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 사과.”
KBS(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구성원 1200여 명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사회자가 말했다. “국민께 머리 숙일 때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외칩시다.” 1200여 개의 목소리가 한 호흡을 이뤄 KBS 전체를 울렸다. “KBS는 국민의 방송이다.” 파업 출정식에 모인 KBS 구성원들은 그들의 파업을 “속죄 파업”이라고 불렀다. 출정식의 첫 순서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묵념이었다. ‘청와대의 KBS 보도 개입’ 사태가 지난 5월29일 길환영 사장의 퇴진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총파업으로 폭발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아들딸의 영정을 들고 KBS와 청와대를 항의 방문한 지 각각 22일과 21일째 되는 날이었다.
유례없는 단일대오, 간부 보직 사퇴KBS 이사회가 전날 길환영 사장의 해임안 표결을 6월5일로 연기하자 KBS 양대 노조는 ‘해임 무산 때 파업 돌입’ 경고를 행동에 옮겼다. KBS의 ‘유례없는 위기’는 KBS의 ‘유례없는 단일대오’를 만들었다. 2009년 KBS노조(1노조·2500여 명·파업찬성률 83.14%)와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새노조·1200여 명·파업찬성률 94.3%)가 나뉜 뒤 첫 ‘동시 파업’이다. 이날 오후 2시 따로 파업 출정식을 마친 두 노조는 오후 3시 신관 광장에 모여 ‘함께’ 앉았다. “공영방송 사수투쟁”(1노조)과 “공정방송 쟁취투쟁 결사투쟁”(새노조)이란 각자의 구호부터 “방송독립 쟁취투쟁 결사투쟁”이란 구호로 통일했다. 양대 노조 위원장이 깃발을 서로 바꿔 들고 흔들 땐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속죄 파업’과 ‘동시 파업’은 이번 파업을 읽는 두 개의 키워드다. 권오훈 위원장은 “KBS를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라고 국민들이 명령한다. 지금이 KBS 독립을 지킬 마지막 기회”라고 호소했다. 왜곡·불공정 보도 성찰과 국민의 신뢰 회복을 위해선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다. 노조가 일을 놓으면 간부들이 빈자리를 메웠던 과거 파업과도 다르다. 이날까지 본사와 지역총국 팀장 이상 간부 323명(본사 팀장의 경우 72.3%)이 보직을 사퇴했다. 파업 공백을 채울 대체 인력이 없다는 뜻이다. 기자·PD·아나운서·기술·경영협회 등 직능단체들도 모두 결합했다. 이사회에 전달된 길 사장 해임 촉구 호소문에 실명으로 이름을 올린 임직원 수만 2198명이다. 사 쪽이 ‘사내 정서에 반한 일방적 파업’이라고 매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백용규 1노조 위원장이 “이번 파업은 노사의 싸움이 아니라 KBS 모든 직원과 길환영의 싸움”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전날 이사회의 표결 보류는 회의가 끝없이(9시간 이상) 길어지면서 사내 안팎에서 예견된 결과였다. 표결과 보류를 놓고 격론이 오간 끝에 이길영 이사장의 ‘6월5일 재논의’ 제안을 이사들이 수용했다. 부결되면 대안이 없다는 점이 야당 이사들도 표결만을 주장할 수 없게 했다. 표결 연기를 바라보는 KBS 구성원들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다.
적어도 지방선거(6월4일) 전까지 ‘길환영 체제’를 고수하겠다는 청와대의 뜻이 확인됐다. 정권이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KBS 사장을 자진 사퇴시키거나 해임시키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청영방송(청와대 방송)의 가교’로 낙인찍힌 길 사장이 선거를 앞두고 물러나면 청와대의 보도 개입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돼 정권으로선 큰 부담이다. 길 사장 퇴진 이후 비판적인 구성원들이 주도할 KBS 보도의 결이 정권에 날을 세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권으로선 파업과 제작 거부에 따른 KBS 뉴스 파행이 그리 나쁠 게 없다. 뉴스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은 결과적으로 야권에 불리하다.” KBS의 한 중견 기자의 분석이다.
여권에서도 ‘길환영으론 안 된다’머릿수(여야 7 대 3)에서 우세한 여당 이사들이 표결을 통한 ‘부결’이 아니라 ‘보류’를 선택한 이유도 살펴볼 대목이다. 여당 추천 이사들조차 해임안 부결은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길 사장을 향한 반대 여론이 역대 어느 사장보다 높은 까닭이다. 반대 여론이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비극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국민 정서를 외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표결 보류는 ‘길 사장 무작정 보호’로 비칠 것을 우려하는 여권 이사들의 ‘자기방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사회 당일은 ‘전관예우’ 논란에 휩싸였던 안대희 국무총리 지명자가 자진 사퇴한 날이기도 하다. 아노미에 빠진 청와대 처지에선 길환영의 해임으로 덧날 상처가 적지 않았다.
