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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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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호를 거울에 비추면 세월호가 나타난다

늑장 초동 대응, 해경 구조세력 과장, 오락가락 승선 인원, 부실한 안전점검…
중동호흡기증후군에 이어 낚싯배 전복 사고에서도 반복되는 무책임과 무능력
등록 2015-09-16 16:14 수정 2020-05-03 04:28

또 똑같다. 2015년 5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전염이 확산될 때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와 닮았다고 썼다(제1065호 표지이야기 ‘닮아서 슬프다, 메르스와 세월호’). “무능력과 무책임은 쌍둥이 같고 골든타임은 또 놓쳤다”고 지적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9월5일 발생한 낚싯배 돌고래호(9.77t) 전복 사고에서 해경은 헛발질을 하며 첫 이상 신호를 놓쳤다. 승선 인원은 여전히 오락가락했고 무리한 증개축으로 배의 ‘복원력’(기울었다가 평형으로 되돌아오는 힘)은 약해진 상태였다. 출동한 구조세력을 해경이 과장해 발표했다는 의혹도 다시 불거졌다. 돌고래호 전복 사고가 ‘세월호 참사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따져봤다.

2015년 9월5일 제주 추자도 부근 해상에서 전복된 낚시어선 돌고래호의 실종자를 해경이 찾고 있다(위).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전남 진도군 팽목항 부근 해상에서 해경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2015년 9월5일 제주 추자도 부근 해상에서 전복된 낚시어선 돌고래호의 실종자를 해경이 찾고 있다(위).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전남 진도군 팽목항 부근 해상에서 해경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1. 첫 이상 신호를 놓쳤다

돌고래호 9월5일 저녁 7시44분께 제주 추자도 부근 해상에서 낚시인 등이 탄 전남 해남 선적 낚시어선 돌고래호가 전복됐다. 하지만 생존자 3명은 다음날 아침 6시40분께 인근 어선에 의해 발견됐다. 실종 신고가 접수된 지 11시간 만이었다. 9월7일 제주해양경비안전본부(제주해경)의 발표 내용을 보면, 돌고래호와 같이 출항했던 돌고래1호 선장이 9월5일 저녁 8시10분과 8시25분 두 차례 제주해경 상추자출장소를 찾아가 돌고래호와의 통신이 끊겼다고 신고했다. 최초 신고는 53분이 지난 밤 9시3분에야 제주해경 상황실에 전달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신설된 국민안전처는 ‘해상 어디서나 신고 후 1시간 내 출동’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번 일로 헛말이 됐다.

특히 해경은 사고 발생 사실을 어선위치발신장치(V-PASS)나 해상교통관제센터(VTS)를 통해 알아차리지 못했다. V-PASS는 30초마다 어선 위치를 발신하는 장비로, 긴급조난신호(SOS) 발신 장치도 들어 있다. 신호가 10분 동안 끊기면 해경 모니터에 엑스(X) 자로 표시되도록 만들어졌다. 해경이 V-PASS로 돌고래호의 마지막 위치를 확인한 것은 9월5일 저녁 7시38분이다. 그러나 같이 출항했던 돌고래1호 선장이 신고한 뒤에야 그 사실을 파악했다. V-PASS가 끊겨 모니터에서 사라졌는데도 1시간가량 사고 발생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해경 관계자는 “V-PASS를 항상 모니터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 선박 위주로 확인한다. 수많은 선박을 일일이 모니터링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세월호 2014년 4월16일 아침 8시46분께 세월호는 맹골수도를 빠져나와 8시50분께 급선회하며 속도가 17노트(시속 31km)에서 2노트(시속 3km)로 줄어든다. 그러나 진도 VTS에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8시52분 단원고 학생 최덕하(17·사망)군이 119상황실에 “배가 기울고 있다”고 신고했다. 3자 통화(119-최덕하-122)를 받은 목포해양경찰서 상황실이 세월호 사고를 인지한 시각은 8시54분. 그러나 승객에게 세월호의 경도·위도를 물으며 다시 4분을 허비한다. 목포서 상황실은 9시6분 진도 VTS에 연락해 세월호와의 교신을 요청했다. 그때에야 진도 VTS는 세월호 사고를 인지한다.

