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주주의 유형론에 천착해온 세계 비교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석학 레이파르트(Arend Lijphart)는 뉴질랜드를 ‘원조’인 영국보다 ‘다수제’ 민주국가의 원형에 더 가까운 나라라고 평가했다.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양당제, 단일정당정부 등 ‘승자독식 체제’를 온존케 하는 다수제 민주주의의 3대 정치제도가 그 나라에선 본래의 설계 의도 그대로 실현돼왔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던 뉴질랜드가 1990년대 중반 국민투표에 의해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전격 도입함으로써 비례대표제, 다당제, 연립정부 등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민주국가로 전환하게 된다. 어떻게 그리도 과감한 정치제도 개혁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시민들이 그토록 강한 개혁 열망을 지속적으로 표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집권당의 독선·독주에 치를 떤 시민들
뉴질랜드의 선거제도 개혁 여론은 다수제 민주주의의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끊임없이 노출되며 점차 증대했다. 첫 번째는 ‘선거에 의한 독재권력’이라고 비난받을 만큼 지나치게 막강한 힘을 가진 단일정당정부의 존재였다. 단일정당 혹은 그 정당의 지도부가 국회와 행정부를 모두 지배할 수 있는 다수제 민주체제에서 집권당의 독선과 독주는 언제나 합법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국민 여론을 거스르는 행정부의 독선적 정책 수행의 예로 뉴질랜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꼽는 것은 1984년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강행된 신자유주의 확산 정책이었다. 1984년에 집권한 노동당은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이유로 과거의 진보파 정책 기조를 떨쳐내고 과감하게 신자유주의 기조로 선회한다.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고통받게 된 수많은 시민들은 독선적 정부를 양산해내는 자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때 사회적 담론으로 떠오른 것이 ‘민주주의의 다양성’이었고, 다수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합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비례대표제 도입 논의는 이 합의제 민주주의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졌다. 요컨대 비례대표제로 촉진되는 다당제와 연립정부 등을 근간으로 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좀더 효율적으로 가하고 싶다는 시민들의 바람이 뉴질랜드가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수 있었던 주요 동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직접 양당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양대 정당만으로는 다양해진 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정당 지지 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1972년 총선에서 양대 정당인 국민당과 노동당의 득표율 합은 90%였다. 그것이 1978년 총선에서는 80%로 내려가더니 1993년엔 마침내 70% 이하까지 추락했다. 이는 제3당 지지 증대로 이어졌다. 1978년 총선에서 사회신용당의 득표율은 16.1%였고, 1981년엔 무려 20.7%였다. 1984년엔 또 다른 제3당인 뉴질랜드당이 12.3%를 확보하고, 사회신용당은 7.6%를 얻었다. 1993년에는 동맹당(18.2%)과 뉴질랜드제1당(8.4%)의 득표율 합이 26.6%에 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1970년대 말 이후 시작된 양대 정당 회피 혹은 제3정당 희구 경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것이다. 양당제를 특성으로 하는 다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특표율 69%, 의석 점유율 96%
세 번째 문제는 바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최대 문제인 ‘불비례성’이었다. 각 정당에 배분되는 의석수가 국민 지지율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 역시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뚜렷이 부각됐다. 앞서 본 대로 사회신용당의 1978년 총선 득표율은 16.1%였다. 그러나 의석은 고작 1석(의석 점유율 약 1%)뿐이었다. 1981년의 선거 결과도 비슷했다. 사회신용당은 20.7%의 득표로 겨우 2석(의석 점유율 약 2%)을 건질 수 있었다. 다른 제3당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84년 총선에서 12.3%를 득표한 뉴질랜드당은 한 석도 차지할 수 없었고, 1987년 5.7%의 지지를 받은 민주당 역시 의석수는 제로였다. 이와 같이 소정당들 모두가 심각한 불비례성이 초래하는 과소대표 현상으로 인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반면 양대 정당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예컨대 1993년 총선에서 두 정당의 득표율 합은 69.8%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의석 점유율 합은 약 96%에 이를 정도였다.
선거제도 개혁 논쟁은 양대 정당 사이에서 일어난 불비례성 문제로 인해 더욱 뜨거워졌다. 노동당의 득표율은 1978년과 1981년 총선 모두에서 국민당보다 높았다. 그러나 의석은 국민당에 더 많이 돌아갔고, 따라서 득표율 2위의 정당이 단독 집권하는 사태가 두 차례 연속 벌어졌다. 1978년 선거에서 노동당과 국민당의 득표율은 각각 40.4%와 39.8%였으나 의석수는 각각 40석과 51석으로 국민당이 오히려 크게 앞섰다. 1981년 선거에서도 노동당의 득표율은 39%로 국민당의 38.8%보다 높았지만 의석수는 국민당보다 5석이나 적었다. 국민당이 두 차례나 계속해서 노동당보다 낮은 득표율로 집권에 성공하자 선거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는 소정당들의 과소대표 문제와 맞물려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어이없게 집권에 연속 실패한 노동당은 1981년과 1984년의 총선 공약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위원회’ 설치안을 내놓는다. 그리고 1984년 마침내 선거에 승리해 정권을 잡게 된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왕립위원회’였다. 2년간의 활동 끝에 왕립위원회는 1986년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도입 여부는 1990년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은 대다수 노동당 의원들의 선호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폐지에는 반대했다. 기본적으로 그 제도는 노동당이 포함된 양대 정당에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비례대표제의 도입보다는 기존 제도의 부분적 보완 정도를 원했다. 결국 노동당 정부는 집권 6년 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제도 개혁 공약을 실천하지 않았다.
꼼수 통하지 않은 시민들의 개혁 의지
1990년 총선이 다가오자 이번엔 국민당이 노동당 정부의 선거공약 위반 사실을 크게 비판하며 자당이 정권을 잡으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국민당이 진심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노동당의 언행 불일치를 선거정치의 호재로 활용했을 뿐이다. 1990년 국민당은 정권을 탈환했다. 그러나 반갑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집권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가 비례대표제 도입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개혁 여론이 그토록 뜨거우니 국민투표 공약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국민투표를 두 차례로 나누어 실시하고 대안 선거제도를 여러 개 제시함으로써 시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등의 여러 꼼수를 2년여에 걸쳐 부렸음에도 1993년에 치러진 최종 국민투표에선 53.9%가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로써 뉴질랜드의 선거제도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에서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전격 교체된다. 새로운 제도로 치러진 첫 선거는 1996년 총선이었다. 그 뒤 양당제가 다당제로, 단일정당정부가 연립정부 형태의 권력구조로 바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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