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국가정보원의 사찰 논란이 불거졌다. 이번에는 사찰 대상이 사법부다. 국정원이 판사 채용 과정에 개입해 지원자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 등을 파악해온 것이다. 지난 대선 직전 불거졌던, 국정원의 인터넷 정치·대선 개입 사건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정보통치’라는 구습을 버리지 못한 국정원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 5월26일, SBS는 국정원이 2013~2014년 법원의 경력판사 채용 과정에서 신원조사 명분으로 지원자들을 직접 면접한 사실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들은 지원자들을 직접 찾아가 국가관을 비롯해 노사관계나 사회 현안,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의견까지 묻는 등 사실상 사상검증에 가까운 면접을 했다. 논란이 일자 국정원은 신원조사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사상검증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국정원은 세월호나 노사관계 등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는지에 대해서는 “그런 질문은 지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취재 결과, 국정원은 국가정보원법의 하위 법령(대통령령)인 ‘보안업무규정’을 근거로 오래전부터 경력법관 지원자를 대상으로 신원조사를 해오고 있었다. 해당 규정은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던 1964년 제정됐다. 이를 보면 국정원장은 공무원 임용 예정자 등에 대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성실성 및 신뢰성’을 조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신원조사 대상자는 △중앙행정기관의 3급 이상 공무원 △판사·검사 신규 임용 예정자 △국공립대 총장 및 학장 등이다.
유신 시절이던 1973년 대법원도 대법원 비밀보호규칙에 신원조사 절차를 규정한 조항을 신설했다. 이에 따라 법원행정처장은 판사 임용 예정자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성실성 및 신뢰성’을 알아보기 위해 국정원장에게 신원조사를 의뢰하게 됐다. 국정원의 조사 요청이 있으면, 판사 지원자들의 신상정보를 대법원이 국정원에 제공하도록 했다.
판사 지원자들이 제출한다는 신원진술서 양식을 보면, 기본 신상정보 외에 △재산 관계 △정당 및 사회단체 가입 여부 및 활동 기간 △북한 및 해외이주 가족·친족 정보 등을 쓰게 돼 있다. 국정원은 이 자료를 토대로 전화 통화 또는 면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사하고 그 결과를 다시 대법원에 보낸다. 국정원이 대법원에 보내는 신원조사회보서 양식을 보면 △국가관 및 직무자세 △준법성 및 보안의식 △생활상태 △성격 및 품행·대인관계 △참고사항을 기재하게 돼 있다. 대법원은 해당 자료를 인사서류에 첨부해 보관하고, 검토 결과 인사총괄심의관이 ‘국가안전보장에 지극히 유해로운 정보가 발견되었을 때’는 임용권자에게 임용 보류를 건의할 수도 있다.
과거에는 국정원의 신원조사가 노골적인 사상검증으로 이뤄졌다. 1970년대에 사용되던 신원진술서 양식을 보면 △공산당 좌익계 단체 가입 여부 및 직위 △가족, 친족 중 좌익단체에 가입·접촉 유무 △6·25 전후 낙오 실종된 사실 유무와 부역 또는 적의 교육 지명을 받은 일이 있는지 △8·15 이후 거주지 △해외여행지 등을 쓰게 했다. 국정원이 평가하는 신원조사회보서도 지금 양식과는 달리 △사상관계 △성질소행 등으로 구분됐다.
