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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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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과 구럼비를 사랑한 게 죄인가

‘해군기지 건설 저지’ 평화운동가가 벌금 대신 ‘저항의 노역’을 선택한 이유
등록 2014-05-24 15:31 수정 2020-05-03 04:27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운동을 벌이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평화운동가 4명이 5월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저항의 노역’에 들어가는 기자회견을 연다. 그중 한 명이 벌금 대신 노역을 선택한 이유를 담은 글을 에 보내왔다. 다음날 제주도에선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사업단 정문에서 ‘벌금형 불응 선언’을 할 계획이다. _편집자


세월호 참사로 눈물이 온 땅에 가득한 2014년 5월. 나는 난생처음으로 ‘수배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떠올리면 가슴 두근거리고 당장 달려가고 싶은 강정마을과 구럼비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죄라면 죄일까. 라는 노래처럼 ‘이 기분 이 느낌대로 가슴이 차오르는 이대로 들끓는 나의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을 갖게 된 것이 무죄가 아니고 유죄인 오늘을 살고 있다.

인간띠 잇기·강정마약 댄스… 저항은 계속되고

평화의 섬 제주의 해군기지 건설이 지닌 문제점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일본 오키나와를 봐야 한다고 하여, 2006년 늦가을 오키나와에 갔었다. 제주와 흡사한 자연환경과 한(恨) 서린 역사, 그리고 헤노코에 건설하려는 미 해군기지 저지운동의 지난한 과정을 보고 들으며 평화란 무엇인지, 왜 군사기지가 문제가 되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고, 깨달은 만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몸부림을 쳤다. 내가 강정마을에 들어간 것은 2011년 여름이 되어서였다. 처음으로 구럼비에 걸터앉아 밥을 먹었고, 양말을 벗어던진 채 맨발로 구럼비를 걸으며 나는 강정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2013년 1월10일 제주 강정마을회와 제주해군기지건설저지를위한전국대책위원회 등이 기지 건설 사업단 앞에서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경찰에게 끌려나가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013년 1월10일 제주 강정마을회와 제주해군기지건설저지를위한전국대책위원회 등이 기지 건설 사업단 앞에서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경찰에게 끌려나가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012년 3월4일 첫 발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는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들은 그 즉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가서 무조건 비행기를 잡아타고 강정마을로 들어가기도 했다는데 나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저 엉엉 울고만 있었다. 발파 이후 구럼비로 향하는 모든 길이 완전히 차단당하자 성직자를 포함한 몇몇 분들은 펜스를 뚫고 구럼비로 진입했다. 그 결과 목사님과 신부님이 구속 수감을 당했다.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나는 선후배 목회자들과 함께 펜스를 톱질하는 것을 시작으로, 펜스에 돌을 던지고 돌에 맞아 깨진 구멍으로 공사장에 진입했다가 연행됐다. 강정포구에서 열린 행사 도중에 경찰이 임의대로 표시해놓은 경찰 저지선을 넘어갔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기독교의 주요 절기인 사순절(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며 실천하는 40일간의 절기)부터 시작된 개신교 기도회가 용역들의 폭력적인 방해로 중단될 때는 항의 표시로 대기하고 있는 레미콘 앞에 주저앉아 있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생인 딸도 함께 있었는데 갑작스레 연행된 엄마 때문에 가뜩이나 용역들의 만행에 놀랐던 딸아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서울에서 제주지법까지 수도 없이 오가면서 검찰의 기소가 잘못됐음을 증명하기 위해 날밤을 새워가며 증거 자료를 모아 이른바 ‘법정투쟁’ 투지를 불태웠다. 그 모든 노력에도 무죄는커녕 공안 사안이라며 벌금형과 집행유예라는 무거운 형을 받게 되었다.

혹자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기정사실이며 모든 저항은 끝났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강정마을 주민들과 강정에 빈 몸으로 들어와 강정 주민이 된 지킴이 등은 매일 오전 7시면 생명평화 백배로 아침을 연다. 오전 11시엔 어김없이 가톨릭 미사가 집전되고, 미사 뒤에는 인간띠 잇기와 일명 ‘강정마약 댄스’ 반주에 맞춰 내리 4곡을 온몸을 흔들어 춤을 추며 저항하고 있다.