세월호 선원은 8시55분 제주 VTS로 사고 발생을 알렸다. “해경이랑 연락 좀 해주십시오, 본선 위험합니다. 지금 배 넘어갑니다.”(강원식 1등 항해사) 8시58분 제주 VTS는 제주해양경찰서 상황실에 122 신고전화로 사고 발생을 통보한다. 상황실은 지능형해상교통관리시스템으로 세월호 위치와 선종을 확인했다. 관할구역이 목포서로 확인되자 목포서 상황실에 사고 내용을 알려줬다. 그러나 제주해양경찰서장과 제주지방해양경찰청에 세월호 사고를 알리거나 제주 함정과 122구조대에 출동 지시를 내리진 않았다. 10분이 지나 목포서 상황실에서 지원을 요청하자 뒤늦게 제주 함정을 출동시켰다. 122구조대는 40분이 지난 9시48분에야 보냈다.

2. 과장한 구조세력

돌고래호 최영태 유가족 대책위원장은 “해경이 제대로 된 수색을 하지 않아 피해가 컸다”고 주장한다. 해경은 사고 발생 3시간 만인 밤 10시25분부터 함정 28척을 동원해 수색했다고 밝혔지만 유가족들은 “고작 2~3척이 수색했다”고 주장했다. “사고 첫날부터 해경에 함선의 이동 경로가 기록된 항로 항해일지를 보여달라고 줄곧 요구했지만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유가족) 이평현 제주해양경비안전본부장(제주해경)은 “함정 항해일지 등은 대외비”라며 비공개 원칙을 천명했다.

해경은 밤샘 수색을 벌였지만 구역을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허탕을 쳤다고 해명했다. 신호가 끊긴 추자도 예초리 북동쪽 500m 해역을 사고 지점으로 확정하고는 북동쪽을 집중 수색 구역으로 설정했다. 2011년 수백억원을 들여 설치한 표류예측시스템이 조류의 방향과 유속, 예상 항로 등을 고려해 그렇게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몰 어선은 추자도 섬생이섬 남쪽 1.1km 해상에서 발견됐다. 수색 방향과 정반대인 사고 지점의 남서쪽이었다. 직선거리는 불과 4~5km였다. 9월6일 선체 발견 뒤 사고 지점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형 수색으로 바꿨고 한나절 만에 주검 10구를 찾아냈다.

세월호 사고 당시 목포 122구조대는 낮 12시19분에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상황실과 목포서 상황실에서 사고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헬기나 함정 등을 연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22구조대가 직접 어선을 수배하고 함정으로 갈아타야 했기에 도착 시간이 늦었다. 결국 오후 1시에 122구조대원 2명이 최초로 수중 수색을 한다.

하지만 서해청 상황실은 그날 오전 11시35분 대내외에 전파한 “서해청, 목포 여객선(SEWOL호) 침수 발생 관련 진행 보고” 라는 상황보고서 2보에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는다. “11:24 목포 122구조대 4명, 여객선 투입.” 같은 날 저녁 6시9분에 전파한 상황보고서 5보에도 “11:24 목포 122구조대 4명, 여객선 진입 수색차 1차 시도”라고 썼다. 이를 근거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목포 122구조대의 최초 수색 시간을 사고 당일 11시24분으로 언론에 발표했다. 해경 본청은 이같은 내용을 4월27일 대통령 비서실에도 보고했다. 뒤늦게 사실관계를 파악했지만 해경은 이미 보고됐다는 이유로 다른 공문서를 수정해 목포 122구조대가 오전 11시24분에 최종 수중 수색을 한 것으로 “통일”해버린다.

