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김채영씨를 비롯한 경희대 신입생 4명은 취업 포털 잡코리아를 통해 매출액 기준 국내 300대 기업의 입사지원서를 뒤적였다.
이들이 307개 국내·외국계 기업 입사지원서를 조사해 정리한 보고서를 보면, 많은 기업들이 입사지원서를 통해 차별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거나 필요 이상의 개인 정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부모·형제 등 가족의 학력이나 출신 학교, 재산 정도, 주거 형태를 묻거나 키·몸무게·시력 등 신체 정보를 요구하는 항목이 대표적이다. 주량·흡연 여부(대명레저산업·다스)를 묻거나, 옷·신발 사이즈 등 신체 치수(동부제철)에 호기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과거 경력이 정규직인지 아닌지도 검토 대상이었다. 회사 입사나 면접 여부도 결정되지 않은 구직자에게 동의서나 서약서를 받는 기업도 있다.
하나대투증권은 개인 신용정보 공개 동의서를 요구했다. 구직자의 ‘백그라운드’ 또한 수집 대상이다. 금강공업은 대놓고 인맥 사항을, 이랜드리테일은 지인 명단, 출석 교회 이름, 미니홈피, 블로그 카페 정보를 기입하도록 했다. 미래에셋생명보험은 출근 거리를, 그린손해보험은 군번을 물었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신체 관련 항목 △가족 이름, 출신 학교 등 가족 관련 항목 △출신 학교 및 본교·분교 여부, 종교, 출신 지역, 결혼 여부 등 신상 관련 항목에 대해 차별 우려가 있다며 입사지원서에서 삭제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 학생들은 입사지원서에서 불필요한 질문이 많이 줄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출신 학교를 묻지 않거나 입사지원서에 증명사진 부착란을 빼기로 한 기업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는 더디다. 학생들은 궁금했다. 기업은 왜 이렇게 많은 정보를 요구할까? 직접 질문을 던졌으나 극소수 기업만이 답을 보냈다. 농심 쪽은 전자우편을 통해 “다수의 지원자에 대해 최초 서류 심사를 통해 회사가 필요로 하는 직무역량 파악이 불가피하며 이력서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매개 수단”이라며 “가족 사항에 대해선 선택적으로 기입하도록 양식 개선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외국 기업 입사지원서를 들여다보니 지원자 이름, 전자우편, 전화번호, 경력·자격 정보만을 수집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직접 바람직한 입사지원서 양식을 만들고,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한 대자보를 제작해 교내 곳곳에 붙였다.
취업은 대학 1학년생들마저 짓누른다. 그래도 입사지원서를 쓰기엔 너무 이른 시기. 이들이 입사지원서를 비판적 눈길로 바라본 건 ‘수업’ 덕분이다. 경희대는 2011년부터 전공·계열 상관없이 모든 신입생은 사회에 참여하는 민주적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시민교육’ 과목을 수강해야 한다. 학생들이 조를 이루어 일상에서 겪는 문제점을 스스로 발견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이다. 김채영씨는 이런 수업으로 얻은 경험이 값지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시간을 많이 내야 하는 수업이다. 어떤 학생들은 사회운동가를 양성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한다.” 해당 수업을 지도하는 박영선 객원교수는 “학생들은 현장 활동에 별도의 시간을 내야 한다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학생들의 문제라기보단 우리 교육의 문제”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해마다 수업에 등장하는 주제이 수업에 해마다 등장하는 주제는 학생들의 삶과 연관성이 높은 아르바이트다. 학교 주변 가게 사용주들이 근로계약서를 쓰는지, 학생들이 노동권에 대해 알고 있는지 등을 조사해 이를 알리는 캠페인을 한 학생들이 있었다. 사회생활 내내 일터에서 상처를 받았던 구진아(29·가명)씨가 이런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근로계약서를 써야 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 취업하라고만 하지 말고, 일하면서 겪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가르쳐주면 좋겠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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