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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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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전 남친을 쏙 빼닮았군요”

뉴사우스웨일스대학 연구진의 초파리 ‘감응유전’ 실험…

먼저 교배한 수컷의 특징이 이후 교배한 수컷의 새끼에서 나타나
등록 2014-10-30 06:40 수정 2020-05-02 19:27
한 병원의 신생아실. 새끼가 전 남자친구를 닮았더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학 연구진의 연구 논문이 나왔다. 물론 초파리의 얘기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한 병원의 신생아실. 새끼가 전 남자친구를 닮았더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학 연구진의 연구 논문이 나왔다. 물론 초파리의 얘기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기 위해 일가친척이 다 모였다. 모두 다 한마디씩 던진다. “어머 이 코는 아빠를 쏙 빼닮았네요!” “입술은 외할머니와 똑같아요!” 만약 이때 누군가 “눈썹이 결혼 전 남자친구와 똑같은걸”이라고 말한다면 아내는 즉시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고 신생아실의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해질 것이다. 하지만 초파리의 세계라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초파리의 세계에서는 전 남자친구의 영향이 아기에게 나타난다.

지난 9월30일 생태학 전문지 에 뉴사우스웨일스대학의 연구진에 의해 초파리에게서 감응유전(Telegony)이 발견됐음을 알리는 연구가 실렸다. 감응유전이란 어떤 동물의 암컷과 먼저 교배한 수컷의 특징이 후일 그 암컷이 다른 수컷과의 교배 뒤 낳은 새끼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에게 이 이야기가 생소하지는 않다. 고릿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시대에 왕들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걸 막는 논리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14세기 영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흑세자 에드워드는 이혼 경험이 있는 사촌 조앤과 결혼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자손이 순수한 혈통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실제 근대 유전학이 발달하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는 생물학자들 역시 남성이 어떤 형태로든 여성의 신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경 영향으로 유전자 발현 조절되는 ‘후성유전학’

하지만 최근 환경의 영향에 의해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되는 현상인 후성유전학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그리고 후성유전학과 상관없이 비유전자적 기제를 통해 환경 또는 부계의 특성이 자손에게 전달되는 현상이 여러 동물에게서 발견되면서 감응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연구는 감응유전이 비유전자적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최초로 실험적으로 확인한 연구이며 비유전자적 요소가 진화와 적응에 특별한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흥미로운 결과다.

이들이 수행한 실험은 다음과 같다. 먼저 수컷 초파리들을 둘로 나눈 뒤 한쪽에는 다른 쪽보다 양분을 3배 더 많이 주어, 한쪽이 훨씬 크게 성장하도록 만들었다. 그다음 이 수컷 초파리들을 아직 생후 1주밖에 되지 않아 난자가 성숙하지 않은 암컷과 교배시켰다. 2주 뒤, 암컷들은 새끼를 낳을 수 있을 만큼 성숙했고, 이들은 다시 몸집이 다른 두 초파리 중 한쪽과 교배해 새끼를 낳았다. 암컷들은 그 교배 경험에 따라 다음 네 종류로 나뉘었다(표1 참조).

연구진은 이렇게 태어난 새끼를 성장시켜 그 크기를 측정했고,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새끼의 크기는 유전자를 전달받은 친부 초파리보다 먼저 교배했던 첫 번째 초파리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이다(그림1 참조).

진화와 적응에서의 유전자 외 다른 요소

이들은 암컷이 교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첫 번째 수컷의 영향을 받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교배 없이 같은 공간에만 두고 새끼의 크기를 측정하는 후속 실험을 했다. 이 경우 첫 번째 수컷의 크기는 이후에 낳을 자손의 크기와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첫 실험과 같은 결과가 발생한 이유가 교배에 있으며, 따라서 첫 번째 수컷의 정액에 의해 미성숙된 난자 또는 암컷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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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액이 암컷의 몸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연구는 이미 여러 차례 보고된 바 있다. 정액에는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이 포함돼 있다. 수컷은 정액을 통해 암컷의 행동을 바꾸는 전략을 구사한다. 예를 들어 무당벌레의 경우 수컷의 상태에 따라 정액의 화학물질 구성이 바뀐다. 이는 난자의 발달에 영향을 주고 정액의 화학물질들이 난자 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초파리 감응유전 실험 연구진은 먼저 교배한 수컷의 정액 속 어떤 물질이 암컷의 미성숙한 난자에 흡수돼 이것이 후에 태어난 새끼의 크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실험 결과를 해석한다.

이 발견은 진화와 적응에서 유전자 외에 다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인 것으로, 수컷과 암컷이 이 요소를 고려해 서로 다른 전략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약한 수컷은 건강한 수컷과 먼저 교배한 암컷과 교배함으로써 자신의 자손을 더 건강하게 만들려 했을지 모른다. 반대로 건강한 수컷은 약한 수컷과 먼저 교배한 암컷을 피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암컷이 앞서 어떤 수컷과 교배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수컷은 진화에 더 유리해졌을 것이다.

암컷 역시 난자가 미성숙했을 때는 훌륭한 정액을 가진 수컷을 선호하고, 난자가 성숙한 뒤에는 훌륭한 유전자를 가진 수컷을 선호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실험은, 아직 새끼를 낳을 가능성이 없는 암컷도 왜 그렇게 까다롭게 수컷을 고르는지를 설명하는 실험일지 모른다.

인간에게도 이런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까?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스튜어트 위그비는 이 기사를 보도한 일간지 에 이렇게 말했다. “이론적으로, 체내수정을 하는 모든 동물에게 감응유전은 가능합니다. 단지 그 증거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크린의 이번 연구는 곤충에게 그런 현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수정은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며, 따라서 이 방식으로 인간에게 감응유전이 일어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이 제안한 방식, 곧 임신 중인 여성의 혈액 속에 태아의 유전자가 발견되는 것 같은 방식으로 감응유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습니다.”

첫 번째 수컷을 조심하라

그런데 감응유전을 꼭 생물학적 특징이 전달되는 것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연인들은 서로에게 하루키를 읽게 하고, 말러를 듣게 하고, 양자역학을 설명한다. 그들이 훗날 다른 이와 낳은 아이들에게 하루키와 말러, 양자역학을 알려준다면 이는 문화적 요인이 전달되는 예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물론, 어떤 생물학적 변화가 어떤 기작을 통해 전달됐느냐는 충분히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발견은 충분히 새롭고 의미가 있는 결과다. 암컷 초파리는 첫 번째 수컷을 조심해야 한다. 물론 알아서 잘할 것이다.

이효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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