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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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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가려고 거짓말쟁이가 됐어요”

입시에 쫓겨 ‘자소설’ 작가로 전락하는 대입 수험생들

학업 능력은 부풀리고 정치·사회적 입장 자기 검열하며 자괴감 느껴
등록 2016-09-27 21:34 수정 2020-05-03 04:28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으면 대학에 가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지난해 8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린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가 자료집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으면 대학에 가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지난해 8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린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가 자료집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17학년도 대입 수시모집의 원서접수 마감일이 닥친 지난 9월20일 저녁,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김유림(가명) 학생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고 했다.

“여름방학 시작하고부터 한 달 반 정도 썼어요. 소재 정하는 데만 선생님한테 세 번 정도 퇴짜 맞았고요, 정한 소재를 어떻게 구성할까 방향 잡는 데 네댓 번 정도 고쳤어요. 통틀어 열네 번 정도 고쳐쓴 것 같아요.”

‘나’는 사라지고 거짓 꿈만 남은 자소서

수험생들은 교육부로부터 대학입시 업무를 위탁받아 수행하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개발한 ‘자소서 공통양식’을 작성한다. 공통문항 3개를 합한 분량은 3500자, 대학마다 1천~1800자까지 개별문항 1개를 추가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열네 번이나 고쳐쓸 정도로 공들인 자소서가 아직도 미완인 이유는 수정을 거듭할 때마다 ‘자기소개서’에서 ‘자기’가 사라진 탓이다. 김유림 학생은 처음 쓴 자소서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1인시위’ 경험을 적었다가 담임교사에게 퇴짜를 맞았다. 유림 학생은 지난해 가을 적잖은 중·고교생들이 거리로 나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집회’를 할 때, 친한 친구들과 함께 직접 손팻말을 만들어 광화문역에서 1인시위를 한 적이 있다.

“저는 제 생각을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한 사례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면접 보러 가서 만난 교수님이 국정화에 찬성하는 분일 수도 있고, 또 반사회적 학생으로 보일 수 있어 위험하다는 의견이 너무 많아서 못 넣었어요. 학교 활동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고요.”

이 밖에도 토론 동아리를 하면서 사고가 확장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는 성소수자 관련 내용은 학교 활동이라는 게 명백하지만 유림 학생이 ‘자체 검열’했다.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의 언급을 최대한 피하라는 ‘자소서 작성 요령’이 공식화된 적은 없다. 교사나 학생들이 알아서 검열한다. 시험 점수가 아닌 학생 개개인의 ‘꿈과 끼’를 살펴보겠다며 대학들이 앞다퉈 학생들로부터 자소서를 제출받고 있지만, 한국 대학의 입학 사정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정치적 입장을 자유롭게 표현한 자소서에 불이익을 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통하는 수준에 그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집회 참여를 통해 얻은 정치·사회적 통찰은 쓸 수 없지만, 없는 꿈을 꾸며내야 하는 게 ‘대입 자소설’의 민낯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나지원(가명) 학생은 자소서 제출 하루 전날인 9월20일 저녁, 기자와 통화하다가 “꿈이 없으면 안 되느냐”고 되물었다.

“저는 원래 꿈이 없었어요. 고1 때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꿈을 적어서 내랄 땐 꿈을 지어냈어요. 그런데 자소서는 생기부에 입각해서 써야 하잖아요. 결국 거짓 꿈을 갖고 자소서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자소서에 ‘꿈이 없다’고 쓸 수 없잖아요. ‘그럼 왜 우리 학과 왔냐’고 면접부터 꼬이니까요. 대학이 꿈이 없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니까, 다들 연기를 하는 거예요. 꿈이 없으면 안 돼요? 저희는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렇게 완벽한 꿈이 있어야 하나요?”

