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끈질기게 물어야 할 국가의 책임

메르스 감염 피해자와 시민단체, 국가 상대 집단소송 검토 중 정부와 민간병원의 공방 예상돼, 피해자들이 적절한 보상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
등록 2015-06-30 15:26 수정 2020-05-03 04:28

요양보호사 A(70·여)씨가 지난 6월24일 숨졌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인한 29번째 죽음이다.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메르스에 노출된 뒤로는 스무 날 가까이 된 시점이다. A씨는 환자 도우미로 지난 6월5일 강동경희대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76번째 확진자 B(75·여)씨가 있었다. B씨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5월27~28일)→노인요양병원(5월28~29일)→강동경희대병원 응급실(6월5~6일)→건국대병원 응급실 등 병원 4곳을 거친 뒤 6월8일에야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보건 당국은 B씨와 접촉한 사람을 추적했다. 그러나 A씨를 놓쳤다.

A씨 놓친 게 동행인 탓이라는 보건 당국

강원도의 ‘국가지정 격리병원’인 강릉의료원에서 지난 6월23일 간호사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다음날 강릉의료원 입구에서 의료진이 환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6월25일 현재 메르스 확진자 180명 가운데 18.8%인 34명이 의사, 간호사, 방사선사 등 병원 관계자다. 연합뉴스

강원도의 ‘국가지정 격리병원’인 강릉의료원에서 지난 6월23일 간호사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다음날 강릉의료원 입구에서 의료진이 환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6월25일 현재 메르스 확진자 180명 가운데 18.8%인 34명이 의사, 간호사, 방사선사 등 병원 관계자다. 연합뉴스

A씨는 그동안 발열과 기침 증상이 있어 동네 내과와 이비인후과, 한의원, 약국 등을 전전했다. 2천 명이 넘는 사람과 접촉했다. 6월17일 정형외과 수술을 위해 ‘국민안심병원’인 강동성심병원에 입원해 폐렴이 심해지고 나서야 보건 당국은 A씨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보건 당국은 접촉자 조사 때 A씨와 함께 강동경희대병원에 왔던 환자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다고 탓했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 질병예방센터장은 “(그 환자가 요양보호사 A씨가) 평소 건강해 괜찮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A씨가 계속 밥벌이를 해야 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허술한 역학조사 방역망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A씨의 죽음에 국가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또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메르스 피해자들과 보건의료 관련 시민·노동단체는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와 무능이 메르스 사태를 확산시켰다며 국가의 책임을 묻는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 중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피해자를 모아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낼 수 있는지 관련 법률을 검토하고 있다. 국가배상법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 예방법)은 감염병 환자를 파악하고 관리할 의무, 감염병 유행을 막을 방역 조처 등을 못박고 있다. 정부가 A씨와 같은 감염병 환자를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경실련 보건의료정책위원이자 의료소송 전문가인 신현호 변호사는 “과거 전염병 확산 책임을 정부한테 묻는 소송 사례가 없었고, 아직 집단소송 원고가 모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소송 진행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사망자와 확진자, 자가격리됐다가 음성 판정을 받은 사람 등 구체적 피해 사례가 천차만별이다. 이에 따라 정부, 병원 그리고 메르스를 전파시킨 다른 환자 등 ‘피고’가 달라질 수 있다. 다른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는 “보통 의료소송의 경우, 원고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면 20~30%가량만 일부 인용된다. 특히 병원 내 감염은 병원의 과실을 밝히고 인과관계를 규명하기가 쉽지 않아 이길 확률이 더 낮은 편”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한길의 문정구 변호사는 지난 6월19일 서울행정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행정소송이다. 정부가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한 이후 19일이 지나서야 환자가 거쳐간 병원을 공개한 사실이 ‘감염병 예방법’이 정해놓은 전염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이처럼 법적인 책임 공방으로 번지면, 정부와 민간병원 사이에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엇갈릴 수밖에 없다. 정부와 병원 가운데 누구의 과실과 책임이 더 크냐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 비율이 달라지는 탓이다. 정부의 초기 대응이 부실했다는 새로운 증언이 터져나오는 까닭이다.

