북한 출신 리정철을 체포했다. 지금껏 드러난 용의자 10명 중 8명이 북한 국적이다. 수사 결과는 갈수록 북한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암살 당시 공항에 있던 남성 4명은 제3국을 거쳐 북한으로 갔다고 알려졌고, 암살을 실행한 여성 2명을 포함한 3명은 체포됐으며, 3명은 말레이시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사망자를 여권 이름대로 “김철”이라 부르지만, 김정남이란 추정에 대해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
“떠돌이 김정남 망명설이 배경 아닐까”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의 북한 내 위치에 대한 김창수 ‘새로운 코리아 구상을 위한 연구원’(코리아연구원) 원장의 평가는 이렇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여당과 야당이 갈리는 일종의 신진대사를 한다. 그런 선거제도를 대신해 수령 체제는 숙청 방식을 통해 체제를 안정시켜왔다. 김일성, 김정일 체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정남은 권력 기반 없는 떠돌이에 불과하다. 숙청 논리로 보더라도 맞지 않다.” 암살 사건의 이면에 무언가 시기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김 원장은 “현재는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끝없이 떠돌던 김정남 망명설이 배경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일본 언론 등은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김정남을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도해왔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암살 사건이 터지자 “김정은 체제의 대안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고 국제사회의 김정은 정권 교체 시도를 미리 차단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언급해 파문이 일었다. ‘스탠딩 오더’를 지목한 국정원장과 배경 분석이 달랐다.
김창수 원장은 “2013년 장성택 처형 이후 그의 측근 70여 명이 해외에서 망명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금은 조직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정남의 고모부 장성택은 2013년 김정은 체제에서 처형됐다. 북한의 실세였던 장성택은 김정남과 긴밀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친중파였던 장성택의 처형으로 북중 관계가 냉각됐다는 평가가 있다.
고미 요지 편집위원이 김정남과 한 인터뷰, 주고받은 전자우편을 정리한 책 (2012년 중앙M&B 펴냄)는 “김정남은 중국의 호위를 받고 있다”며 ‘김정남 옹립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 책은 “김정은 체제가 파탄날 경우, 중국은 사상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김정남을 평양으로 돌려보내 차기 지도자로 세우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시진핑 주석의 정치 기반인 태자당이 김정남을 지지한다는 견해도 덧붙인다.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호하는 김정남은 마카오에 거주하며 중국 정부의 경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소설이 가미된 것”이라며 “마카오에 생활 기반이 있으니 중국 정부 입장에서 경호의 필요성이 있었겠지만 정치적 비중을 두었다고 보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김창수 원장도 이번 암살 사건이 북중 관계에 끼칠 영향에 대해 “친중파 우두머리 장성택도 숙청했다”고 지적했다.
용의자 신변 확보 어려워한편 암살 사건의 실체 규명도 쉽지 않다. 영국의 일간지 는 말레이시아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현광성이 전체 음모의 감독자이고, 김욱일이 공항에서 남성 용의자 4명을 도왔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22일 기자회견에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은 외교 여권,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은 공무 여권을 가지고 있다. 현광성이 말레이시아 정부에 정식 등재된 외교관이면 빈 협정에 따라 면책특권을 갖는다. 북한대사관이 그의 신병을 인도하지 않는 한 말레이시아 정부가 기소해 처벌할 수 없다. 국제협정으로 북한대사관은 북한 영토로 인정되고, 북한대사관 차량도 재외 공관과 같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2월19일 말레이시아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한 북한 남성 4명은 사건 직후 말레이시아를 떠났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23일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도주한 용의자들의 수배령을 요청했다. 하지만 북한의 배후설도 아직은 증명되지 않았다.
암살 수법부터 혼선을 빚었다. 처음에는 독침, 독극물 스프레이, 독극물이 묻은 천, 맨손에 독극물을 묻혀서로 바뀌었다. 결국 암살 용의자 여성들이 손에 독극물을 묻혀 사망자의 얼굴에 도포했다는 것이다. 과연 손에 묻으면 괜찮고 얼굴에 묻히면 치명적인 독극물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2월24일 사망자의 눈 점막과 얼굴에서 신경성 독가스인 신경작용제 VX가 검출됐다고 밝혀 논란은 잦아들었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를 통해 입장을 밝힌 북한이 23일 조선법률가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내놓았다. 이 담화는 암살 사건을 ‘공화국 공민의 쇼크사’로 지칭하며 “말레이시아 쪽의 부당한 행위들이 남조선 당국이 벌여놓은 반(反)공화국 모략 소동과 때를 같이해 벌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명백히 남조선 당국이 이번 사건을 전부터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 대본까지 미리 짜놓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완강히 배후설을 부인했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는 사건 초기부터 공동조사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수사가 갈수록 북한을 향하자 갈등은 커지고 있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북한 대사의 “적과 결탁해 사망을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외교적으로 무례한 일”이라고 말했다. 비동맹 국가의 역사로 우호적이었던 양국의 외교 관계가 극심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남북관계와 국제 정세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에 남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우암각 습격사건’을 기록한다. “2009년 4월 초, 평양 중심가에 있는 별장 ‘우암각’에 북한 비밀경찰인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사실 그곳은 김정남의 평양 근거지이고, 지인들과 파티를 즐기는 장소였다. 보위부 요원들을 보낸 사람은 배다른 동생 김정은이었다. 김정남과 그 동조 세력에 타격을 가하려고 의도적으로 수색한 것이었다.” 김정은이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벌어진 사건이란 것이다.
2012년 북한이 배후로 의심되는 김정남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2012년은 대선 정국과 관련해 김정남 망명설이 나오던 때였다. 그리고 2017년 탄핵·대선 정국이다. 사건이 터지자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등은 북풍을 의도한 행보를 보였다.
암살 용의자, 지난해 제주도 방문했다암살 용의자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의 묘한 행적도 자꾸 나온다. 도안 티 흐엉이 지난해 11월 제주도를 3박4일 동안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인 남자친구를 만났다고 한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한국 관련 게시물도 있다.
이렇게 석연치 않은 사건의 정황은 한둘이 아니다. 2017년 대선 정국이라는 함수까지 더해지면 사건의 퍼즐은 더욱 복잡해진다. 충격적인 사건은 의혹은 있지만 확증은 부족한 미제의 사건으로 남을 여지도 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아웅산 폭탄테러처럼 정확한 실체가 밝혀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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