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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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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미안했습니다

고용불안과 감정노동, 일과 삶의 불균형 속에 ‘나’는 지운 채

고객응대용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하는 여성 서비스 노동자들
등록 2014-11-20 17:50 수정 2020-05-03 04:27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영화 에서 대형마트 비정규직 계산원인 한선희(염정아)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사소한 실수를 다그치는 진상 고객과 관리직원 앞에서, 쭈뼛쭈뼛 처음 계산대를 점거한 순간에도, 파업노동자들을 향해 “서비스직에 있는 사람들이 이래서 되는 거예요?”라고 항의하는 고객에게도. 회사가 색깔을 지정해준 진분홍색 립스틱처럼, “죄송합니다”란 말은 비정규직 계산원인 여성 노동자들의 입에 착 달라붙어 무한 반복된다. 그 껄끄러운 말은 퇴근 뒤엔 “미안해”로 바뀐다. 돈 없는 엄마라서, 일하느라 파업하느라 챙겨주지 못한 엄마라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나아졌다지만 장식에 그친 ‘노동환경 개선’

“대형마트 노동자와 같은 서비스 노동자의 다수가 여성이다. 이들은 보통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일과 생활’에서의 갈등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상태에서 고용불안과 감정노동이라는 서비스 업종의 특수성까지 감당해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한선희’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우리나라 유통·호텔업 종사자는 약 49만 명(2013년 상반기 통계청 자료 기준)으로, 비정규직이 55.2%, 여성이 61.66%를 차지한다. 특히 여성 종사자 30만여 명 가운데 74%는 기혼여성이다. 지난 10월17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주최로 열린 ‘서비스산업 여성노동자의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워크숍’에서 김 연구위원이 발표한 자료에는 이런 현실이 수치로 나타난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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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의 기분이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한다.” 89.9%가 그렇다고 답했다. 지난 7~8월 홈플러스와 대형마트 협력업체(동원F&B) 소속 판매노동자 15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다. ‘고객이 왕’인 일터에서 노동자의 감정은 온전히 제 것일 수 없다. 고객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거짓 미소라도 띠어야 하고, 억지로 친절해져야 한다. 당연히 본인의 마음과 몸은 더 지친다. 응답자의 79.6%는 “근무시간이 끝났을 때 녹초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거의 365일 문을 여는 대형마트의 특성상 노동자들은 잦은 주말·야간 노동은 물론 불규칙한 교대근무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유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5.8점,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만족도는 4.3점에 불과했다(유통·호텔업 종사자 1434명 설문조사).

물론 몇 년 새 속도는 더뎠지만 나아진 측면도 있다. 2007년 이랜드 파업 이후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하루 종일 서 있는 계산원들을 위한 ‘의자 놓기’ 캠페인을 벌인 결과, 실제 계산대 뒤에 의자가 놓였다. 하지만 이경옥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등받이도 없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회전의자, 게다가 키높이 조절도 안 되는 의자는 장식용에 불과하다. 외국 대형마트처럼 계산대와 매장 설계 과정에서부터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고려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감정노동 인한 정신질환을 업무상 재해로

최근엔 기업과 소비자단체도 서비스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을 걱정한다. 올해 들어 홈플러스와 이마트, 롯데백화점 등은 노동자들이 고객응대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매뉴얼 또는 예방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로레알코리아, 시세이도, 부산 신세계 면세점 등 월 3만~10만원씩 별도의 감정노동 수당을 지급하거나 ‘감정 유급휴가’를 주는 기업도 있다. 소비자단체와 기업, 노조, 정부기관 등이 ‘감정노동을 생각하는 기업 및 소비문화 조성 전국협의회’를 꾸려 각종 캠페인을 벌이고, 국회에선 감정노동으로 인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등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자는 법률안도 잇따라 발의됐다.

언제쯤이면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대형마트에서, 백화점에서, 면세점에서 우리를 웃게 하려고 속으로 울어야 했던 ‘한선희’들에게 그동안 “미안했다”고, “고맙다”고 말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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