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일회장’이라고 저장된 날짜를 한번 봐라. 2009년 1월이다. 내가 사장 연임 결정된 게 2008년 10월이다. 연임되기 전에 천신일 회장은 만나본 적도 없다.”
남상태 당시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직접 열어 기자에게 보여줬다. 일회장, 010-##00-1000. 그의 휴대전화에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일회장’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돼 있었다. 구형 폴더폰인 휴대전화에는 저장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그는 “만약을 위해” 만나는 사람을 ‘별칭’으로 저장해둔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인 천신일 회장에게 사장 연임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을 직접 해명하겠다며 2010년 7월 기자와 만난 자리였다.
횡령·배임수재 혐의
2010년 국회 국정감사와 언론 등에서 남상태 사장을 둘러싼 여러 의혹이 터져나왔다.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인 임천공업을 통해 천신일 회장에게 비자금을 전달했다거나, 건축가 이창하씨가 운영하던 장유종합건설을 대우조선해양이 인수해 이씨를 계열사 디에스온 대표로 임명해 사업 특혜를 주는 과정에서 비자금이 조성됐고 이씨가 남 사장의 ‘금고지기’였을 가능성 등이 의혹의 핵심 줄기였다.
당시 경제부에서 대우조선해양을 출입했던 기자도 관련 의혹을 취재하며 캐들어갔다. 국회나 언론이 제기한 의혹의 대부분은 ‘카더라’ 통신에 불과했고, 물증이나 핵심 증언자는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기자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남상태 사장은 비보도를 전제로 여러 의혹을 속 시원히 설명해주겠다고 했다. 따로 만나 2시간여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남 사장과의 대화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다. 남 사장의 해명을 100%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니다. 아직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단순 의혹을 부풀려 보도하거나 비보도 약속을 깨는 것 모두 당시로선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그해 9~12월 검찰은 천신일 회장과 임천공업 이아무개 회장을 구속 기소했다. 이 회장이 세무조사를 무마하고 계열사 워크아웃을 조기 종결해달라는 청탁을 해주는 조건으로 천 회장에게 수십억원을 건넨 혐의였다.
천 회장은 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13년 1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창하 대표도 하도급업체에서 뒷돈을 받은 혐의 등으로 2009년 기소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남 사장을 소환 조사하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의혹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사장 자리에서 2012년 3월 물러났다. 여러 의혹은 묻히는 듯했다.
그런데 지난 6월28일 새벽 검찰은 남상태 전 사장을 긴급 체포했다. 대우조선해양 관련 비리를 수사 중인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단장 김기동)은 남 전 사장을 소환한 지 15시간여 만에 긴급 체포하고, 6월29일 횡령과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했다.
이에 기자는 남상태 전 사장이 6년 전 기자를 만나 했던 이야기를 뒤늦게나마 일부 공개한다. 남 전 사장과 이명박 정권 실세들과의 관계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사실들도 있다. 검찰 수사로 당시 의혹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 중이라는 점도 감안했다.
남 전 사장은 친구인 정아무개(구속)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화물운송 업체인 부산국제물류(BIDC)에 일감을 몰아주고, 대우조선해양 유럽 지사 2곳에서 조성된 비자금으로 정씨가 설립한 ㅌ물류회사 지분을 차명으로 사들여 수억원의 배당 수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창하씨도 다시 소환 조사해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수백억원대 사업 특혜를 받게 된 배경 등을 캐묻고 있다.
검찰은 왜 다시 남 전 사장에게 칼날을 겨눴을까? 검찰은 개인 비리에 초점을 맞췄을 뿐이고, 대우조선해양에서 수조원대 분식회계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번 수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대우조선해양’이 아니라 ‘남상태’가 핵심이다.
검찰은 역대 정권 말기 때마다 이전 정권 실세들을 수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검찰이 최근 수사 중인 대우조선해양과 롯데그룹은 ‘친MB’로 꼽혔던 기업들이다.
묻혀 있던 연임 로비 의혹남상태 전 사장은 ‘연결고리’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대우그룹에 입사한 남 전 사장은 재무·기획 쪽 업무를 주로 맡았다. 2003년 부사장을 거쳐 2006년 3월 대우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임기 3년의 대표이사직이었으나 2009년 연임에 성공했다.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에서 이명박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다. 산업은행이 대주주인 대우조선해양은 ‘친정부’ 인사들의 몫으로 여겨지던 때라, 연임은 의외였다.
남 전 사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처남인 고 김재정씨와 친구 사이여서 대통령 부인 김윤옥씨를 “누나”라고 부를 만큼 친한 사이라는 점, 검찰 출신의 김회선 국가정보원 2차장(2008년 3월~2009년 2월 재임)이 매제라는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권력형 비리’ 의혹이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이명박 정부 시절 재경포항연합향우회 사무처장, 이재오 의원 정무특보를 했던 인사 등을 경영고문과 사외이사로 대거 영입하기도 했다.
남 전 사장은 고 김재정씨와 중학교 동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10년 7월 남 전 사장은 기자와 만나 “중학교 친구라거나 동네 친구라는 이야기는 잘못된 정보”라고 말했다. “재수할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다. 나는 종로구 통의동에서 재수했고, 김재정은 동대문구 용두동에 살았다. 재수학원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집을 오갔다. 친구들이 김재정네 집에서 밥도 많이 얻어먹었다. 김윤옥 여사도 그때 알았다.”
강기정 전 의원은 그해 11월 ‘남상태 게이트’로 불리는 연임 로비 의혹을 검찰이 즉각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2009년 1월 김재정씨가 골프를 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했다. 남 전 사장이 김윤옥 여사가 병원에 방문하는 날을 미리 알아내 부인과 함께 김 여사를 만났다. 또 김 여사의 둘째언니 남편인 황아무개씨 주선으로 남 전 사장 부인이 김 여사를 다시 만나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수표 묶음을 전달했다.”
남 전 사장은 “김재정이랑 친하게 지낸 건 맞지만 2009년부터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한테 무슨 압력을 가할 수 있겠느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그러면서 “솔직히 (이번 정권과) 소통이 안 돼 내가 필요해서 경영고문들을 모셔왔다”고도 털어놨다. 김재정씨에게 전화하면 옆에 있는 비서가 받아서 안 바꿔줄 때도 있고, (회사와 관련된) 자잘한 이야기(청탁)를 하고 싶어도 통로가 없어 답답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 때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 때도 감사원장 출신의 경영고문을 모셔오고 그랬다”고도 말했다. 검찰 수사에 외압을 가해 수사망을 비켜가고 있다는 의혹에 대해선 “이 나이쯤 되면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다. 내가 수사받는다고 하니 다들 걱정돼서 전화 한 통 걸었겠지, 내가 청탁한 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6년 만에 내민 반박 증거기자와 만나는 날, 남상태 전 사장은 ○○은행이 자신의 아들 앞으로 보내온 ‘금융거래 정보 제공 통보’ 우편물을 가져와 보여줬다. 검찰이 그동안 자신의 계좌는 물론이고 가족, 사촌들 계좌까지 다 뒤졌지만 티끌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결백’ 증명서였다. 이제 6년 만에 검찰이 그의 ‘결백’을 반박할 증거를 찾아낸 것일까. 검찰이 이어서 과연 ‘남상태 게이트’라는 판도라의 상자까지 열 수 있을까.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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