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십니까.
무탈과 평안을 여쭙는 ‘자괴’의 언어는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매일 무의미하게 던지던 ‘안녕하냐’는 인사가 울음이 돼버린 시절입니다. 습관적으로 묻던 안부의 인사 속에서 누군가는 연대의 온기를 찾고 누군가는 불온의 증거를 찾습니다. 안녕을 물을 수밖에 없는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당신은 안녕하신지요. 바싹 야위고 허리가 꺾인 채 ‘말이 감금된 시대’를 견디고 있을 당신의 언어는 안녕한가요. ‘말의 족쇄를 용인한 자’의 자책으로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안녕을 물어봐준 당신들의 손짓에 기대어 저도 부끄러운 대자보를 타전합니다.
철창을 뚫고 나와 흐르기 시작한 ‘안녕들’말을 가둔 철창을 뚫고 ‘안녕하냐’는 질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말하지 못했던 말이 용기를 내어 말들의 안부를 묻고, 말의 물음에 용기를 얻은 말들이 말의 물결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려대 학생 주현우씨의 첫 대자보(12월10일)는 물었습니다.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고,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냐”고,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니냐”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최인훈의 소설을 빌려 응답했습니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며 물어보았으나, 한결같은 얘기는 몸 성히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뿐이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학생이구나….”(회색인이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누군가는 진은영의 시를 빌려 응답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학점도 구리고 얼굴도 못생겨서 안녕치 못한 사람)
‘안녕들’의 질문으로 말들이 흐르기 시작(12월20일 현재 페이스북 ‘좋아요’ 26만 명)했습니다. 말하길 두려워하던 이들에게 ‘외면’과 ‘회색’과 ‘경계’를 뛰어넘으며 ‘안녕들’이 말을 걸고 있습니다. 세대와 계층과 국경을 넘나듭니다. 말의 흐름을 타고 철도 민영화의 폐해가 알려지고, 국가기관들의 선거 부정 사실이 전파되며, 송전탑이 짜낸 경남 밀양의 눈물에 눈물을 보탭니다. “부패한 정부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는 촘스키의 말이 회자되고, 쌍용자동차·콜트콜텍 해고자와 채동욱·권은희가 말이 되어 흐릅니다. 고려대에서 시작한 ‘안녕’은 전국의 대학교로 흐르고,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로 흐르며, 서울역과 명동과 정부서울청사 후문에, 도시 곳곳의 지하철 승강장에, 제주도 버스정류장 광고판에, 광주광역시 전봇대에 대자보로 붙어 흐릅니다. 외국인 유학생과 국회의원들의 입으로도 말은 번졌습니다. 성소수자 대학생이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말하고,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부당노동행위 중단’을 말하며, 다산콜센터 노동자들이 감정노동의 괴로움을 전합니다. 의료 민영화 문제가 말에 실리고, 출판노동자의 현실이 말을 타며, 학내 부정선거 논란이 말의 길에 오릅니다. 본래 말은 댐으로 가두고 둑으로 막는 게 아니라고 일깨우는 듯합니다. 말의 전염은 우리가 그만큼 많이 아프고 그만큼 서로의 안녕을 물을 틈 없이 곪아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독점된 정의, 재정의된 정의양의 위치로 들어선 진자 추는 영의 위치에서 멈추지 않고 음의 위치로 재진동합니다. 말을 누르려는 시도가 거꾸로 말을 부르기도 합니다. ‘안녕들’의 급속한 전파는 말의 억압에 따른 말의 반작용입니다.
“정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직전(2012년 10월22일) 야권의 정수장학회 공세에 맞서 ‘불굴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가 ‘정의를 손에 쥐고’ 대통령이 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정의란 오직 동등한 힘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용인될 미사여구입니다. 말의 추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운 관계에서 말을 장악한 이가 입에 올리는 정의는 불의의 포장일 뿐입니다. 정의는 말의 자유를 전제로 합니다. 자유를 잃은 언어는 언제든 정의의 이름으로 배반당할 수 있습니다.
