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적인 토론의 정도를 넘어 내란의 실행 행위로 나아가겠다는 합치에 이르지 않았다.”(2015년 1월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단순히 일회적·우발적으로 민주적 기본 질서에 저촉되는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니다.”(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가 1월22일 내란음모·내란선동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이석기(53) 전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해 징역 9년을 확정했다. 항소심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은 내란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유죄로,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헌재가 옛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의 근거로 내세웠던 RO(Revolution Organization·지하혁명조직)의 실체와 그 ‘실질적 위험성’을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쟁점별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총 79쪽)과 헌재 결정문(총 347쪽)을 비교해본다.
대법원은 2013년 5월12일 서울 합정동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강당에 이 전 의원을 포함해 130여 명이 모이기는 했지만 이들을 실체가 있는 조직이라고까지 볼 수 없다고 했다. 제보자 이아무개가 RO의 구성원 및 조직체계에 대해 진술했지만 “그가 조직에서 말단 세포원에 불과하고 그 진술의 상당 부분이 개인적인 추측 내지 의견”이라서 받아들이지 않았다.(45쪽) 특히 이씨의 진술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가 부족했다. △참석자 130여 명이 RO 조직에 언제 가입했고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이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결론 냈다.(46쪽)
헌재는 RO를 ‘주도세력’이라고 표현하며 ‘이석기=경기동부연합=주도세력=통합진보당’이라는 논리 구조를 형성했다. 헌재는 이 전 의원을 경기동부연합, 주도세력의 수장으로 지목했다. 2012년 8월10일 진실승리선거대책본부 해단식 때 참석자들이 “동지여, 너는 나다. 내가 바로 이석기 동지다. 투쟁”이라는 구호를 제창했고, 2013년 5월10일 회합을 해산하면서 이 전 의원이 “다시 소집령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모이라”고 지시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참석자들은 경기동부연합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고, 당시 정세를 전쟁 국면으로 인식했다. 그 수장인 이석기의 주도하에 전쟁 반발시 북한에 동조해 대한민국 내 국가기간시설의 파괴, 무기 제조 및 탈취, 통신 교란 등 폭력 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한 것이다.”(126쪽)
2. 회합에서 합의가 있었나대법원은 내란음모죄로 처벌하려면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합의는 “개별 범죄행위에 관한 세부적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격의 대상과 목표가 설정돼 있고, 실행 계획의 주요 사항을 공통적으로 인식할 정도”는 돼야 한다.(48쪽) “단순히 내란에 관한 범죄 결심을 외부에 표시·전달한 것으로는 부족하고 객관적으로 내란 범죄의 실행을 위한 합의라는 게 명백히 인정돼야 한다.”
그 기준으로 보면 합정동 회합은 내란음모라고 할 수 없다고 대법원은 결론 냈다. 첫째, 회합 참석자들이 회합 이전에 조직적으로 내란을 사전 모의하거나 이를 준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5월10일 회합 참석자 중 일부는 아이를 데려오거나 한참 늦게 나타났다. 내란을 모의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둘째, 참석자들이 회합 때 구체적으로 어떤 발언이나 태도를 취했는지 알 수 없다. 권역별로 토론 결과를 발표했지만 이는 토의 내용을 요약한 것에 불과했다. 참석자의 생각이 동일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셋째, 일부 참석자가 국가기간시설의 파괴 등 갖가지 폭력 행위에 대한 발언을 했지만 다른 참석자가 모두 이에 동의했다고 할 수 없다. 회의적인 반응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49쪽)
헌재는 합의가 있었다고 봤다. “참석자들이 이석기의 지시에 따라 전쟁 발발시 북한에 동조해 국가기간시설 파괴, 통신 교란, 폭탄 제조법 및 무기 탈취 등과 같은 후방 교란 수단과 조직적 대응에 대해 논의했다. 홍순석(경기도당 부위원장) 등은 회합 전에 주요 시설에 대한 정보 수집 등의 지침을 전달받고 관련 정보를 공유했고, 전쟁 반발시 자신의 역할과 김일성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세포별 결의대회를 개최했다.”(125쪽)
대법원은 “1회적인 토론의 정도를 넘어서 더 나아가 내란의 실행 행위로 나아가겠다는 확정적 의사의 합치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49쪽) 그 이유는 참석자들이 합정동 회합에 참석한 뒤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폭력적 방안을 실행하려고 추가로 논의하거나 준비 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이석기 전 의원이 전쟁이 발발하면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통신·유류·철도·가스 등 주요 국가기간시설 파괴, 선전전, 정보전 등 다양한 준비 방안을 마련하라고 선동했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은 없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내란음모를 무죄로 판단한 이유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의 발언은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 자체로 위험성이 있다”며 내란선동 혐의를 적용해 유죄로 판단했다.(33쪽) 반면 이인복·이상훈·김신 대법관 등 소수의견은 “내란 구성 요건인 폭동은 시기, 대상, 수단 및 방법, 실행 또는 준비에 관한 역할 분담 등 윤곽이 어느 정도 특정돼야 하는데 (이석기의 강연은) 너무 추상적”이라며 내란선동도 무죄라고 판단했다.(59쪽)
헌재는 이 전 의원과 회합 참석자들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한다고 했다. “주도세력의 성향, 구성원의 활동 등에 비춰보면 단순히 일회적·우발적으로 민주적 기본 질서에 저촉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향후 유사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이 전 의원의 발언은 대한민국 존립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까지 했다고 봤다. “북한과 첨예하게 대치하는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면 그 위험성은 단순히 추상적 위험에 그친다고 볼 수만은 없다.”(135쪽)
같은 사안을 두고 대법원과 판단이 엇갈린 헌재는 곤혹스러워졌다. 헌재가 정당 해산 요건인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된 때’의 주요 근거로 ‘내란 관련 회합’을 꼽았기 때문이다. 정당을 강제로 해산해야 할 만큼 그 회합의 위협이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헌재가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그 실질적 위험성이 크지 않다고 결론 냈다. 성급함 탓에 헌재는 그 존재의 정당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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