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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만의 재심,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기획 연재 ‘무죄와 벌’에서 보도한 전북 익산 택시기사 살인 사건(제957호), 징역 10년형 받은 최근호씨가 2년 전 청구한 재심 개시… 광주고검은 즉시 항고, 개시 여부는 대법원 손에
등록 2015-07-03 12:57 수정 2020-05-07 10:51
2000년 ‘전북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에 대해 광주고법이 6월22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과거사 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서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2014년 4월24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호소하는 인권단체의 기자회견 모습.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2000년 ‘전북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에 대해 광주고법이 6월22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과거사 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서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2014년 4월24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호소하는 인권단체의 기자회견 모습.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2015년 6월25일 검사 즉시항고장 제출.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근호(31·가명)씨의 재심 청구 사건 기록엔 무심한 문장 한 줄이 추가됐다. “오후 5시까지만 해도 항고장 제출 흔적이 없었는데, 방금 그랬네요.” 그날 밤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근호씨의 덤덤한 말투는 2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2013년 4월1일 ‘살인’ 전과자 스물여덟 청년은 사건 발생 13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고(제957호 무죄와 벌 기획 연재 다시 재판받게 해달라는 절규 참조), 2년2개월이 지난 2015년 6월22일, 광주고법 형사1부(재판장 서경환)는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2000년 전북 익산에서 발생한 택시기사 살인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을 확정한 2001년 광주고법 판결이 뒤집힐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인근 다방에서 배달일 하던 15살 소년

법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하기까지 상당히 엄격한 심리를 거친다. 기존 판결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조사 권한을 가진 정부기관이 수사 과정에서의 가혹 행위 등을 밝혀내 재심을 권고한 ‘과거사 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서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익산 택시기사 살인 사건이 그 좁은 길을 열었다.

광주고법은 “주요 증거는 피고인의 수사기관 자백과 법정 진술, 사망진단서 등인데 당시 소송 절차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증거’들이 드러났다. 이는 기존 판결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광주고검은 사흘 뒤인 6월25일 이에 불복해 즉시 항고했다. 근호씨가 다시 재판받을 수 있을지는 다시 대법원의 손에 달렸다. 대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해 재심 결정이 확정되면 유무죄를 다투는 본격적인 사건 심리가 시작된다.

2000년 8월10일 새벽 2시,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 버스정류장 부근에서 택시기사(당시 42살)가 어깨·가슴 등 10여 군데 칼에 찔린 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진다. 사건 발생 사흘 뒤 익산경찰서는 사건 현장 인근 다방에서 배달일을 하던 근호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당시 만 15살이던 근호씨는 곧 살인 혐의로 기소된다. 범행을 자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 수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근호씨는 주장한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받지 못할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경찰은 보호자가 경찰서로 오기 전에 자백을 받아냈다. 어머니 김은실(50·가명)씨는 경찰서에서 아들을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얼굴이 벌겋게 부어 있었고, 상의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진행된 1심 재판에서 근호씨는 무죄를 주장했다. 같은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던 김아무개씨 등 2명은 1심 법정에 출석해 경찰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증언을 했다.

2001년 2월2일 1심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항소했지만, 2심 법정에서 근호씨는 범죄 사실을 인정한다. 형량을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국선변호인이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재판부는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상고는 포기해버렸다.

3년 후 긴급체포된 이 “내가 진짜 범인”

2003년 6월6일 전북 군산경찰서가 긴급체포한 오승한(당시 22살·가명)씨가 자신이 3년 전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진술했다. 동갑내기 친구 진성구(가명)씨도 오씨의 범행 사실을 알고도 숨겨주었다고 했다.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범인이 따로 있었다는 소식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천안 소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근호씨와 어머니는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새 용의자들은 이후 수사 과정에서 자백을 번복한다. 당시 전북 지역 인권단체는 복역 중인 근호씨에 대한 긴급구제 조치 신청을 국가인권위원회에 냈다. 인권위는 가해자로 지목된 경찰관을 조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이듬해 3월 ‘진정원인 사실이 1년을 경과했다’며 진정을 각하했다. 물증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새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는 2006년 종결된다. 4년 뒤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한 근호씨가 가석방됐다.

2015년 2월10일 재심을 청구한 지 2년 만에 광주고법이 심문기일을 잡았다. 이날 14년 만에 광주법원에 왔다는 근호씨는 긴장한 모습이었다. 당시 사건을 맡고 있던 주심판사가 물었다.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가 얼마나 중한 범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았나. 하지도 않은 범죄를 했다고 자백한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 말을 근호씨는 다시 되풀이했다. “당시에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항소심 변호인도 계속 부인하면 (판사들이) 더 안 좋게 본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2015년 6월22일 광주고법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며 크게 세 가지를 ‘새로운 증거’로 들었다. △2003년 등장한 새 용의자 및 주변 인물들의 진술이 담긴 수사기록 △피해자가 탄 택시 운행기록(태코미터) 감정 △서울대 법의학교실 법의학연구소 유성호 교수의 의견서 등이다.

자백은 변함없이 ‘증거의 왕’

피해자가 운전하던 택시는 사건 당일 새벽 2시8분께 멈춰섰다. 근호씨는 같은 날 새벽 2시5분24초~2시5분39초, 2시9분11초~2시10분44초에 통화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2시8분부터 2시9분11초까지 약 1분 사이에 범행을 저질러야 한다. 유성호 교수는 피해자 부검감정서 등을 검토한 결과 “몸에서 발견된 상처 12곳과 다양한 방어흔을 고려할 때 1분 내에 범행을 하기엔 촉박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게다가 택시 운전석 쪽과 내부는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범행 당시 근호씨가 입었던 우의·반바지·반팔 티셔츠, 타고 있었던 오토바이 안장, 소지하고 있었다는 부엌칼 등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유 교수는 “피해자 상태로 보아 가해자 옷 등에 피가 상당히 묻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여전히 근호씨가 진범임이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2003년 나타난 새 용의자들은 이후 자백을 번복했으며, 우의와 부엌칼을 세제로 깨끗이 씻으면 혈흔이 검출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자백은 변함없이 ‘증거의 왕’으로 군림한다. “피고인은 경찰과 검찰에서 일관되게 범행을 자백했고 1심 제1회 공판기일에도 자백했을 뿐 아니라 항소심에서도 계속 자백했다. 1심 재판 2회 공판기일부터 범행을 잠깐 부인했으나 사건의 동기가 된 부분은 인정했다.”(광주고검 6월25일 재심 개시 결정 즉시항고이유서)

2015년 8월9일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난다. 대법원이 재심 개시 여부를 언제 결정할지는 기약이 없다. 세상에서 고립된 시간 13년, 다시 재판받기를 소망한 시간 2년. 15년 세월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박현정 <한겨레> 경제부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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