강정은 그런 곳이다. 제아무리 펜스 안 땅 위로 건물이 들어서고, 케이슨이 만들어져 ‘강정바당’ 안으로 투하되고, 훼손된 오탁방수막이 이리저리 떠밀려다녀도 이제 다 끝난 일이라며 뒤돌아설 수 없게 만드는 곳 말이다. ‘파도 소리 울리고 마을 사람 어울리며 살은’ 안강정에는 폭포와 암벽, 은어, 깨끗한 물을 담고 있는 신비스런 냇길이소가 있고, 한여름이면 얼얼한 찬 기운을 찾아 뛰어들게 만드는 강정천의 물소리가 들리며, ‘범섬이 노래하면 써근섬도 따라 부르는’, 그리하여 일강정이라고 불리는 강정은 그런 곳이다.

650명 넘게 연행되고 벌금 3억원에 달해

중국의 위협에 대비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지만, 강정 원주민들은 안보를 해치는 공안사범이 된 지 오래다. 강정과 깊은 사랑에 빠져 강정앓이를 하는 이들까지 합쳐 연행된 수만 해도 650명이 넘고 벌금은 3억원에 달한다. 거듭되는 구속 수감 생활에도 맑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면회자들에게 되레 깊숙이 허리 굽혀 인사하시던 양윤모 선생님은 무려 4번이나 수감된 끝에 얼마 전에야 겨우 1년6개월의 형을 마쳤다.

5월20일 부당한 벌금형을 노역형 선언으로 고발하는 기자회견에는 나 외에도 2012년 4월16일 일명 ‘강정 전기톱 체포 사건’으로 연행됐던 분들이 함께할 계획이다. 당시 나는 현장을 목격했다. 지킴이들이 PVC 파이프관 안으로 넣은 손을 서로 맞잡는 방식으로 공사를 저지하자, 경찰들이 모터 소리 요란한 전기톱으로 자르려고 시도해 현장 주변에는 울부짖음과 비명이 가득했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과 형 집행을 남발하는 검찰과 사법부, 여기에 세월호 사건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해경과 해군의 민낯을 이미 강정마을에서도 여러 차례 맞닥뜨린 셈이다.

나는 올해 초 업무방해죄로 대법원에서 확정된 벌금 200만원을 납부하지 않아 수배자가 되었다. 불법적인 채증 활동이 매일 이어지는 기지사업단 정문 앞은 앉아 있기만 해도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 채증을 당한 2012년 9월7일은 케이슨 점거농성이 있던 바로 다음날이었다. 9월6일 새벽 케이슨 작업장에 올랐던 5명 중 2명은 경찰과 시공업체에 의해 안전장치 하나 없이 크레인으로 끌어내려졌다. 이들의 연행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날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연행 차량을 쫓아가다 길바닥에 널브러지듯 엎어지면서 제지하는 경찰들과 함께 뒹굴어야 했다. 벌금 200만원형으로는 어림없다는 듯 1심 판결에 불복한 담당 검사는 항소장에서 신앙인의 양심과 이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저항 표시인 비폭력 불복종 행동을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음, 종교의 자유와 평화인지 의심, 자아성찰 없음”이라며 모욕했다.

“구럼비와 강정마을에 대한 사랑은 무죄”

벌금형 200만원은, 환산하면 40일 노역형에 해당한다. 누구는 일당 5억원짜리 노역형을 살았지만, 우리는 1만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일당 5만원짜리 노역형이라도 살지 않으면 부당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중학생인 두 딸의 뒷바라지와 이제 시작한 지 1년4개월을 조금 넘는 작은 교회의 목회일도, 세월호 참사로 눈물을 뿌리며 들던 거리의 촛불도 잠시 접어둔 채 일상을 멈추고자 한다. 먼 훗날일지언정 공안 사건으로 취급돼온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운동에 대해 사법부의 상징인 ‘저울의 추’가 어디로 치우쳐 있었는지 밝혀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외친다. “구럼비와 강정마을에 대한 사랑은 무죄”라고.

“권력을 행사하는 한 명의 인간이 있는 곳에는, 그 권력에 저항하는 한 사람이 있다.”(오스카 와일드)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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