1980년대 들어 좌익단체 가입 여부 등 항목이 하나씩 제외됐지만 여전히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 일이 계속됐다. 결국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국정원 신원조사에 양심의 자유 침해 소지가 있다며 개선을 권고했다. 국정원은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여 신원조사 대상을 축소하고 조사 항목 중 본인 및 배후 사상관계, 종교관계, 해외여행은 제외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선 뒤 노골화?하지만 ‘국가관을 평가한다’는 조사 목적이나 방식이 여전히 추상적이어서 언제든지 사상검증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러 판사 지원 경험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2013년 이전의 신원조사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4년 전 경력법관에 지원했던 한 변호사는 “법원 행정처 쪽에서 정당 가입에 대해 서류를 제출해달라는 요구는 있었지만 면접을 받은 적은 없다. 나보다 먼저 법관이 된 지인들한테서도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4년 임용된 한 판사도 “내가 임용될 땐 국정원 면접이 없었다”면서 “2~3년 전 경력법관 임용 때부터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이후 법관들에 대한 신원조사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한 변호사는 “현직 판사로부터 ‘국정원이 현직 판사가 쓴 글을 수집하니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쪽은 “신원조사 목적에 부합하도록 ‘국가안보에 대한 위험성’ 측면에서만 판단 자료로 활용하고, 개인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성향 등은 법관 임용 심사 자료로 활용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판사 채용 기준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상황이라 대법원이 국정원의 신원조사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11년에는 민주노총 법률원 출신 변호사가 사법연수원 시절 성적이 5위 안에 들었는데도 경력법관 지원에서 탈락해,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성향을 문제 삼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법조계와 시민단체에서는 국정원의 신원조사를 비판하며 해당 규정 삭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성명을 내어 “국정원이 판사 지원자들을 비밀리에 면담하고 합격 기준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사법권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한 것과 다름없다. 대법원은 판사 임용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판사 임용에 어떤 세력이나 정치적 입장도 개입할 수 없도록 관련 규정들을 삭제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변회는 해당 규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로 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도 “임용 예정자가 아닌 지원자를 대상으로 신원조사를 하는 것은 위법 소지가 있다”며 “이번 일은 단순한 규정 위반을 넘어서 국정원과 대법원이 헌법 수호 책무를 포기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판사 신원조사가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대통령령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특히 국정원에 판사 임용자들의 신원조사를 의뢰하는 대법원의 행태에 대해서도 사법부 스스로 사법권 독립을 훼손한다는 비판이 만만찮다. 참여연대는 지난 5월28일 대법원장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내 △대법원이 상위법인 헌법을 부정하고 국가정보원에 신원조사 요청을 한 법률적 근거 △기본권 침해 소지가 있는 현행 보안업무규정과 시행규칙에 따른 신원조사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 △국가정보원의 신원조사가 법관 선발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 △사법부의 인사에 국가정보원의 개입을 허용하는 대법원 비밀보호규칙 1항을 폐지하는 것에 대한 견해 등을 물었다.
원세훈 “민노총·전교조부터 정리해야”공교롭게도 국정원의 판사 지원자 신원조사 사실이 드러난 다음날 보도로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의 국정원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불법화를 추진하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의 탈퇴에 개입한 정황이 밝혀지기도 했다. 가 입수한 2011년 2월18일 부서장회의에서 한 ‘지시강조말씀’을 보면, 원 전 원장은 “민노총이라든가 전교조… 내부 종북좌파들부터 정리해야 된다. 지난번 법원 판결로 인해 민노총 가입 교사들 징계 같은 것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협조를 하고요”라고 주문했다.
원 전 원장이 말한 ‘지난번 판결’이란 2011년 1월 민주노동당 당비를 납부한 전교조 조합원들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만~50만원을 선고받은 것을 말한다. 원 전 원장은 또 “이걸 (국정원) 직원들한테 맡겨놓으면 또 국정원에서 이것저것 관여했다고 그러니까 그런 것은 다 교육감이라든가, 교육감이 좌파 교육감 같으면 부교육감(교육부 공무원)을 상대해서… 전교조 자체가 불법적인 노조로 해서 우리가 정리를 좀 해야 될 것 같고”라고 했다.
민주노총에 대해서는 “민노총도 우리가 재작년부터 해서 많은 조합들이 탈퇴도 하고 그랬는데 좀더 강하게 하고”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탈퇴를 유도하거나 이 과정에 개입했음을 시인하는 대목이다. 실제 민주노총은 2009년 KT 노조가 탈퇴하고, 2011년 7월 복수노조 제도가 시행되면서 민주노총 계열 노조 사업장에 어용노조가 잇따라 설립되는 등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발레오전장, 유성기업 등의 회사에서는 사 쪽이 노조 파괴를 기획한 사실도 드러났다.
국정원의 광범위한 정치·선거 개입은 지난 대선 때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보도와 검찰 수사로 공개된 자료를 보면, 원 전 원장은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 하면 강에 처박아야지 4대강 문제라 뭐 이렇게 떠들어도 뭐. 일은 죽도록 해놓고 여태까지 여러분들 보니까 일은 우리가 했는데 왜 우리 가만히 있어”(2012년 2월17일), “금년에 여러 가지 대선도 있고 해서, 그리고 이번에 또 통합진보당만도 13명이고 종북좌파들이 한 40여 명이 여의도(국회)에 진출했는데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흔들려고 할 거고, 우리 (국정)원 공격도 여러 방법으로 할 거예요”(2012년 4월20일) 등의 발언을 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야당에 비판적이고 정권에 우호적인 인터넷 댓글을 달도록 주문해 대선에 개입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및 국가정보원법 위반)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국가정보원법 위반만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도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원 전 원장을 법정 구속했다. 현재 해당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기대에 못 미친 국정원법 개정 작업국정원 댓글 사건 이후 정치권에서는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을 통한 정치 개입을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등 국정원법 개정 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당시 추진했던 국정원 개혁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많다. 국정원이 선거, 노동문제, 정치 현안에 이어 법관 임용에까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이상 국정원의 총체적인 개혁 요구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경미 법조팀 기자 kmle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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