조작된 감정과 자기 홍보 과잉

구직하는 청년들도 자소서가 아닌 ‘자소설’을 쓰지만 대입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보다는 형편이 낫다. 청년들의 ‘취업 자소서’는 20대 중반까지 20여 년의 세월이 소재가 되는 반면, 고3 수험생이 ‘대입 자소서’에 쓸 수 있는 소재는 고작해야 고등학교 생활 3년에 국한된다. 그것도 교사가 생기부에 적은 교내 활동만 ‘팩트’로 인정돼 자소서에 쓸 수 있다.

지방의 한 외국어고등학교 3학년인 심소연(가명) 학생은 이를 두고 에 비유했다. “드라마 은 에 한 줄 있는 것 가지고 만들었잖아요. 우리도 그래요. 생기부에 적힌 한 줄을 자소서 한 문단으로 부풀리는 능력이 생겨요.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생기부에는 기록이 자세하지 않으니까 부풀리는 거죠.”

자소서의 신뢰성을 확보하겠다는 묘책이지만, 생기부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교사나 학교의 역량이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교사나 학교를 잘못 만나 부실한 생기부를 토대로 자소서를 써야 하는 학생들이 ‘자소설’ 작가로 전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입학 전형 자료로서의 신뢰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소서 작성 원칙이 오히려 원칙을 훼손하는 역설이 빚어지는 것이다.

자소서 문항 자체는 얼핏 평이하고 교육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학생들은 우열과 당락이 갈리는 입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소서를 쓴다. 더 진솔한 자소서보다 더 특별하고 더 우수하고 더 독특한 ‘자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학습 경험(공통문항 1번)은 뛰어난 학업 능력으로 △의미를 두고 노력했던 교내 활동(공통문항 2번)은 공부 말고도 다양한 교내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으로 △배려·나눔·협력·갈등관리를 실천한 사례(공통문항 3번)는 인성마저 훌륭하다는 ‘자기 홍보’로 비약된다.

강원도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고인혜(가명) 학생 역시 ‘자소설’을 썼다고 고백했다. “활동은 사실인데, 계기나 변화는 거짓이에요. 소재는 변경이 안 되지만, 감정은 조작할 수 있다고 우리끼리 얘기해요.” 학생들이 특히 감정을 조작하는 문항은 ‘인성 문항’으로 알려진 3번 문항이다.

“토론대회를 할 때 친구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서 중재하긴 했는데, 그렇게 원활하게 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때려치우고 싶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도 많이 했죠. 자소서에는 이렇게 완벽하게 갈등을 중재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썼어요.”

자소서 쓰다가 우는 아이들
수시모집 원서 접수 전 고3 교실에선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자기소개서 수정에 열중하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지난 6월 2017학년도 수능 모의평가에 응시한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수시모집 원서 접수 전 고3 교실에선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자기소개서 수정에 열중하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지난 6월 2017학년도 수능 모의평가에 응시한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심소연 학생도 3번 문항을 쓰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제 나름대로는 리더십이 드러난 활동이라고 생각해서 써갔는데, 선생님이 ‘인성 요소가 잘 안 드러난다’고 해서 퇴짜 맞았어요. ‘협력의 중요성을 느꼈고 한명 한명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써가서 통과됐죠. 나 스스로 내 인성이 어떻다고 쓰는 것이 좀 이상하잖아요. 쓰다보면 정말 친구를 돕고 싶어서 한 건데도 내가 학생부나 자소서에 쓰려고 활동한 것처럼 느껴져서 힘들었어요.”

올해 경기도의 한 대학에 입학한 뒤 재수를 준비하는 ‘반수생’ 손혜주(가명)씨는 고등학교 생기부에 적어놓은 ‘은행원’이라는 직업과 지망 학과인 중국어과를 엮느라 소설을 썼다. “저희는 외고가 아니라서 중국어 관련 활동은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제2전공으로 경영학을 배워 중국 주재 은행에 취업하겠다는 식으로 엮었죠.”

그는 “자소서를 쓰며 포장이나 부풀리기를 많이 했느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렇게 했다”고 했다. “제가 1학년 때 수학이 7등급이 나왔는데, 고3 때 3등급이 나왔어요. 친구들이 중간에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되기도 했고, 제가 과외를 받으면서 성적이 좋아진 건데, 원래 수학에 호기심이 있어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고 썼어요.”

