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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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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불복종’은 끝나지 않았다

경찰·한전 폭압에 맞선 주민들에게 항소심도 1심과 같아…

법률지원단 정상규 변호사 “주민 공동체 파괴 매우 심각”
등록 2017-02-22 17:49 수정 2020-05-03 04:28
2월2일 경남 창원시 창원지법에서 열린 밀양 송전탑 투쟁 관련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주민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모여 있다. 남어진 제공

2월2일 경남 창원시 창원지법에서 열린 밀양 송전탑 투쟁 관련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주민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모여 있다. 남어진 제공

‘밀양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

2월2일 창원지법 형사1부(재판장 성금석 부장판사)는 2012년 이후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주민·활동가 15명에 대한 병합사건 항소심 선고를 했다. 결론은 1심 판결과 판박이였다. 9명에게 징역 6월~1년에 집행유예 1~2년, 6명에게는 벌금 200만원이 선고됐다.

주민들은 분노했다. “철탑 막으면서 다 잃어버렸다고 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고 떳떳하다고 자부했는데, 또 통증이 도진다. 너무 억울하다.”(김영자·61) “철탑 밑에서 살아가는 일이 너무 괴롭다. 그래도 우리는 재판부의 양심에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이남우·75) “차라리 지금 들어가서 징역을 살고 싶다.”(한옥순·70) 주민들은 1시간 넘게 법원을 떠나지 못했다. “최순실한테는 꼼짝도 못하면서 생존권 주민들은 이리도 무참하게 짓밟는다”는 항의도 터져 나왔다.

1심 재판부터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시민 불복종’이었다. 변호사 8명이 모인 ‘밀양 송전탑 주민 법률지원단’은 시민 불복종을 이렇게 정의했다. “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재고를 촉구하고 사회적 협력의 조건이 반대자들의 생각으로는 확실히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하여 다수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정치적 행위로서 통상적으로 정부의 정책 혹은 법을 변경하려는 의도로 행하여지는, 법을 위반한 공적, 비폭력적, 양심적 행위.”

재판부, ‘시민 불복종’ 논리 거부

변호인단은 1심에서 15명의 행위 모두가 시민 불복종에 해당하므로 형법상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항소심에서는 모든 피고인에 대해 양형에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시민 불복종을 주장하되, 형법상 불처벌 사유로는 7가지 사건으로 한정하고 더욱 정교하게 논리를 폈다. 공사용 헬기 밑에서 연좌하거나 장비에 몸을 묶은 행위, 공사 진입로에 앉거나 누워 있던 행위, 자동차를 공사 진입로에 주차한 행위 등 소극적 저항 행위로 범위를 좁힌 것이다. 시민 불복종과 관련한 연구용역 논문도 재판부에 제출했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이계삼 사무국장은 항소심 재판에서 “주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농성밖에 없었고,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저항도 저들(경찰·한국전력)의 어마어마한 폭력에 비폭력적인 최소한의 방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형법 제20조(정당행위)는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당행위의 관점에서 볼 때 공권력 행사가 과연 정당했는지, 피고인(주민)들의 행위가 정당했는지가 재판의 핵심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변호인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변호인단의 시민 불복종 주장을 “수단이나 방법의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고, 시민 불복종 운동도 실정법 질서와 법치주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보호받을 수 없다”는 간단한 논리로 일축했다.

법률지원단 간사를 맡고 있는 정상규(33) 변호사는 2월15일 부산시 연제구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재판부는 수단이나 방법의 상당성이 없다고 하는데, 상당성에 대한 법리 자체를 너무 넓게 해석한 게 아닌가 싶다. 재판부가 법이 요구하는 상식을 넘어섰다고 본다.”

재판부가 변호인단의 주장을 세세히 살피지 않고 잘못 판단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변호인단은 항소심에서 주민들 혐의 중 공동상해, 주거침입, 손괴 등은 시민 불복종을 주장하는 근거에서 제외했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런 행위들까지 판단 근거로 삼았다는 것이다. 정 변호사는 “변호인단의 주장을 재판부에서 배척하더라도, 적어도 성의를 가진 판결이라면 주민들이 이렇게까지 원통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판부가 변호인들의 주장을 살펴봤는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했다.

정부·한전, 끝없는 무리수

항소심 재판에서는 증인신문에 나선 전문가들이 정부 정책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적하기도 했다. 2013년 국회에서 주관한 ‘밀양 송전탑 전문가 협의체’에 주민 추천으로 참여했던 하승수 변호사는 기존 345㎸ 선로 3개로도 송전이 가능한데 한전이 무리하게 765㎸ 송전선로를 설치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전문가 협의체의 한전 추천 위원들이 제출한 보고서 초안도 한전 쪽에서 대필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결국 전문가 협의체가 파행적으로 종결된 점도 밝혔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지속적인 전력 소비 감소로 전력 예비율이 충분한 상황에서 한전이 밀양 송전선로 건설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고 증언했다.

사법부가 밀양 송전탑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전이 주민 보상 명목으로 뿌린 돈이 마을 공동체 파괴의 ‘씨앗’ 노릇을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김경수(더불어민주당, 경남 김해을) 의원실은 최근 연세대 국학연구원과 공동으로 마을 공동체 파괴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했다. 정부와 한전이 마을 공동체에 끼친 해악과 폭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정 변호사는 “주민들이 경찰·한전과 싸울 때보다 지금이 더 고통스럽다고 할 정도”라고 했다.

주민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

100일 넘도록 1200만 촛불(주최 쪽 누적 추산)이 이어지고 있지만, 경남 밀양 765㎸ 초고압 송전탑 설치에 반대해온 주민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햇수로 12년, 전기를 타고 흐르는 밀양의 눈물을 한국 사회는 온전히 닦아주지 못하고 있다.

대책위는 2월2일 항소심 선고 뒤 성명을 내어 “주민들이 입어야 했던 인격적 모멸과 생존권 침탈의 실상을 언젠가 국가가 나서서 진상을 밝히고 사죄할 때까지 우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정 변호사를 비롯해 법률지원단은 조만간 대법원에 제출할 상고 이유서의 논리와 방향을 논의할 참이다.

‘밀양 불복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산=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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