정부 출범 1년 만에 말은 정의(正義)를 잃고 재정의(定義)되고 있습니다. 볼테르는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당신의 용어부터 정의(定義)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용어를 제대로 정의(定義)하지 못한 정권과 정의(正義)를 원하는 시민 사이에 말의 길이 열릴 리 없습니다. 정의(定義)에 실패한 정부는 정의(定義) 자체를 전복하고 정의(正義)의 내용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비판은 ‘종북’으로 재정의하고, 비판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재정의하며, 차이는 ‘위험’으로 재정의합니다. 대선 공약이던 경제민주화와 쌍용자동차 청문회가 거짓말로 들통나도 정의이고, ‘100% 국민행복시대’를 공언하며 국민 절반을 ‘국민 아닌 자들’로 솎아내도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국민대통합 약속은 대기권 밖으로 증발한 지 오래입니다. 말의 흐름이 통제된 세상에서 말의 권력만 남용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사촌 형부인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5년 만에 국회에 나타나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냐”(12월10일)고 강변했습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저항세력 앞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불통이라면 5년 내내 불통 소리를 듣겠다”(12월18일)고 했습니다. 뜻이 다른 이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 소통입니다. 지지자들과만 대화하겠다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다른 생각에 대한 ‘소탕’일 뿐입니다. 박 대통령이 ‘신뢰의 정치인’이란 정의(定義)를 독점하는 동안, 말의 신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말하려는 이들은 삶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하기 시작했다”정의(正義)를 잃은 말의 장벽에 ‘안녕들’이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자보란 매체 때문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손글씨라는 감성 때문이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글의 신산한 내용에 주목했습니다. 안녕은 고백부터 했습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유학까지 와 있는 제가 ‘안녕하지 못합니다’라고 하기엔 가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88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혹은 작은 돈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너무나 안녕했기에 안녕하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합니다.”(미국 UC버클리대 ㅅ·ㅂ씨 대자보)
남을 울리고 싶으면 자신이 먼저 울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박 대통령과는 다른 화법입니다. 안녕에 동참한 사람들은 ‘이 미친 세상에 어디 있더라도 행복하라’(브로콜리너마저 )는 말걸기의 방식에 반응했다고 했습니다.
“과거 대자보를 여러 차례 써본 나와 학생회 친구들은 ‘안녕들’을 바라보며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선언하려 했지만 ‘안녕들’은 다만 질문했고, 우리는 각성을 촉구했지만 ‘안녕들’은 다만 걱정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 우리의 언어에 반성했다.”(고려대 ㄱ씨)
‘안녕들’은 물어봐줬습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물어봐줬기에 누군가는 대답할 수 있었고 다시 누군가에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12월17일 동국대 ‘안녕들’ 행사에서 밀양의 ㄱ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 싸우고 있을 때 여러분이 안녕하냐고 물어줬다. 물어봐줘서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었고 안녕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다.”
