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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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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스스로를 용서할 자격 없다

‘사과한다’는 말만 있을 뿐 태도에는 사과의 뜻 없는 백혈병 발병 사업장 삼성전자…
조정위원회의 권고안 받아들이지 않고 단독 보상위원회 꾸려
등록 2015-09-16 16:34 수정 2020-05-03 04:28
삼성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이 갈수록 꼬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9월3일 전문가 등으로 단독 보상위원회를 꾸렸다고 밝혔다. 1천억원의 기금을 마련해 11개 질병 피해자에게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7월23일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가 발표한 조정권고안을 사실상 받아들이지 않고 자체 보상에 나선 셈이다. 조정위원회는 삼성전자에 1천억원 기부와 공익법인 설립, 백혈병 이외에 희귀질환 보상 등을 권고한 바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은 9월7일 피해자 및 피해자 가족 55명과 공동명의로 자료를 내어 “삼성전자의 독단과 기만에 분노한다”고 크게 반발했다. 여섯 피해자 가족이 참여하는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 안에서도 “삼성이 사전 합의 없이 보상위 구성을 발표했다”며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명숙씨가 삼성의 의미 없는 ‘사과’를 꼬집는 글을 보내왔다. _편집자
‘반올림‘과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 가족들이 지난 9월7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삼성전자의 독단적인 보상위원회 발표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반올림‘과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 가족들이 지난 9월7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삼성전자의 독단적인 보상위원회 발표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하나님이 죄 많은 저에게 찾아와주셔서 제 죄를 용서해주셨어요.”

아이를 살해한 범인은 교도소에서 아이 엄마에게 말한다. 그 말에 아이 엄마의 눈빛은 고통과 분노로 흔들린다. 아직 본인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다른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아이 엄마는 절망에 빠진다. ‘용서와 사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했던 영화 의 명장면이다. 피해자에게 하지 않는 명분쌓기용 사과, 피해자와 협의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내용의 사과는 피해자를 더 힘들게 한다. 우리 사회에 사과의 말이 넘치지만 그 말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사과는 했으나 책임 인정은 없는

지난 5월14일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저희 사업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백혈병 등 난치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고 그분들 중 일부는 세상을 떠나셨다. 삼성전자가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직원의 노고와 헌신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은 분들이 계셨다. (중략) 이분들과 가족의 아픔, 어려움에 대해 저희가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 진작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권 부회장은 사과했으나 명확하게 삼성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혈병이 근무 중에 발생한 산업재해이므로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의미 있는 사과가 되려면 내용도, 형식과 방법도 중요하다. 나아가 사과 이후가 중요하다. 사과한 내용을 얼마나 책임지는지, 다시 말해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구성된 조정위원회에서 권고한 ‘조정권고안’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행하는가에 맞물려 있다. 따라서 지난 7월23일 조정위원회가 발표한 조정권고안 중 사과(노동인권선언)를 삼성이 수용하고, 어떻게 지켜나가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8월3일 삼성전자는 “조정위원회가 권고한 공익법인 설립은 해법이 될 수 없다”며 신속하게 보상하기 위해 보상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9월3일 독단적으로 보상위원회를 발족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삼성의 입장 발표를 보면서 ‘도대체 뭘 사과한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조정권고안의 4장(‘사과’)에서 ‘위험에 대한 충분한 관리가 없어 생긴 백혈병과 관련한 회사의 책임을 인정’하라는 내용과도 어긋난다. 마치 보상 때문에 삼성 백혈병 피해자와 가족들이 그동안 싸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삼성의 태도도 불편하다.

삼성이 직업병 문제에 대해 반올림과 대화를 시작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결국 삼성이 친삼성 인사로 보상위원회를 구성하고 독단적으로 발족까지 감행한 것은 사회적 해결이라는 의미와, 조정위원회가 4장 13조에 고심해서 별도로 넣은 ‘노동인권선언’를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다. 조정위원회는 당시 “교섭 당사자 모두는 노동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건강권이라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존엄과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공동으로 천명하는 취지의 노동건강인권을 선언”할 것을 권고했다.

삼성, ‘노동건강인권 선언 권고’ 무시

세계인권선언이 그렇듯 선언은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와 미래에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짚는 일이다.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선언이 많은 것은 이 까닭이다. 세계인권선언에서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인권의 가치와,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권리들을 천명했듯이 말이다. 건강권은 생명권과 직결될 뿐 아니라 표현의 자유, 문화의 권리 등 인권을 향유하는 기초적 권리다.

2008년 발표한 ‘산업안전보건 서울선언’에서도 정부, 기업주, 노동자들은 선언의 주체였다. ‘정부는 근로감독을 철저히 하고 기업은 노동자가 산업안전보건과 관련되는 모든 조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노동자는 안전보건교육을 이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노동인권선언은 보여주기용 문서가 아니라 일하는 노동자와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이 어떤 관점과 원칙으로 작업을 지시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줘야 하는지를 밝히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함께 만드는 선언은 삼성전자에서 어떻게 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권리를 무시해왔는지를 짚고, 건강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인정하는 것임을 기본적으로 담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 기업이 부정하거나 노동자가 놓쳤던 권리들이 노동자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필수임을 구체적으로 짚길 기대했다.

노동자가 취급하는 물질이 무엇인지 알 권리, 작업 과정에서 위험한 설비와 부족한 설비에 대한 시정을 요청할 권리, 건강이나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작업을 거부할 권리, 아플 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쉴 권리, 건강권과 관련해 회사 내·외부의 조력을 받을 권리, 안전한 작업을 위해 필요한 장비를 지급받을 권리, 안전과 건강에 대한 요구를 했다고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권리,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안전에 대한 권리를 차별 없이 보장받을 권리, 노동자가 노동안전정책 수립에 참여할 권리 등이 선언될 것이라 기대했다. 노동자와 기업주가 함께 ‘인간 존엄성은 기업의 이윤과 맞바꿀 수 없는 가치’임을 선언한다면, 인권의 가치를 작업장에 퍼뜨리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래야 백혈병에 걸린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비참함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힘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실천’ 없는 태도, 사과 않겠다는 뜻

그런데 삼성이 최근 보상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실상 조정권고안을 불수용하면서 노동인권선언의 의미는 증발할 위기에 처했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등의 재발 방지, 보상, 사과는 하나로 엮인 것이다. 노동인권에 대한 책임은 사과 따로, 재발 방지 따로, 선언 따로 구성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선언은 생명력이 없다. 실효성이 없는 법 조항처럼 ‘우리 회사는 노동인권을 선언했어요’라는 장식으로 악용될 뿐이다. 사과란, 말이 아니라 ‘발화 이후의 실천’이기에 최근 삼성전자의 태도는 ‘사과할 수 없다’를 의미한다. 삼성전자가 권고를 수용하고 노동인권선언으로 책임을 보여주리라 기대한 것은 우리들이 재벌기업의 탐욕을 너무 몰랐던 탓일까.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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