3. 승선 인원 오락가락

돌고래호 살아서 돌아왔지만 그는 승선자 명단에 없었다. 10시간 넘게 뒤집힌 선체를 붙들고 생환했기에 망정이지 풍랑 속에 떠밀려 사라졌다면 아무도 그의 실종을 모를 뻔했다. 해경은 돌고래호 승선 인원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승선원 명부에 기재된 22명 중 4명은 승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3명이 새롭게 탑승해 승선 인원은 21명이라면서도 ‘추정’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사망자 10명을 수습했지만 몇 명을 더 발견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해경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소규모 항구에서 출항하는 낚시어선의 승선 인원 확인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현행 ‘낚시 관리 및 육성법’(낚시법)에는 어선이 출·입항할 때 승선할 선원과 승객의 명부를 첨부해 출·입항 신고기관의 장에게 제출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어선업자가 제출만 할 뿐 기관장이 이를 점검할 의무는 없다. 돌고래호 선장 김아무개(46)씨도 9월5일 새벽 전남 해남 남성항에서 출항하기 직전 자신을 포함한 22명의 이름이 적힌 승선자 명단을 제출했다. 남성항처럼 작은 항구에서는 민간인이 해경 대신 출·입항 신고 업무를 대행하고 있어 현장 점검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선장 김씨는 이 명단을 추자도 신양항의 해경출장소에도 그대로 제출했지만 해경은 그 숫자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세월호 세월호의 탑승자 수는 끝없이 바뀌었다. 사고 첫날(4월16일) 477명→476명→459명→462명으로 거듭 조정되다가 4월17일 475명, 4월18일 476명으로 굳어졌다. 구조자 수도 사고 첫날 161명에서 368명으로 뛰었다가 164명으로 곤두박질쳤다. 첫날 174명으로 확정됐던 구조자 수는 사고 발생 20일 만에 다시 172명으로 줄었다. 동일인이 중복 기재되고 실제 탑승하지 않은 사례가 드러났다.

이유는 여객사업자들이 관행적으로 승선개찰권을 부실 관리했기 때문이다. 해운법은 승객의 인적 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권한과 인적 사항이 적힌 승선개찰권을 보관할 책임을 사업자에게 부과했다. 하지만 2014년 4월15일 세월호의 추정 승객은 443명인데 청해진해운이 보관한 승선개찰권은 426개뿐이었다. 특히 이름과 생년월일, 연락처가 다 적혀 있는 것은 86장에 그쳤다.

4. 부실한 안전점검

돌고래호 승선 인원 대부분은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 사고를 당했다. 낚시법을 보면, 낚시어업자는 안전 운항을 위해 필요한 경우 낚시어선에 승선한 승객 등 승선자 전원에게 구명조끼를 착용하도록 해야 한다. 해남군도 2013년 ‘승선자 전원은 의무적으로 구명조끼를 착용해야 한다’는 고시를 제정했다. 하지만 생존자 박아무개(38)씨는 “비가 와서 구명조끼가 축축해 대부분 착용하지 않은 채 옆에 놔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낚시법은 선박의 안전점검을 낚시사업자에게 맡겼다. 자치단체는 안전 운항과 사고 방지를 위해 영업의 시간·횟수·구역을 조정하는 등 조처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상당수 낚싯배가 9.77t으로 건조검사를 통과한 뒤 선체에 불법으로 선실을 만드는 등 개조를 시도한다. 9.77t 정도의 배에서는 햇빛이나 소나기를 피할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고, 이런 공간이 없으면 낚시꾼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박을 개조해 상부에 무게를 더하면 복원력이 떨어져 사고 위험이 커진다.

세월호 침몰하는 여객선에서 터진 구명뗏목은 단 1개였다. 정비 불량이 원인이었다. 선박안전법은 우수정비사업장으로 지정된 사업장에서 안전설비를 점검·검사하면 해양수산부의 검사에 합격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했다. 사업자에게 안전점검까지 맡긴 것이다. 세월호 구명뗏목도 그렇게 검사해 탑재됐다. 같은 방식으로 점검한 청해진해운의 오하마나호를 2014년 4월24일 검경 합동수사부가 압수수색해보니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구명뗏목이 터지지 않았다.

세월호는 승인받은 도면과 달리 여객실 출입문을 16개에서 12개로 줄이고 5층 전시실 내부에 벽체 구조물(길이 25m, 높이 2.8m, 두께 20cm)을 추가로 설치했다. 최상부에 무게 21.6t이 늘어나면서 세월호의 복원력은 더 나빠졌다. 또 승인된 도면과 실제 세월호의 출입문 구조가 달라서 침몰 사고 이후 잠수사들이 선내 수색 구조작업을 하는 데 혼동을 빚게 됐다. 선박 검사 업무를 담당한 한국선급이 부실하게 점검한 탓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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