자소서를 쓰면서 자아 정체성을 찾게 되고, 진로 계획이 뚜렷해지는 교육적 성과를 얻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에 있는 대다수 학생들은 양심을 배반하는 ‘자소설’을 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시위에 참여한 경험을 자소서에 적지 못했다는 김유림 학생은 통화하는 가운데 ‘자괴감’ ‘회의감’ ‘무력감’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만 쓸 수는 있는데, (그렇게 하면) 대학에는 못 가요. 내가 이렇게 거짓말해도 될까 싶다가도 이렇게라도 해서 대학에 갈 수 있으면 가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사치인 것 같기도 해요. 요즘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친구들 열에 일고여덟은 노트북을 켜놓고 자소서를 고치는데 쓰다가 우는 아이 많아요. 내신 공부가 훨씬 나아요.”

차라리 “공부가 낫다”

‘꿈을 지어냈다’고 말했던 나지원 학생은 “전 정말 거짓말쟁이예요”라고 울먹였다. “원래 6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습동아리에서 발표 10분 정도 한 건데, 마치 논문 발표라도 한 것처럼 ‘나 대단하다’고 썼어요. 없는 일을 만들어내고 작은 일을 부풀리는 게 제일 힘들어요. 선생님이 원래 자소서는 ‘자소설’이라고 그래요. 서류 통과는 어떻게 된다고 해도 면접 가서는 기가 죽을 것 같고, 저 어떡해요.”

고3 학생들이 ‘자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는 자소서를 쓰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는 문이 매우 좁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2017학년도 전체 신입생(3300여 명)의 75%가량인 2500여 명을 수시모집으로 뽑는데, 수시모집에 지원하는 모든 수험생에게 자기소개서를 필수 제출 서류로 요구한다. 자소서를 쓰지 않고 서울대에 가려면 수능 성적을 반영하는 정시모집에 응시하면 되지만 모집 인원이 전체 신입생의 25%에 불과하다.

다른 대학들의 경우 수시모집에서 자소서를 요구하지 않는 전형이 있긴 하지만 자소서를 요구하는 전형의 모집 인원이 훨씬 많다. 연세대는 수시모집 인원(2500여 명)의 64%(1600여 명), 고려대(3천여 명)는 66%(2천여 명)를 자소서가 필요한 전형으로 뽑는다.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 급속히 확대된 학생부종합전형 탓에 자소서가 ‘자소설’이 되는 부작용이 극심해졌다. 흔히 ‘학종’으로 불리는 이 전형은 박근혜 대통령의 2012년 대선 공약인 ‘대입 전형 간소화 정책’으로 등장했다. 기존 입학사정관 전형이 과학 올림피아드, 공인 영어성적 등 교외 스펙을 반영하면서 입시 부담이 가중된다는 비판이 높아지자 학생의 활동 내용을 보되 교내 스펙만 반영하는 학종이 생긴 것이다. 과거 입학사정관 전형이 자소서를 통해 내세울 만한 특기가 있는 일부 학생을 위한 ‘특별전형’ 성격이었던 반면, 학종은 일반 다수의 학생들한테까지 무차별적으로 자소서를 요구하는 ‘일반전형’으로 운영된다.

‘학종’ 전형으로 다수에게 ‘자소설’ 부작용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자료를 보면, 학종이 도입되기 직전인 2014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의 선발 인원은 18.8%(25만1608명 가운데 4만7273명)였지만, 2017학년도 학종 선발 인원은 29.5%(24만6981명 가운데 7만2767명)로 크게 늘었다.

전북 ㅇ고등학교 채창수 교사가 학교 현장의 모습을 전했다. “자소서를 요구하는 전형은 주로 학종이다. 학종이 확대되기 전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만 해도 한 학급 학생 30명 가운데 많으면 10명, 적으면 3~4명 정도가 자소서를 썼지 이렇게 심하진 않았다. 이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소서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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