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월30일이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오른 지 만 4년이 된다. 2011년 아버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지 13일 만에 얻은 첫 공식 지위였다. 1983년 1월8일생으로 알려진 그의 당시 나이는 불과 28살이었다. 유럽에서 유학했고, 통수권자에 오른 뒤 때로 전용차를 직접 몰고 다닌다는 젊은 권력자가 북한 정치 전면에 나선 지 4년. 그 사이 북한 사회에는 1990년 무렵 태어나 북한의 신세대로 통하는 ‘장마당 세대’가 기성 세대로 진입하고 있다. 우리의 시장 격인 ‘장마당’에서 이른바 시장경제를 어느 정도 체득한 이들이다. 북한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은 어떤 모습일까?
공연 구경 후 택시 불러타는 사람들
지난 10월23일부터 7박8일간 북한에 다녀온 박경서(76) 대한민국 초대 인권대사를 만났다. 그는 “최근 3년 사이 북한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얼굴에도 이전과 다른 자신감이 넘쳤다”고 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에 대해서는 “경제 상황을 개선하고, 주민들에게 암묵적으로 시장경제 일부를 용인함으로써 헤게모니를 상당 부분 장악한 것 같았다”고 했다.
박 전 대사는 1980~90년대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 북한에 4300만달러에 이르는 인도주의적 원조를 보냈다. 한국에 돌아와 대한민국 인권대사,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이번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주최한 ‘한반도 에큐메니칼 포럼’(한반도포럼) 운영위원회 자문 자격으로 독일복음선교연대(EMS) 루츠 드레셔 아시아 국장, 스티브 피어스 영국 감리교회 아시아 총무 등 대표단 12명과 함께 북한을 찾았다. 박 전 대사의 방북은 이번이 29번째다. 2000년 이후 16년 만에 북한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북한은 어떻게 달라졌던가.1990년대 후반까지 내 책임 아래 WCC가 굶주린 북한에 4300만달러를 원조했다. 당시 평양에 대한 내 인상은 초췌하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미래에 대한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평양의 얼굴이 깜짝 놀랄 만큼 환하게 변했다.
자동차가 그렇게 많을 수 없었다. 평양 시내에 도로가 막히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평양에서 서커스를 봤는데, 5천여 명이 들어가는 홀이 관객으로 꽉 찼다. 공연 뒤 일부가 택시로 집에 가더라.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택시를 불러 타는 장면은 이전에 상상하기 어려웠다.
평양뿐이 아니다. 황해도, 사리원, 재령 등에서 일정을 마치고 버스로 평양 숙소에 돌아올 때도 비슷했다. 개성∼평양 간 국도가 왕복 1차선이지만, 한밤에도 차선을 추월하기 어려울 만큼 차들이 오갔다. 휴대전화도 흔한 것이 됐다. 주민 절반가량은 휴대전화를 가진 것 같았다. 여성들의 옷차림도 울긋불긋해졌다. 남성들 역시 시커멓거나 국방색 일색이던 옷이 많이 사라지고, 서양식 옷이 눈에 띄었다.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쪽이 내세울 만한 것만 보여준 게 아닐까. 함께 방북했던 이들의 평가도 들려달라.평양의 주요 거리 전면에 있던 옛날 아파트들은 다 헐었다. 최근 3년간 지은 건물들이라는데, 말도 못하게 현대적이다. 물론 전시성 건물도 있을 것이다. 일부러 평양의 뒷거리도 가봤다. 거기에는 과거에 지었던 낡은 아파트들이 그대로 있더라.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평양에서 만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북한 주재원들에게 ‘나는 이렇게 변했다고 보는데 너는 어떻게 보냐?’고 물었다. 이들은 “네가 본 게 맞다. 북한에선 지난 3년 사이 많은 게 달라졌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최근 3년간 북한이 절대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내 친구이자 30년간 대북 지원 활동을 해온 에릭 와인가트너(전 유엔 WFP 평양주재원)도 “물질적 부분이 나아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높아졌다”고 하더라.
국제사회가 내놓는 여러 보고서를 통해서 여전히 어려움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눈으로 본 평양의 모습은 변화하고 있었다. 최근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농사 수확분 가운데 할당액을 정부에 내고 나면, 잉여분을 시장에서 거래하도록 암묵적으로 허락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식량 증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지하경제가 북한 경제를 상당 부분 지탱하고 있다.
북한의 많은 도시에서 오후 6시 이후 또다른 경제활동이 시작된다고 하더라. 식량 여유분을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싣고 시장에 내다파는 것이다. 대북 관련 한 미국인 관계자한테서도 “평양에 이런 암시장이 500개 정도 된다. 이런 방식의 경제활동이 왕성하게 평양에서 이뤄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외화도 지하경제에서 거래된다. 평양에선 원-달러 공정환율이 달러당 105원이다. 그런데 암시장에선 내가 갔을 때 7천원, 9천원까지 치솟았다. 암시장 달러당 가격은 70~90배까지 증가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내 인터뷰를 보면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시장경제에 눈뜬 ‘장마당 세대’가 경제활동에 본격 참여한 영향으로 보인다. 젊은 세대가 주류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권력자가 이런 경제활동을 막으면 인기가 없지.