다만 길 사장의 생명이 한없이 연장될 것이라 보는 관측은 많지 않다. 길 사장은 공영방송의 수장으로서 리더십을 완벽하게 상실했다. 한 주 표결 연기는 ‘기사회생’이라기보다 ‘인공호흡’에 가깝다. 다음 이사회 예정일이 지방선거 다음날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파업에 참가한 KBS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내다봤다. “세월호 참사 이후 KBS는 청와대의 최대 아킬레스건이 됐다. KBS가 계속 무주공산으로 가는 것도 정권에는 달가울 수 없다. 여당도 6월5일엔 표결을 할 가능성이 있다.”
여권에서도 ‘길환영으론 안 된다’는 공개 발언이 나오고 있다. 이상일 새누리당 의원은 5월26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서 최성준 방통위원장을 앞에 두고 “길환영 사장하의 KBS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여당 추천 한진만 이사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명예롭지 못하지만 KBS를 위해서 어떤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용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한 이사와 유사한 견해가 KBS 경영진 쪽에서도 감지된다. KBS의 한 관계자는 “‘길 사장이 임기를 다 채울 생각이 없으니까 너무 밀어붙이지만 말고 퇴로를 열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이 사 쪽 고위층으로부터 전달되고 있다”고 했다.
두 노조는 무기한 파업을 각오하고 있다. 우선 목적지는 차기 이사회 개최일인 6월5일이다. 한 기자는 “이제부터 KBS 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방송 파행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6월5일까지 파업이 계속되면 길 사장이 직을 유지하더라도 엄청난 타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방송 파행은 파업 첫날부터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아침 6시 이후 텔레비전과 라디오 앵커·아나운서들이 대거 교체됐고, 다수의 프로그램이 ‘불방’ 혹은 ‘재방’으로 대체되고 있다. 뉴스는 기자협회의 제작 거부(5월19일) 이후부터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이사회 하루 전날에 예상되는 지방선거 개표 방송 파행도 길 사장의 입지를 좁힐 것으로 보인다. 중계료가 걸려 있는 브라질 월드컵 개막(6월13일) 이후까지 파업이 계속되면 거액의 경영 손해도 발생한다. 월드컵 방송을 담당하는 스포츠국 부장 5명까지 일을 놓고 제작 거부 중이다. KBS 사태 장기화는 새누리당이 단독 상정(5월8일)한 KBS 수신료 인상안 처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장 직할 부서인 수신료현실화추진단 팀장들도 전원 보직 사퇴했다. 수신료 인상은 ‘종합편성채널 먹거리 마련’(KBS 광고의 종편 이전)을 위한 정권의 숙원 사업으로 지목돼왔다.
27일 불법파업 혐의 MBC에 무죄 선고사 쪽은 파업 첫날부터 “근로조건과 무관한 사장 퇴진을 목적으로 한 명백한 불법파업”이라며 강경 대응을 공언하고 있다. “사규 위반에 따른 징계 책임과 불법행위에 따른 민형사상의 책임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하지만 서울남부지방법원 형사23부(재판장 박정수)는 5월27일 ‘불법파업’(2012년 김재철 전 사장 퇴진 요구 170일 파업) 혐의로 기소된 정영하 전 MBC 노조위원장 등 5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공정방송 여부는 근로조건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체포 시도’ 여인형 메모에 ‘디올백 최재영’ 있었다
중국의 보복관세는 왜 하필 석유·석탄일까
[단독] 여인형, 계엄해제 전 “자료 잘 지우라”…불법인지 정황
국내 첫 ‘철도 위 콤팩트시티’…남양주 다산 새도시에 건설
이재명 ‘위헌법률심판 제청’ 선거법 재판부 “예정대로 2월 말 결심”
[단독] 대답하라고 ‘악쓴’ 윤석열…“총 쏴서라도 끌어낼 수 있나? 어? 어?”
15억 인조잔디 5분 만에 쑥대밭 만든 드리프트…돈은 준비됐겠지
‘부정선거 주장’ 황교안 전 총리, 윤석열 변호인단 합류
“달 그림자” 윤 궤변에…국힘서도 “손바닥에 ‘왕’ 써도 하늘 못 가려”
“급한 일 해결” 이진숙, 방송장악 재개?…MBC 등 재허가 앞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