정부와 민간병원 사이의 팽팽한 긴장

평택성모병원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평택성모병원은 첫 번째 확진자가 입원했던 병원으로 메르스 사태를 확산시킨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아왔다. 그런데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첫 번째 확진자가 평택성모병원을 거쳐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가서 5월20일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뒤,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팀은 평택성모병원 의료진 10여 명을 격리 조처했다. 보건 당국은 “세계적으로 3차 감염은 없다”며 병원 쪽을 안심시켰다. 이에 병원도 첫 번째 환자가 입원했던 8층 병동을 비우고 환자를 7층으로 이동시켰다.

5월29일 14번째 확진자가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확인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역학조사팀은 평택성모병원을 찾아 격리 대상자를 50여 명으로 확대했다. 병원 쪽은 보건 당국에 ‘코호트 격리’를 제안했다. 메르스가 발생한 병동의 환자와 의료진을 병원 밖으로 내보내지 않아 전염병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보건 당국은 “코호트 격리는 규정에 없다.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도록 조처하라”고 했다. 정부는 5월29일 병원 쪽이 ‘자진 폐쇄’를 결정할 때까지도 ‘메르스’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이기병 평택성모병원장이 지난 6월22일 의료 전문 매체 와의 인터뷰에서 공개한 사실이다. 제1065호 표지이야기의 주인공인 42번째 환자(사망)와 딸이 평택성모병원에서 보낸 열흘(5월19~29일)에 대한 증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딸은 “8층에서 7층으로 이동할 때도, 엄마가 5월29일 서울의료원으로 이송될 때도 ‘메르스’라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병원 쪽이 우왕좌왕한 측면도 있지만, 결국 정부가 입을 틀어막았던 셈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 파장이 일자, 보건 당국은 “코호트 격리를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평택성모병원 이사장이 5월28일 질병관리본부에 전화를 걸어와 “의료진을 자가격리하는 대신 병원에서 숙식하며 진료를 계속하겠다”고 요청했다가 1시간 뒤에 “의료진 반대로 당초대로 의료진 자가격리를 실시하겠다”고 말을 바꿨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평택성모병원 관계자는 지난 6월24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큰 틀에서는 병원장의 인터뷰 내용이 맞다”고 거듭 밝혔다.

천병철 고려대 의과대 교수(예방의학과)는 6월25일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의학회가 개최한 ‘메르스 사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토론회에서 “접촉자 관리부터 자가격리, 시설격리, 코호트 격리 등에 대한 기준이나 지침, 예상 가능한 문제점에 대한 대비 등이 총체적으로 부재했다”고 지적했다.

정부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국회는 6월25일 서둘러 ‘감염병 예방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병원 이름과 환자 이동 경로 등 감염병 관련 정보를 신속하게 공개하도록 하고, 자가격리 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국가 보상 의무를 규정했다. 역학조사관에게는 병동 폐쇄, 이동 제한 등의 조처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줬다. 현재 공중보건의를 포함해 34명(정규직 2명)뿐인 역학조사관 수도 보건복지부에 30명 이상, 시·도에 2명 이상 반드시 두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사후약방문이다. 6월26일 현재 메르스 사망자 수는 31명이다.

“국가는 헌법을 배신했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헌법 제34조 6항)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6월25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는 헌법을 배신했고, 그 대가는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며 ‘메르스 사태 피해보상 및 의료대란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가칭)’ 제정을 제안했다. 국가가 메르스 환자 치료비 전액을 지원하고, 격리자와 부양가족에 대한 생계 대책, 치료 거점 의료기관에 대한 세부 지원 방안 등을 마련하자는 게 특별법의 뼈대다.

정부는 여전히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6월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국민에게 불안을 증폭시켜서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만 말했다. 끝까지 ‘사과’는 없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