주현우씨는 말합니다. “우리를 두고 세상 물정 모르는 세대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도 경제도 안다. 몰라서 말을 안 했던 게 아니다. 두려워서 말 못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들’은 가장 아날로그적 방식(대자보)으로 태어나 가장 디지털적인 방식(페이스북)으로 전파(대자보 글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려 동참)되고 있습니다. 그 말의 길 위에서 우리의 안녕이 서로의 안녕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도 배웁니다. 정부는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을 철도 민영화가 아닌 경쟁 강화라고 표현합니다. 그 논리로 코레일은 8500여 명의 파업 노동자들을 직위해제했습니다. 철도 민영화가 서민의 삶을 파괴할 것이란 노동자들의 우려에 정부는 경쟁에서 이겨 혼자만 잘 살라고 주문합니다. 혼자 살려면 인간은 짐승이거나 신이어야 합니다. 나의 안녕은 당신의 안녕에 안기고, 당신의 안녕은 나의 안녕을 이끕니다. 우리는 서로가 안녕할 때에야 정말 안녕합니다. 누군가의 안녕이 누군가의 안녕을 빼앗음으로써 가능하며, 누군가의 안녕하지 못함 위에 누군가의 안녕이 건축된다는 사실도 아프게 깨닫습니다. 우리의 안녕은 결코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프레임 속에 가두려는 사람들‘안녕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최연혜 코레일 사장은 “우리 국민들은 불법파업으로 안녕하지 못하다”며 ‘안녕들’의 언어를 정반대로 전용했습니다. 고등학교 교장들은 제자들의 대자보를 떼어내거나 경찰에 신고해 ‘말조차 검열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선명하게 깨닫습니다. 말은 허락받고 하는 것이 아니며, 안녕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안녕은 애써 물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안녕들’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에도 열망이 녹아 있습니다. 보수언론은 공격하고 진보언론은 훈수합니다. ‘무엇도 되지 않길 바라는 열망’과 ‘무엇이 되어주길 바라는 열망’이 다툽니다. 보수언론은 ‘해고’와 ‘직위해제’의 차이를 논하며 대자보의 ‘팩트’를 문제 삼습니다. 주현우씨가 노동당 당원임을 강조하며 배후세력을 의심합니다. 대학생들 간의 의견차를 부각시켜 이념 갈등으로 몰아갑니다. 진보언론은 ‘안녕’의 열기에 흥분하며 확산의 징검다리를 자처합니다. 성장의 가능성을 분석하고 전문가의 입을 빌려 조직화도 주문합니다. 어떤 이는 반가워하고, 어떤 이는 기특해하며, 어떤 이는 기획하려 합니다.
어느 쪽이건 ‘안녕들’은 대상화됩니다. 대상화는 ‘안녕들’의 상상력과 가능성을 포획하고 박제화할 것입니다. 고려대가 ‘안녕들’의 첫 번째 대자보를 박물관에 보존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상징적입니다. “선거에서 졌을 때 ‘20대 개새끼론’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드디어 대학생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든 분위기가 바뀌면 우리를 이기적 존재라며 비난할 것이다. 우리를 그들이 짜놓은 프레임 속에 넣지 말라. 계속하는 것도, 멈추는 것도, 세력화하는 것도 당사자들의 몫이다.”(고려대 ㅊ씨)
말은 알아서 흐릅니다. 알아서 터진 말은 알아서 공감하고, 알아서 연대하며, 알아서 투쟁하고, 알아서 진화합니다. 12월19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아 ‘안녕들’은 전국 곳곳에서 오프라인 시위를 벌였고, 미국·독일·프랑스·영국·캐나다로 말의 진지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거리공연의 형태로, 힙합으로, 스마트폰 앱으로, 차량용 스티커로, ‘안녕들’은 스스로 넓어지며 깊어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태어난 말의 흐름에 예상 가능한 답안을 제시하는 대신, 자신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말하고 누군가의 안녕을 물음으로써 말의 길에 동행하는 것이면 족합니다.
침묵과 순응의 괴물의 시대, 정말 안녕한가요저는 무력한 언론인으로서 안녕하지 못합니다. 말(言)을 논(論)함으로써 말(言)의 길(路)을 내는 것이 언론이며, 진실과 허위를 따져 기록(記)하는 자(者)가 기자입니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대신해 말의 길을 틀어막는 언론에 맞서, 말들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말의 길을 내는 현실이 부끄러워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변명과 반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문장마다 길을 잃은 이 가난하고 앙상한 글은 더욱 부끄럽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말에서 배제된 자들은 말을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사건’이 돼야 하는 시대입니다. 보지 않는 것을 보도록 삼성 최종범씨는 낡은 차에 번개탄을 피웠고, 듣지 않는 것을 듣도록 밀양 유한숙씨는 제초제를 마셨습니다. 두 사람의 안개 낀 하늘은 안녕한지요. 고공농성을 마치고 하늘에서 내려온 뒤 귀로 이명을 듣고 눈으로 가위를 보는 노동자들은 땅 생활에 문제없으신가요. 2013년 세밑의 시커먼 하늘에 매달려 사 쪽과 싸우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들도 안녕하십니까. 침묵과 순응의 괴물이 지배하는 시대, 우리 모두는, 정말 안녕한 건가요.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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