북한이 달라질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김정은 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한 2013년, 때마침 국제 석탄 가격이 치솟았다. 중국이 북한 석탄을 사재기했다. 북한이 이때 돈을 많이 만들었을 것이다. 관광객도 부쩍 늘었다. 16년 전에는 평양에서 중국을 오가는 비행기가 일주일에 한 대 있었다. 일단 들어오면 일주일 동안 못 나가는 거다. 관광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고려항공과 중국 비행기가 번갈아 가며 뜬다. 이 비행기들이 베이징과 러시아 모스크바에도 가더라. 우리 일행의 귀국 비행기도 관광객이 들어차 만석으로 나왔다. 이게 무슨 얘기냐, 이 사람들이 외화를 놓고 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묵었던 양각도호텔에서 중국 관광객이 보통 2박3일을 머물고 떠나더라. 관광객이 상당히 많다. 북한이 이들에게서 외화를 받아 경제 부흥에 쓴다.
북한 당국이 ‘경제에 첫째 방점을 찍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고모부인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세력을 숙청하면서 정치적 집권 기반을 공고화할 수 있었다. 이후 엘리트 조직을 동원해 삶의 질 향상에 중점을 둔 김정은식 시스템을 만든 것으로 본다. 1982년 중국에 갔을 때, 당시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라는 게 서방의 시장경제를 흉내낸다고 생각했다. 이번 북한에서 당시와 비슷한 현상을 관찰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집권 여건이 나아지자 상당히 편안한 상태가 됐을 것이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하더라도 폐쇄성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남쪽 선수에게 환호하는 북한 관중들 북핵·남북 문제는 여전히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있다.이번에 만난 김영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박영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연구원 부위원장 등 북쪽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핵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핵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우리의 존립과 직접 관계 있는 핵은 절대 포기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도 사설에서 북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다. 우리는 핵 보유국으로 평화적 핵 사용의 의무를 철저히 지킬 것”이라고 하더라. 이들에게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다시 들어와서 평화적 목적으로만 핵을 사용한다는 것을 늘 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우리 정부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뭘 하겠다고 해선 안 된다. 일단 무조건 만나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손을 맞잡을 거라고 본다. 박 대통령이 고집이 있는데, 그 고집으로 하면 된다. 남북 문제는 ‘2분의 1 운동’을 해야 한다. 2분의 1을 두 번 더하면 일심 동체가 된다. 북쪽도 남쪽에 대해서는 전혀 부정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미국에 대해서만 “남의 나라에 왜 콩 났네 팥 났네 하냐. 미국 주도의 군사훈련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그걸 탈피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얘기도 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치지 않는다. 미국이 바람을 불게 해선 안 된다. 그러면 우리가 파도를 치게 된다.”
그 밖에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평양과학기술대였다. 평양 최고의 수재들이 국외에서 초빙된 세계적 석학 75명의 실력을 모두 빼먹더라. 이곳은 3년 전 박찬모 명예총장(전 포항공대 총장)과 김진경 현 총장(고려대 전 교수·옌볜과학기술대 전 총장)이 주도해 설립한 곳이다. 미국 국적을 가진 박 명예총장과 김 총장이 세계 석학들을 찾아 ‘남북이 분단됐지만, 자라나는 세대는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득해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내년에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도 올 예정이라고 하더라. 학생들은 전액 장학금과 무료 기숙사, 전 과정 영어 수업을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내놓은 수십만 평 땅에 연구·개발(R&D) 센터, 기숙사, 생명공학, 컴퓨터공학 건물 같은 게 수십 동 있다.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으면 이런 걸 생각할 수 있었을까? 평양과기대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를 해봤는데, 정말 잘해. 보통이 아니야. 정말 놀랐다. 우리 서울대 학생보다 나았다. 박 명예총장에게 ‘나도 가르칠 수 있다’고 했더니 인권 수업을 해주면 너무 좋다, 기간은 석 달도 좋고 넉 달도 좋다고 했다.
때마침 남쪽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북쪽 조선직업총동맹과 평양 5·1경기장에서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를 하길래 보러 갔다. 두 차례 경기에서 남쪽이 0-2(한국노총), 0-6(민주노총)으로 졌다. 남쪽 선수들 얘기를 들어보니 0-20으로 질 뻔했는데 북쪽이 봐준 것 같다고 하더라. 관중이 절반으로 나뉘어 응원했는데, 북쪽 선수가 공을 잡으면 야유가, 남쪽 선수가 공을 잡으면 환호했다. (웃음) 북한에서 보는 남북 축구 경기가 묘한 여운을 줬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이게 마지막 방북 여행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곧 여든 살을 바라보는데다, 정부가 허용하는 방북 기회도 예전만큼 많지 않다. 그는 “그래서 이번 여정이 더 값졌다. 내 민족이 배고픔을 떨쳤구나, 이들이 곧 국제사회로 나오겠구나, 이제는 눈이 반짝반짝하는 젊은 대학생들을 만날 수 있구나…. 이런 생각 때문에 기분이 참 좋았다. 남북 7500만 명이 우리 식으로 통일을 하면 전세계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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