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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기도 어려운데 넓기도 하여라

먹거리·만성질환·돼지독감·FTA까지 ‘걸어다니는 사전’이라 불린 박물학적 전문가 고 박상표 국장
등록 2014-02-12 14:30 수정 2020-05-03 04:27

넓으면 깊기 어렵고 깊으면 넓기 어렵다. 그는 넓게 알고 깊이 파고들었다. 벗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 불렀다. 학문의 출발은 수의학이었지만 고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건강과 대안’ 연구위원)은 박물학적 관심을 가진 전문가였다.

“받은 자료 정독만 해도 현안 따라잡아”

박 국장이 역사에 관해 전문강사 수준의 식견을 가졌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건축과 음식, 의학, 도량과 지도 등을 풀어낸 저서 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특히 지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하이텔의 ‘고적답사동호회’에 가입해 온 나라 곳곳을 다니며 역사를 공부했고, 2002년부터는 참여연대 내 답사 모임인 ‘우리땅’을 이끌었다.
먹거리와 의약 문제에 관해선 1인 싱크탱크에 가까웠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은 식품 전반으로 관심이 확대됐다. 전세계 다국적기업과 국내 수입업자·식품재벌들이 어떻게 먹거리 산업을 왜곡하는지로 영역을 넓혔다. 외국의 최신 연구들을 부지런히 챙겼다. 지식을 공유하는 것 또한 즐겼다. 3~4주에 한 차례 이상 자신의 의견을 단 자료들을 각 영역의 전문가나 지인들에게 정리해 보내주곤 했다. MBC 의 광우병 취재로 그와 인연을 맺은 조능희 PD는 “박상표 국장이 보내준 자료들만 정독해도 병원·유기농·의약품 등의 현안은 대개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그런 작업을 해줄 순 없으니 그 빈자리의 무게가 대단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먹거리에 대한 고민은 자연히 고혈압·당뇨병 등 비전염성 만성질환(NCD·Non-Communicable Disease)으로 옮겨갔다. 비전염성 만성질환은 세계 공중보건 학계에서 최근 몇 년간 가장 뜨거운 이슈지만 국내에는 연구자가 거의 없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박 국장은 한국에서 비전염성 만성질환 문제를 최초로 다룬 사람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만성질환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담배·의약품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박 국장은, 지난해 12월 담배회사 내부 문건들을 수집·분석해 다국적 담배회사로부터 돈을 받은 한국인 과학자들에 대해 폭로했다. 금기시돼온 ‘청부 과학’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지식인이었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 반대 운동에서 그는 시민사회에 대항 논리를 제공하는 전문가이면서 대부분의 기자회견문과 반박자료를 직접 작성했다. 동시에 거리 연설을 마다하지 않는 운동가로 활약했다.한겨레 박종식, 연합뉴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지식인이었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 반대 운동에서 그는 시민사회에 대항 논리를 제공하는 전문가이면서 대부분의 기자회견문과 반박자료를 직접 작성했다. 동시에 거리 연설을 마다하지 않는 운동가로 활약했다.한겨레 박종식, 연합뉴스


무엇보다 그는 국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과 관련해서는 타협이 없었다. 2009년 신종플루가 확산될 때 박 국장은 고집스럽게 신종플루를 ‘돼지독감’이라고 부를 것을 주장했다. 당시 해외 언론·학계는 이 전염병을 돼지독감(Swine Flu)으로 표기했지만 국내에선 돼지 농가·식품 업계의 반발 때문에 끝내 신종플루로 표기했다. 돼지독감의 근본 원인이 발원지인 멕시코의 미국식 공장형 축산업에 있다고 생각한 박 국장은 그와 같은 명명이 사태의 본질을 흐린다고 판단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결같은 관심사였다. 그가 지인들에게 최근 보낸 전자우편에는 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관련 자료가 담겼다. 미국은 한-미 FTA와 마찬가지로 TPP에서도 원산지 검증 완화 등 ‘4대 선결 조건’을 내걸고 있다. 최근엔 철도노조와 만나 FTA, 철도 민영화와 관련된 자료를 건네기도 했다.

한국 학계의 불모성이 만든 전문성

우석균 위원장은 여러 영역에서 박 국장이 전문성을 쌓게 된 것을 ‘한국 학계의 불모성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박 국장은 관심 영역을 신자유주의 전반에 대한 비판적 지식으로 확대해갔다. 그가 많은 영역을 공부할 수밖에 없던 것은, 해당 부문의 제도권 학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적 효과가 없는 영역, 돈이 되지 않는 지식은 누구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국장의 빈자리는 벌써 시민사회에 큰 공백으로 다가오고 있다. 변혜진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국장의 한마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벌어지는 AI(조류인플루엔자) 문제도 그분이 없으니 나서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사람을 잃은 거죠.”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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